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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0화)
제2장 풍객(風客)(2)
“허허.”
남궁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이로써 개방과 팽가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골이 생긴 것이다. 방주인 만리신개 목철인이 직접 찾아와 사과를 한다 해도 팽목천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군.”
상실에 빠져 있는 남궁진의 뒤로 다가온 홍단야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과였지만 홍단야에게 사과를 듣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는 남궁진이었기에 씁쓸히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네.”
홍단야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인 남궁진이 주변에 몰려든 개방의 거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망아산을 중심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진을 펼쳐라!”
“예!”
타다닥.
남궁진의 명령에 수백의 거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원래는 팽가의 무인들과 적절히 조합을 맞춰 움직여야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괜한 칼부림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우리도 움직이지.”
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남궁진의 곁으로 붙었다.
스슥.
팽가의 무인들이 망아산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남궁진도 신형을 움직였다. 팽가를 도와 망아산을 포위하라는 명령과 함께 남궁진에게 떨어진 다른 하나의 명령은 바로 북궁청을 납치한 흉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요 근래 중원에서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마인들에 의한 소란이 잦아짐에 따라 방주인 목철인이 남궁진에게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가지.”
스팟!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남궁진과 홍단야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망아산 자체가 커다란 산이니만큼 수색은 빈틈없이, 그리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팽풍걸과 팽보강, 청연을 제외한 팽가 무인들의 수만 하더라도 근 육십여 명에 가까웠다. 팽보강은 비교적 경험이 많은 십팔추혼도객을 중심으로 여섯 명씩 총 열 개의 조를 만들어 수색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팽풍걸, 그리고 청연과 함께 조를 이루었다.
거기다 망아산 곳곳에 매복해 있는 혈호단을 감안한다면 범인은 이미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다닥!
쉬시식!
홍단야와 남궁진은 거침이 없었다.
바위가 나오면 바위를 뛰어넘었고, 나무가 나오면 나무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앞서 갔던 팽가의 무인들을 몇 번 지나치자 그들은 마침내 망아산에서도 가장 깊은 계곡인 망아곡(忘兒谷)으로 들어섰다.
기이할 정도로 자욱하게 낀 안개 덕에 전에 탐색을 했을 때도 포기한 곳이었다.
본래 망아산은 약록산(藥鹿山)이라 불리던 산으로, 영험한 약초와 질 좋은 가죽과 고기를 가진 사슴들이 많은 이곳이 망아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사 년 전부터였다.
약초를 캐기 위해 산으로 갔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약록산으로 들어간 아이는 한 명도 나오지 못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기이한 것은 어른은 한 명도 사라지지 않는 것에 반해 어린아이는 들어가기만 하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약록산이라는 이름은 망아산으로 바뀌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다.
개방에서도 이 기이한 일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어정쩡하게 미뤄진 사건 중 하나였다.
“제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군.”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는 안개에 남궁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남궁진의 말 그대로 망아곡은 지독한 안개로 손을 뻗으면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법(陣法)이군.”
“뭐라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조용히 읊조린 홍단야가 돌연 안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윽.
순식간에 안개 속에 먹혀 모습을 감춘 홍단야의 모습에 남궁진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 이보게!”
다급히 홍단야를 부른 남궁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홍단야의 뒤를 따라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윽. 지독하군.’
안개 속은 그 진득함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미한 사기(邪氣)마저 느껴지는 것이 정도(正道)의 무공을 익힌 남궁진에게 한층 더 불쾌감을 배가시켜 주고 있었다. 몸을 휘감는 안개에 인상을 찌푸린 남궁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양손을 치켜들었다.
‘하는 수 없지!’
우웅. 우웅.
가슴팍으로 치켜든 남궁진의 두 손에서 은은한 기파(氣波)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핫!”
퍼버벙!
힘찬 기합과 함께 닳을 대로 닳은 남궁진의 장포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강맹한 강풍을 뿜어냈다.
