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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7화)
제1장 포졸출도(捕卒出道)(7)
“죽어 가는 환자에게 있어 나는 역천마수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에게 있어 나는 낭혼검객이다. 또 다른 자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씹어 내뱉듯이 한 자, 한 자 내뱉은 홍단야가 붉게 물든 눈으로 남궁진을 바라봤다.
“너에게 있어 난, 풍객이다.”
“그렇군!”
대체 뭐가 후련한 것일까. 후련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남궁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홍단야를 바라봤다.
“고맙네. 오늘은 일단 쉬게.”
“쉬고 싶지 않다.”
“쉬어야 하네. 자네는 괜찮겠지만 난 칠 일 전부터 한잠도 못 자고 일을 했거든. 자네도 알고 있겠지? 북궁청의 일 말이야.”
“그것 때문에 온 거다. 날 이틀 후, 망아산으로 가는 일행에 합류시켜라.”
명령조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불쾌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한 남궁진이 말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그녀를 찾아서 의수에게 데려가 해독을 받을 작정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홍단야의 말투에 남궁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해독? 자네, 독에 중독되었나?! 무슨 독인가? 지금 나에게 뛰어난 해독약이 있으니……!”
“내가 해독하지 못한 독이다. 신수나 의수가 아니면 해독하지 못한다.”
“끄응.”
태연한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이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풍객이라는 별호 말고도 역천마수라는 별호로도 불렸던 경력이 있는 홍단야다. 더군다나 역천마수라면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인 사수에 포함된 자. 그런 홍단야가 해독을 하지 못했다면 말 그대로 신수나 의수가 아닌 이상에야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라는 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의수에게 달려가 홍단야의 해독을 부탁하고 싶지만 지금 의수는 손녀를 잃은 충격으로 반 실성한 상태라는 소문이 빈번하게 나도는 상태였고, 또 사실이었다. 폐인과 다름없는 상태의 의수에게 해독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홍단야의 말처럼 의수의 손녀인 북궁청을 찾아 그 대가로 해독을 요청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일단 내일 아침 하북팽가에서 자세한 사항을 논의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세.”
“알겠다.”
홍단야가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진의 얼굴에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아무리 거지라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한 세가의 소가주였던 몸. 얼굴이 더러워도 절로 기품이 묻어 나왔다.
“오단.”
“예!”
“손님께 방을 안내해 드려라.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을 드리고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해라!”
“예!”
“고맙군.”
남궁진의 배려에 홍단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홍단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의 표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남궁진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 찾아가겠네.”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막 오단의 뒤를 따라가려다 멈칫했다. 이내 고개를 돌려 남궁진을 힐끗 바라본 홍단야가 입을 열었다.
“……만약 원하는 것이 있다고 했으면 죽여 버렸을 거다.”
“…….”
남궁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오단의 뒤를 따라 사라지는 홍단야를 멍하게 바라보던 남궁진이 돌연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조금 전,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봤던 홍단야의 물음에 아무것도 없다던 자신의 대답을 말한 것이다.
“하하하!”
낮은 웃음을 흘린 남궁진이 이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홍단야의 흔적을 찾으며 웃음을 흘렸다.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오단이 조심스레 사라졌다.
오단의 안내를 받아 어느 방에 도착한 홍단야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배정된 방을 둘러봤다. 남궁진의 말대로 건물의 후원에 있는 이 방은 조용하다는 말보다 적막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늦은 시각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것은 맞는 듯했다.
스르륵.
허리에 감긴 오라를 푼 뒤 침상에 앉은 홍단야가 돌연 일렁거리는 초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후웅.
픽.
홍단야의 손에서 일어난 가벼운 바람에 위태롭게 일렁거리던 촛불이 픽 하고 사그라지자 방이 어둠에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홍단야의 몸에서 붉은 적광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고오오오.
산맥을 질타하는 광풍의 울부짖음이 저리할까.
낮지만 날카롭고, 높지만 웅장한 소리가 번갈아 가며 홍단야의 몸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번쩍!
“후우.”
홍단야가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을 메우던 적광 또한 홍단야의 몸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좋군.”
운기조식을 끝낸 홍단야가 짧게 말하며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육체적인 피로야 운기조식을 통해 풀었다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그렇지 못했다. 물론 죽을 정도의 정신적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는 홍단야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잠시 몸을 뒤척이던 홍단야가 눈을 감았다.
홍단야가 잠에서 깬 것은 정확히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기척을 느낌과 동시였다.
스윽.
잠에서 깬 홍단야가 오라를 들어 다시 허리에 칭칭 감았다. 이내 옷매무새를 다듬은 홍단야가 막 문을 열자 후원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던 남궁진과 마주쳤다.
“헛. 역시 일어나 있었군.”
“일은 어떻게 됐나.”
“일어나자마자 일 얘기인가? 일단 시장하니 요기부터 하세.”
배를 살살 문지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남궁진이 홍단야를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본래라면 거지답게 구걸을 하겠지만 북경 지부의 지부장이 구걸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장로나 늙은 노개들 중에서 가끔 구걸을 하며 밥을 얻어먹는 거지들이 있다지만 남궁진은 아니었다.
역시 하북의 성도라는 북경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소란스러웠기에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홍단야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자자, 조금만 참게.”
그런 홍단야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남궁진이 살살 웃으며 홍단야를 달랬다.
