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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8화)
제1장 포졸출도(捕卒出道)(8)


“그럴 수가……!”
옆에서 듣고 있던 남궁진이 신음을 흘렸다.
묵묵히 북궁낙의 말을 듣고 있던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독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어느새 바뀐 홍단야의 말투에 북궁낙과 호위 무사가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홍단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객잔을 가득 메우는 것은 끝없는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미된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부르르.
탁자 밑으로 말아 쥔 홍단야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똑똑…….
말아 쥔 주먹에서 붉은 핏발울이 떨어져 객잔 바닥을 때렸다.
‘감히……!’
자신이야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대사님은 아니었다. 그분은 무공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스님에 불과했다.
‘갈기갈기 찢어 주마……!’
고개 숙인 홍단야의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조선으로 달려가 놈들을 찢어 죽이고 진짜 해약을 요구하고 싶지만 조선 곳곳에 숨겨 둔 첩자들은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그 사실을 이성계에게 보고할 것이고, 꾀 많은 이대룡은 곧바로 대사님께 해를 가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네놈들 뜻대로 놀아 주마!’
가슴속으로 분노를 삭인 홍단야가 고개를 들어 북궁낙을 바라보자 바싹 굳어 있던 북궁낙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두 사람분의 해독약이다.”
“으음.”
한차례 신음을 삼킨 북궁낙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해독약은…… 만들 수 있네.”
약간의 뜸을 들인 북궁낙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자네는 내 손녀를 구해 줘야 하네. 자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야.”
“약속은 지킨다.”
단호한 홍단야의 음성.
생기 없던 북궁낙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번뜩였다.
“믿겠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북궁낙으로서는 풍객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음으로써 목숨보다 소중한 손녀딸을 구할 확률이 높아졌고, 홍단야로서는 북궁낙의 손녀를 구함으로써 대사와 자신의 해독약을 얻게 되니 서로가 이익인 셈이었다.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그럼 내일 보세.”
끄덕.
홍단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북궁낙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어 하북팽가의 호위 무사로 보이는 사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진과 홍단야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인 뒤 북궁낙을 부축하며 사라졌다.
“휴우. 생각보다 더 심각해 보이시는군.”
북궁낙을 염려하는 것인지 남궁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걱정이나 해라.”
“내 걱정?”
갑작스런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이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래. 의수의 호위 무사로 보이는 사내가 널 향해 투기(鬪氣)를 내뿜더군. 그것 때문에 죽여 버리려고 했다.”
“뭐? 하하핫!”
마치 눈앞에 있는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인 양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처럼 말하는 홍단야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은 남궁진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세상에 패룡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 한 명뿐일 걸세.”
“패룡?”
홍단야의 물음에 한참을 웃던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도 구룡오봉(九龍五鳳)을 알고 있겠지?”
끄덕.
알고 있다는 듯 홍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룡오봉은 현 무림의 후지기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열네 명으로, 한 명 한 명이 훗날 한 단체의 수장이 될지도 모르는 무인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의수의 호위로 온 저 사내가 바로 팽 가주의 둘째 아들인 패룡 팽보강일세. 현 팽 가주의 젊었을 적 별호인 노호도를 이어받을 만큼 성질이 불같기로 유명한 사내지. 본인도 패룡이라는 별호보다 노호도라는 별호를 더 좋아하더군.”
“그렇군. 그런데 왜 네게 투기를 내뿜는 거지?”
“허…….”
약간은 불편한 기색의 남궁진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와 내가 만나던 오 년 전,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사내를 기억하는가?”
기억난다는 듯 홍단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 전, 남궁진과의 첫 만남 때 남궁진의 옆에서 계속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던 한 젊은 사내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놈의 이름은 팽풍걸, 바로 하북팽가의 장남으로 남궁진과 함께 혁혁한 명성을 쌓아 올리던 사내였다.
