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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9화)
제2장 풍객(風客)(1)
홍단야와 남궁진은 하룻밤을 술로 지새웠다.
다음날의 일도 있기에 가볍게 한잔만 하고 쉬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남궁진이 취해 버리는 바람에 홍단야는 꼬박 하룻밤을 남궁진의 술주정을 들어 줘야 했다.
당연 홍단야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미, 미안하네. 이거, 내가 너무 과하게 마셨군.”
이제야 취기가 가신 것인지 남궁진이 한 손으로는 욱신거리는 배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가에 묻은 이물질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다행이군.”
남궁진을 향해 차갑게 쏘아 준 홍단야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홍단야의 모습에 남궁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술에 취한 자신의 배를 때려 억지로 구토를 하게 한 홍단야가 미워 보일 법도 하건만 남궁진은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다.
“휴우.”
운기조식을 통해 남은 취기를 몰아낸 남궁진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지.”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주망태로 취해 인사불성이 된 남궁진과는 달리 홍단야는 옷만 약간 구겨져 있을 뿐, 어제와 같이 깔끔했다.
객잔을 나서자 막 떠오르는 태양이 홍단야와 남궁진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시간을 가늠한 남궁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거, 잘못하면 늦겠군.”
“다른 일행은?”
홍단야의 물음에 남궁진이 재빠른 걸음으로 대로를 걸으며 답했다.
“아마 망아산 초입에 모여 있을 걸세.”
“그렇군.”
대로를 벗어난 남궁진이 경공을 발휘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개방의 절정 보법인 취팔선보(醉八仙步)였다. 남궁진의 몸이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쭉쭉 뻗어 나갔다. 그 뒤를 이어 홍단야의 신형이 바싹 따라붙었다.
한참을 내달리던 남궁진의 신형이 돌연 멈추자 홍단야 또한 경공을 멈췄다. 다행히 망아산이 북경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지라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다 왔네.”
숨을 돌린 남궁진이 걸음을 옮겨 저 앞에 보이는 무리에게 다가갔다. 홍단야 또한 남궁진의 곁에 붙어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보이는 엄청난 수의 거지들이었다. 과연 인원으로는 중원 제일이라는 개방답게 산을 포위한 거지들의 수만 해도 이곳에 모인 무인들의 몇십 배였다. 비록 다급하게 모은 자들이라 실력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기본이 매듭 두 개인 이결 제자들이었다.
둥그렇게 퍼진 거지들의 중심에는 푸른색의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있었는데 허리춤에 달린 도를 보니 아마 하북팽가의 선봉 부대라 할 수 있는 철혈천호단인 듯했다. 각각이 모두 철혈적성도법(鐵血摘星刀法)을 극성으로 익힌 이들답게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정확히 열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중년인들이 누군가를 호위하듯이 둥그렇게 모여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학사풍의 중년인들이었다. 그들은 팽 가주의 직속 호위로 십팔추혼도객이라 불리며 대대로 십팔추혼도객의 혈육들에게만 내려오는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를 익힌 이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총 네 명의 남녀노(男女老)가 있었는데 황금색 장포를 두르고 밤송이 같은 수염을 가진 거한의 중년이 바로 팽 가주인 붕산패도 팽목천이었고, 푸른색의 무복을 걸친 병약한 얼굴의 사내가 바로 홍단야의 손에 척추가 으스러져 폐인이 되었다는 풍천도(風天刀) 팽풍걸이었다.
그리고 함께 붙어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 중 검은 무복의 사내가 바로 어제 의수의 호위로 온 패룡 팽보강, 새하얀 도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바로 화봉(華鳳) 청연이었다.
팽목천이 남궁진의 모습을 본 것인지 십팔추혼도객을 무르고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구만!”
역시나 팽가의 핏줄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망아산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팽목천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한 남궁진이 팽목천의 뒤에 있는 나머지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일세, 풍걸. 그리고 오랜만이다, 청연. 보강은 어제도 보았으니 인사는 하지 않으마.”
“함부로 형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꽝!