스으으.
기파가 만들어 낸 강맹한 바람에 남궁진의 몸을 휘감던 안개들이 속수무책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러났던 안개들이 다시 밀려들어 남궁진의 몸을 휘감았다.
“헛!”
장풍(掌風)에도 끄떡없는 안개라니.
이런 안개는 듣도 보도 못한 남궁진이었다.
남궁진의 안색이 대번 굳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진법이라고 했지?’
홍단야가 안개 속으로 몸을 날리기 전에 읊조렸던 말을 생각해 낸 남궁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런 절진이 있으니 개방의 제자들이 찾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 또한 고전을 하는 진법이니 수색을 전문으로 하는 이결 제자들로서는 감히 반항도 못해 보고 안개의 제물이 될 터였다.
‘낭패군.’
점차 몸을 옥죄이는 안개에 남궁진이 안색을 굳혔다.
마음먹고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남궁진 또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직 흉수의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때에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마침내 남궁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어쩔 수 없군.”
바닥으로 축 처진 양손을 다시 가슴팍으로 끌어 올린 남궁진이 보폭을 벌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내 천천히 눈을 뜬 남궁진이 양손을 막 내뻗으려는 순간,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안개들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응?”
주변의 안개는 물론이고 어느새 망아곡을 가득 채운 안개마저 사라져 있었다.
평범한 계곡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망아곡의 중심에는 나무 작대기를 한 움큼 들고 있는 홍단야가 있었다.
탁.
대번에 몸을 날려 홍단야에게 다가간 남궁진이 홍단야의 손에 들린 나무 작대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게 진법을 구성하고 있던 건가?”
“그래. 사무칠절진(邪霧七節陣)이라는 진법이다.”
과연 홍단야의 손에는 총 일곱 개의 나무 작대기가 있었는데 나무 작대기의 표면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형식의 붉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콰직!
홍단야의 손에 들린 나무 작대기들이 볼품없이 바스러졌다.
“재미있군.”
조각조각으로 바스러진 나무 작대기를 팽개치며 차가운 냉소를 흘린 홍단야의 시선이 망아곡의 한쪽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정도의 무공을 익힌 남궁진이 느끼기에는 껄끄러운 기운을 내뿜는 동굴에 불과했지만 선도(仙道) 계열의 무공인 통천안(通天眼)을 익힌 홍단야의 눈에는 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원한과 사기(死氣)를 느낄 수 있었다.
“저곳으로 가자.”
휙!
홍단야가 동굴을 향해 비호(飛虎)처럼 몸을 날렸다.
“가, 같이 가세!”
타닥!
저 멀리 사라지는 홍단야의 신형에 남궁진이 숨을 집어삼키고 홍단야를 따랐다.
탁!
“혼자만 그렇게…… 크윽.”
그리 멀지 않은 동굴에 도착한 남궁진이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사기를 내뿜는 동굴에 남궁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을 품은 채 아가리를 쩍 벌린 동굴은 흡사 수십만의 사람이 죽은 전장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사기를 내뿜고 있었다.
“…….”
스윽.
조용히 동굴을 응시하던 홍단야가 말없이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이보게!”
갑작스런 홍단야의 행동에 남궁진이 막 그의 뒤를 따르려는 순간, 동굴 입구의 좌측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 풍걸!”
놀랍게도 그 무리는 팽풍걸과 팽보강, 그리고 청연이었다.
동굴의 입구를 막아선 팽보강이 허리춤에 걸린 도를 꺼내 들고는 홍단야와 남궁진을 겨눴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저희가 먼저 찾았습니다.”
“그,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남궁진의 항의에 팽보강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지부장께서 뭐라고 하시든 간에 이곳은 저희가 먼저 찾았으니 지부장님과 풍객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 보시지요.”
치리링. 치링.
팽보강의 도가 살기와 어우러져 불길한 도명을 울렸다.