과거 팽풍걸은 남궁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홍단야에게 비무를 요청했고 처절하게 박살이 났다. 일방적으로 승리를 한 홍단야는 등을 보이고 도망치려는 팽풍걸의 척추를 으스러트렸다.
“기억난다니 다행이군.”
남궁진이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패해 척추가 부러진 후, 의수 어르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척추를 치료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네. 그래서 산책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만 있다고 하더군.”
“그게 네게 투기를 내뿜은 것과 무슨 상관이지?”
“팽풍걸의 척추가 부러질 당시,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나였네. 당연 하북팽가 사람들이 자네의 용모를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네. 하지만 그때 당시 자네에게 많은 배움을 받은 나로서는 차마 자네를 배신할 수 없었네. 그렇기에 대충 얼버무렸는데 그 일로 팽보강이 나에게 앙심을 품은 것 같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홍단야의 모습에 남궁진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왕 온 것 저녁때까지 술이나 마셔 보자고. 주인장, 여기 술과 가벼운 안주 좀 내오게!”
홍단야 또한 싫지 않은 듯 묵묵히 창밖을 노니는 제비를 바라봤다.

스스슥.
보초를 서는 무인들의 경계심이 가장 늘어지는 새벽 시간.
한 인영이 팽가의 하늘을 날아 움직였다. 인영은 그림자를 지날 때는 그림자로 변했고, 나무 위에서 숨을 돌릴 때는 나무로 변했다. 인영이 순찰을 도는 무인의 바로 옆을 지나쳤음에도 무인은 그저 바람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스르륵.
탁.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 인영이 도착한 곳은 바로 팽가의 장남이 있는 팽풍걸의 거처였다.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팽풍걸의 성격을 반영한 거처답게 그의 거처는 가주인 팽목천의 거처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스르륵.
한 마리 구렁이처럼 지붕에서 내려온 인영이 잠시 그림자에 머무는가 싶더니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인영은 놀랍게도 요즘 팽풍걸이 한창 밤 장난감으로 쓰고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어린 시비였다.
사박사박.
끼익.
전과는 달리 일부러 기척을 흘리며 움직인 시비가 곧 팽풍걸의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 한 점 없는 깜깜한 어둠에 시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곧 요사스러운 표정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리, 벌써 주무시어요?”
“…….”
교태로운 시비의 목소리에도 어둠 속의 팽풍걸은 묵묵부답이었다.
“아이, 나리, 어서 이 소녀의 몸을 뜨겁게 해 주시와요.”
“…….”
스윽.
연신 보채는 시비의 목소리에 마침내 죽은 듯이 침상에 누워 있던 팽풍걸이 신형을 일으켰다. 침상에서 일어나 시비를 향해 고개를 돌린 팽풍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따위 더러운 짓거리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팽풍걸의 협박에 시비의 몸이 움찔하는 것도 잠시, 끈적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다시 시비의 입에서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시어요. 소녀는 무서워요.”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우우웅.
서슬 퍼런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은은한 적광이 뿜어져 나와 거처를 밝혔다. 만약 팽가의 다른 누가 봤다면 혀를 물고 까무러쳤을 만한 광경이었다.
오 년 전, 팽풍걸은 분명 풍객의 손에 척추가 으스러짐과 동시에 단전까지 파손되어 영영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폐인이 되지 않았던가! 그 당시 의수 또한 손을 내저었던 것이 바로 팽풍걸이었다. 그런 팽풍걸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상당히 높은 경지라니!
만약 팽목천이 봤다면 팽풍걸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 분명했다.
“…….”
피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적광에 교태를 부리던 시비가 움직임을 멈췄다.
시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거 너무 무서워서 아랫도리에 지려 버린 것 같은데? 크크크.”
놀랍게도 시비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의 그 교태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굵디굵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십 대 중반의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사내의 음성은 신기하다 못해 괴기스러웠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 시비가 방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내일까지 만남은 없던 것으로 하지 않았던가.”