손에 들린 도로 땅을 내리친 팽보강이 남궁진을 향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팽목천 또한 남궁진에게 나름대로 감정이 있는 것인지 따로 팽보강을 제지하지 않았다. 팽풍걸은 남궁진의 인사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싸늘한 얼굴을 유지하며 홍단야를 노려볼 뿐이었다. 홍단야 또한 피하지 않고 팽풍걸의 두 눈을 주시했다.
“…….”
휙!
그렇게 한참 동안 홍단야를 노려보던 팽풍걸이 눈싸움 끝에 고개를 돌렸다.
남궁진의 인사에 화답을 한 것은 화산파의 제자인 화봉 청연이 유일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하하, 그래. 더 아름다워진 것 같구나.”
남궁진의 칭찬에 청연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청연은 과거 남궁진이 세가에 있을 때부터 교분을 나눈 사이였기에 팽가의 식솔들과는 달리 남궁진을 냉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팽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인사를 마치고는 다시 팽보강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것 참…….’
따로 노는 팽가 식솔들의 모습에 남궁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속력이 커야 하는 법인데 시작부터 이러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군.’
무심한 표정으로 망아산을 바라보는 홍단야를 슬쩍 쳐다본 남궁진이 팽가의 식솔들과 청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개방에서는 제가 이번 일의 책임자로 나왔으니 그에 걸맞은 대접을 부탁드립니다.”
“흥!”
차갑게 냉소를 터트린 팽목천이 입을 열었다.
“하북팽가가 개방에게 부탁한 것은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이호라는 놈이 이 망아산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진을 형성하는 것일세. 그러니 다른 일에는 나설 필요 없네.”
“하지만 어르신!”
“어르신이고 나발이고 자네는 그렇게만 알면 되네! 후에 문제가 된다면 내 직접 방주에게 말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네!”
단호한 팽목천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 어르신!”
“일 없네. 가자!”
한 가문의 가주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하건만 눈앞의 분노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팽목천의 모습에 남궁진이 울상을 지었다.
‘제길.’
하북의 경쟁자인 하북팽가의 가주가 죽는다면 개방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냐는 말을 한 사결 제자 한 명이 방주의 취옥장에 뼈가 부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남궁진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주의 명을 따라야 했다.
“꼴사납군.”
멈칫.
남궁진의 외침을 무시하고 막 몸을 돌리려던 팽목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팽목천이 목소리의 주인, 홍단야를 바라보며 살기를 뿌렸다.
“뭐……라고?”
“꼴사납다고 했다.”
스윽.
팽목천을 향해 냉소를 흘린 홍단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 자존심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건가? 웃기군.”
명백한 조소에 팽목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변했다. 팽목천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 또한 그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푸들푸들.
끓어오르는 분노에 팽목천의 볼 살이 거세게 떨렸다.
분노에 몸을 떨던 팽목천이 남궁진을 향해 힐긋 시선을 줬다. 감히 겁도 없이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하는 이놈이 누구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팽목천의 시선을 남궁진이 애써 외면하며 어물거렸다.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홍단야의 정체를 알려 준다면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오 년 전, 팽풍걸을 폐인으로 만든 풍객을 죽이기 위해 손수 십팔추혼도객을 이끌고 하북을 종횡했던 팽목천이 아닌가.
물론 홍단야가 허무하게 당할 정도로 약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팽목천 혼자만이 아니었다. 무려 하북팽가의 정예였다. 거기다 방주에게 비밀리에 들은 정보로는 이곳 망아산 곳곳에 혈호단이 매복해 있다고 했다. 그들마저 나타난다면 홍단야의 운명은 뻔했다.
‘제기랄.’
홍단야는 자신의 은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악의 사태만은 피해야 했다.
쓴웃음을 지은 남궁진이 입을 열었다.
“이 친구는…….”
“그가 바로 풍객입니다.”
남궁진의 말을 자른 것은 바로 팽풍걸이었다.
“……풍객?”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팽목천이 팽풍걸을 향해 되물었다. 팽목천의 물음에 팽풍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와 동시에 팽목천의 몸에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전의 그 기운이 단순한 위압감이라면 지금은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기가 섞인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치르릉.