“건방지군.”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홍단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난폭한 기운을 담고 있는 홍단야의 목소리에 팽보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윽.
“실력에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팽보강의 도가 홍단야를 향했다.
명백한 적의(敵意)였다.
홍단야의 얼굴 위로 표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싸늘한 웃음꽃이 피었다.
“재미있군.”
파앙!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선 홍단야가 손을 털듯이 흔들자 뇌라혈풍수 특유의 핏빛 기운이 홍단야의 손을 감쌌다. 그러자 그리 넓지 않은 홍단야의 소매가 마구 펄럭였다.
“…….”
불길한 적막이 망아곡에 내려앉았다.
망아곡에서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남궁진과 청연, 그리고 팽풍걸이 전부였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청연과는 달리 팽풍걸의 입가에는 한 줄기 조소가 걸려 있었다.
“그 잘난 풍객과 꼭 한번 붙어 보고 싶었다!”
쿠궁!
쩍!
호기로운 외침을 토한 팽보강이 한 발자국 내딛자 우레 소리와 함께 내딛은 땅이 쩍 갈라졌다.
스윽.
이에 홍단야 또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작은 웃음이 걸린 얼굴로 팽보강을, 아니 정확히 말해 팽보강의 뒤에서 조소를 흘리는 팽풍걸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
“……뭐?”
“마지막 경고다. 당장 나와라.”
알 수 없는 홍단야의 말에 팽보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디서 개수작이냐!”
꽈앙!
한바탕 노호성을 터트린 팽보강이 도를 이용해 바닥을 후려쳤다.
잘게 부서진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투둑. 툭.
발치에 떨어진 돌멩이를 무심히 보던 팽풍걸이 입가에 걸린 조소를 지우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스윽.
“혀, 형님?”
갑작스런 팽풍걸의 등장에 팽보강은 물론이고 청연 또한 당황한 얼굴로 팽풍걸을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는 내공도 없이 겨우 도나 휘두르는 팽풍걸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이내 팽풍걸을 제지하려던 팽보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혀, 형님!”
“팽 오라버니!”
청연 또한 팽풍걸의 이름을 부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비키거라.”
우르릉!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는 팽풍걸의 몸에서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멍한 눈으로 팽풍걸을 바라보던 팽보강이 화들짝 놀라며 팽풍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풍걸 형님! 대체 언제 무공을 되찾으신 겁니까?!”
척추와 함께 단전이 으스러져 운기행공도 하지 못하는 팽풍걸의 몸에서 우레 소리가 나왔다면 이유는 단 하나, 가문의 직계 혈육에게만 전해지는 심법인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저 정도 소리라면 결단코 자신에게 뒤지는 성취가 아니었다.
‘형님이 무공을 되찾으셨다니!’
팽보강의 눈이 감격으로 젖었다.
팽풍걸이 고개를 돌려 팽보강을 향해 한가득 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동생을 향한 형의 웃음이었다.
“이 형이 과거의 은원을 해결하려고 하니 넌 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북궁 소저를 찾아보거라.”
“아,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협공을 하고 싶지만 자존심이 강한 팽풍걸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아는 팽보강이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를 회수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어서 갑시다.”
“하지만…….”
팽풍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팽보강과는 달리 청연의 얼굴에는 한 줄기 의혹이 서려 있었다. 분명 팽풍걸은 오 년 전에 단전이 으스러져 내공을 잃었다. 그 당시 팽풍걸의 상태는 의수조차 손을 내저을 정도였다.
그 당시 청연이 만난 팽풍걸의 무공 수준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설사 오 년 동안 무공을 잃지 않고 수련을 한다 해도 이 정도 수준까지 오를 수는 없었다. 이 정도라면 팽보강이 아니라 가주인 팽목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머뭇거리는 청연이 답답했는지 팽보강이 잇소리를 내며 청연을 잡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