“크크크. 나도 그러고 싶지만 예상 밖의 일이 생겨서 말이야.”
“예상 밖의 일?”
팽풍걸의 반문에 의자에 앉아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던 시비가 조심스레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잡기 위해 탈혼삭이 나타났다.”
“탈혼삭? 그게 누구지?”
시비, 아니 시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의 생소한 모습에 팽풍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꼴은 마치 당장이라도 눈앞에 탈혼삭이라는 자가 나타날까 봐 두려움에 떠는 쥐새끼 꼴이 아닌가. 자신이 아는 그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겨우 한 명이 두려워 저런 반응을 보인 다는 것 자체가 팽풍걸에게는 의문이었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린 시비가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나를 잡기 위해 조선에서 보낸 자객!”
사이한 붉은빛이 번뜩이는 시비의 눈에서 현기증을 느낀 팽풍걸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너는 팽가의 그늘 아래 있다. 그 누가 감히 이곳 하북에서 팽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거냐.”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팽풍걸의 모습에 시비가 고소를 흘렸다.
“아쉽게도 놈은 가능해. 아니, 비단 팽가가 아니라 그 어떤 곳도 놈을 구속할 수 없지.”
시비의 말에 팽풍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아는 한, 팽가는 적어도 하북에서는 무적이었다. 물론 개방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가주가 된다면 그따위 거지새끼들쯤이야 단숨에 멸방(滅幇)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 팽풍걸의 반응을 즐기는지 잠시 뜸을 들인 시비가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중원에서는 풍객이라 불린다지?”
“……뭐?”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이 팽풍걸의 전신을 휘감았다.
풍객이라니! 풍객이라니!
우우웅.
다시금 팽풍걸의 몸에서 짙은 적광이 뿜어져 나왔다.
팽풍걸의 볼 살이 푸르르 떨렸다.
뿌드득.
“정말이냐? 정말 풍객이 이 근처에 왔단 말이냐!”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찢어 죽일 듯한 팽풍걸의 모습에 시비가 진득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크크. 이유는 모르지만 놈도 내일 계집을 찾기 위해 망아산으로 간다고 하더군.”
“그럴 수가……!”
분노로 일그러졌던 팽풍걸의 얼굴이 단숨에 처연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만은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그녀는 나만의 여자다! 설사 풍객이라 해도 감히 그녀를 가질 수는 없어!”
치리링. 치링.
분노를 넘어선 광기에 침상 위에 있던 팽풍걸의 도가 몸을 떨며 도명(刀鳴)을 토했다. 도와 몸이 하나가 되는 신도합일(身刀合一)의 경지였다.
‘크크크. 좋아. 미쳐라, 더 미쳐!’
광기에 몸을 떠는 팽풍걸의 모습에 시비, 아니 탐화견(貪花犬) 이호가 진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미쳐라! 더 미쳐서 이 빌어먹을 세상을 부수는 거다!’
이호는 그날, 그 산에서, 그 패악을 저지르는 팽풍걸의 저 광기에 반했다.
그렇기에 팽풍걸의 무공을 되살렸고 자신은 다른 모습으로 변해 그의 주변에서 도움을 주었다. 만약 팽풍걸이 이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광기를 지녔다면 이호는 가차 없이 떠났겠지만 한 여인을 향한 팽풍걸의 광기는 이호조차 전율할 정도였다. 팽풍걸이 자신의 패악을 감추기 위해 이호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쯤은 눈 감아 줄 수 있었다.
“절대 안 돼! 그녀는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그녀는 오직 나만을 위해 태어난 여자다.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단 말이다……!”
팽풍걸을 바라보는 이호의 눈이 팽풍걸의 그것과 같은 색의 광기를 뿜었다.
‘탈혼삭. 네놈이 저 미친 사내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크크큭.”
시비의 얇은 입술을 비집고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