“네놈이 그 씹어 먹을 풍객이란 말이냐!”
허리춤에 달린 거대한 도를 꺼내 든 팽목천이 홍단야를 향해 살기 섞인 일갈을 토해 냈다. 팽보강 또한 도를 꺼내 들고 팽목천의 옆에 서서 홍단야를 향해 도를 겨눴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팽가의 무인들 또한 도를 꺼내 홍단야를 겨눴다.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홍단야의 아미가 일그러지는 것도 잠시, 가볍게 앞으로 내뻗은 홍단야의 손이 핏빛 기운에 휩싸였다.
우르릉.
홍단야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뇌성벽력(雷聲霹靂)에 팽목천의 얼굴이 가볍게 떨렸다.
‘저것이 뇌라혈풍수(雷캢血風手)인가!’
조용히 중얼거린 팽목천이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우레 소리와 함께 피바람을 동반한다는 풍객의 성명절기인 뇌라혈풍수는 풍객만큼이나 그 패도적인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팽목천은 물론이고 팽가의 나머지 무인들의 얼굴 또한 긴장으로 얼룩졌다.
“…….”
사람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순식간에 금방이라도 피바람 불 듯한 전장으로 변했다. 이에 당황한 것은 청연과 남궁진, 그리고 개방의 인물들이었다.
“어,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남궁진의 만류에 팽목천이 버럭 화를 내며 홍단야를 겨눈 도를 거칠게 휘둘렀다.
“무려 오 년이나 찾아 온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이놈의 살을 갈라야 할 것이니 자네는 물러서게!”
우우웅.
짙은 황색의 기운이 팽목천의 도를 타고 올라 마침내 도신(刀身)을 완전의 휘감았다.
치리링.
팽목천의 도가 찌르르 울며 강맹한 도기를 내뿜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피를 보고 말겠다는 필살의 기운에 한차례 묵직한 신음을 흘린 남궁진이 홍단야의 앞으로 나서며 팽목천을 마주했다.
“풍객은 개방의 손님입니다. 이를 묵과하고 풍객을 해한다면…… 개방은 결코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뭐, 뭣?!”
남궁진의 말에 팽목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록 오 년 전의 일로 사이가 나빠졌다고는 하지만 남궁진은 자신이 자식처럼 돌봐 준 아이였다. 그런 남궁진이 이제는 원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를 들이대고 협박을 하니 팽목천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뿌드득.
“네, 네놈이 감히……!”
남궁진을 겨눈 팽목천의 도가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강하게 나가야 한다!’
서늘한 팽목천의 말에 남궁진이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라니요. 엄연히 이번일의 개방 책임자로 나온 사람입니다. 그에 맞는 대우를 부탁드립니다. 아니면 개방의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억!”
마침내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팽목천이 뒷목을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었다.
꽤나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팽보강의 부축을 받는 팽목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
품속에서 작은 환단을 꺼내 팽목천에게 먹인 팽보강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남궁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감히 아버지에게……!”
팽보강의 원망 어린 시선에 남궁진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미안하구나.”
남궁진을 무시한 팽보강이 한편에 모여 있는 철혈천호단을 보며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아버님을 세가로 모셔라!”
팽보강의 명에 철혈천호단에서 몇 명이 나와 팽목천을 부축했다.
본래라면 팽목천이 쓰러진 지금, 무리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사람은 팽풍걸이었어야 옳겠지만 오 년 전의 사건으로 단전이 으스러져 폐인이 되어 버린 팽풍걸이 무가(武家)인 팽가에서 그 입지를 다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무인들의 부축을 받아 저 멀리 사라지는 팽목천을 보던 팽보강이 시선을 거둬 남궁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형님……. 아니, 지부장의 말대로…… 팽가 또한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보, 보강아!”
그래도 팽목천보다는 사리분별이 정확한 것인지 남궁진을 향해 한차례 이를 간 팽보강이 도를 집어넣고 팽가의 무인들 사이에 섞여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멍하니 있던 청연이 남궁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팽보강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