남궁진이 안내한 곳은 교묘하게도 바로 어제, 홍단야가 망아산에 관한 정보를 들은 그 객잔이었다.
“엇! 남궁진 지부장님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미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이미 예약을 해 둔 것인지 객잔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주인이 헤프게 웃으며 남궁진을 안내했다. 점심 시간대라 그런지 객잔의 일이층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에 비해 삼층은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한산했는데 아마 특별한 손님만을 대접하는 곳인 듯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인이 안내한 곳에는 방금 전에 나온 듯한 음식들이 나열되어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어제 홍단야가 먹은 조촐한 음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음식들이었다.
“과하군.”
살짝 인상을 찌푸린 홍단야가 말했다.
“하하. 우리 둘이서 다 먹을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네. 명색이 나도 거지인데, 내가 음식의 소중함을 모르겠나?”
“또 누가 오기로 했나?”
홍단야의 목소리에 불편함이 서렸다. 그런 홍단야의 기분을 눈치 챈 것인지 남궁진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망아산으로 가는 것에 도움을 주실 분이네. 그것보다 자리에 앉게. 음식이 다 식어 가는군. 그분께서도 먼저 식사하고 있으라고 했으니 혼날 일은 없을 걸세.”
말을 마친 남궁진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홍단야 또한 쓸데없이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에 앉아 묵묵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현 무림에서 남궁진을 혼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문파의 문주나 세가의 가주, 그리고 개방의 방주와 장로들 정도였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입가심을 위해 차를 마실 때까지도 남궁진이 말한 그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점소이가 두 번째 차를 내올 때쯤, 마침내 남궁진이 말한 그분으로 보이는 노인이 삼층의 계단을 통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초췌한 모습의 노인, 남궁진이 말한 그분은 바로 선도의수 북궁낙이었다.
거뭇거뭇했던 머리는 절반이 새하얗게 새어 그의 고통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살짝 손을 대기만 해도 픽 쓰러질 듯한 모습의 북궁낙의 곁에는 한 사내가 붙어 있었는데 북궁낙의 호위인 듯했다. 거뭇거뭇한 구레나룻과 장대한 체구,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커다란 도로 보건대 하북팽가의 사람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도를 감싼 도갑(刀鉀)의 화려한 장식으로 보건대 결코 낮은 지위는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막 차를 마시려던 남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북궁낙이 꼭 무림의 선배라서가 아니라 그의 선행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중원에서는 중원의 예를 따라야 하는 법.
홍단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북궁낙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군…….”
북궁낙의 대답에 남궁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정도였단 말이신가.’
예전 힘차고 당당하던 북궁낙 대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손녀를 잃어버린 노쇠한 노인일 뿐이었다.
“자리에 앉으시죠.”
북궁낙에게 자리를 권한 남궁진이 점소이를 시켜 차 두 잔을 더 시킨 뒤 입을 열었다.
“손녀분의 일은…….”
“되었네. 그것보다 어서 이야기를 시작하지.”
남궁진의 말을 단번에 자른 북궁낙이 회색빛 눈으로 홍단야를 바라봤다.
“이자가 자네가 말한 그 손님인가?”
“그렇습니다.”
생기 없는 눈으로 홍단야를 스윽 훑은 북궁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반갑네. 내가 바로 선도의수 북궁낙일세.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미안하구먼.”
“홍단야입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는 홍단야를 보던 북궁낙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손녀를 구하고 싶다고?”
끄덕.
북궁낙의 물음에 홍단야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에 열정이나 그 밖의 감정이 떠올라야 하는데 눈앞의 이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죽어 나가도 당연히 죽는다고 납득해 버릴 듯한 표정이랄까?
‘안 좋아…….’
북궁낙이 알고 있는 한, 저런 얼굴을 지닌 사람들 중에서 생명을 무겁게 보는 자는 보지 못했다.
북궁낙의 입술을 비집고 얇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내 의술보다는 사람 보는 눈이 더 자신 있네만 자네를 보자면 절대 누군가를 위할 사람은 되어 보이지 않는군.”
“어, 어르신…….”
날카로운 북궁낙의 말에 남궁진이 차를 마시다 말고 당황한 목소리로 북궁낙을 제지했다.
“난 시간 끄는 것을 싫어하네. 또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싫어하지.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구먼. 그래, 자네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해독입니다.”
짤막한 홍단야의 말에 북궁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원에서 해독이라면 신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제일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이 손님이 자신의 손녀를 구하고자 하는 이유 또한 납득이 됐다.
“으음. 맥을 짚어 봐도 되겠는가?”
스윽.
북궁낙의 요청에 홍단야가 손을 뻗었다. 홍단야의 팔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자리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홍단야의 맥을 짚던 북궁낙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지독한 독이로고…….”
홍단야의 손목에서 손을 뗀 북궁낙이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아마 일정한 주기로 고통을 주는 약인 것 같구먼. 그렇지 않은가?”
끄덕.
홍단야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북궁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해약이라고 먹고 있는 것은 해약이 아닐세. 아마 자네가 처음에 복용했던 독에 몇 가지 약을 더 섞어 만든 것 같네만……. 어쨌든 그 약을 먹으면 고통이 멈추겠지? 그것은 고통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네. 느껴지지만 않을 뿐, 자네의 몸은 계속해서 그 독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