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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1화)
제2장 풍객(風客)(3)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팽보강과 청연을 주시하던 팽풍걸이 고개를 돌려 홍단야와 남궁진을 바라봤다.
“오랜만…….”
“닥쳐라.”
막 입을 여는 팽풍걸의 말을 끊은 홍단야가 남궁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라.”
“……?”
무슨 소리냐는 듯, 남궁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간을 찌푸린 홍단야가 동굴을 향해 턱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따라가라.”
“아! 아, 알겠네.”
조용히 있던 팽풍걸이 허리춤에 매달린 도를 꺼내 동굴을 향해 몸을 날리려는 남궁진을 가로막았다.
“내가 보이지 않는 건가?”
콰가가!
팽풍걸의 도를 중심으로 한차례 광풍이 몰아쳤다.
범접할 수 없는 강한 바람에 남궁진이 인상을 구기며 홍단야를 바라봤다.
“가라.”
무심한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앞에는 도를 든 팽풍걸이 떡 하니 버티고 있고, 뒤에는 연신 가라고만 하는 홍단야가 있다. 애꿎은 남궁진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스윽.
“가라.”
홍단야가 전과 같은 말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우르릉!
콰르릉!
뇌라혈풍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레 소리와 팽풍걸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풍에 동굴 주변의 잡초들이 거칠게 너울거렸다.
이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남궁진이 슬며시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몸놀림도 몸놀림이었지만 팽풍걸이 일부러 보내 준 듯했다.
휘오오.
이내 한차례 거친 바람이 홍단야와 팽풍걸을 할퀴고 지나갔다.
굳게 닫혔던 홍단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탐화견 이호, 본인 맞나?”
“……!”
팽풍걸의 눈이 한차례 크게 일렁였다.
“탐화견 이호, 본인 맞나?”
다시 이어진 홍단야의 물음에 침묵하는 것도 잠시, 곧 팽풍걸의 입술을 비집고 엷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단하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탐화견 이호, 본인 맞냐고 물었다.”
“크크크. 그래, 내가 바로 탐화견 이호다.”
우드득. 우득.
동시에 팽풍걸의 얼굴이 마구 뒤틀리며 한 명의 얼굴을 만들었다.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의 얼굴이었는데 자글자글한 주름에 반해 지나치게 새하얀 얼굴이 소름 끼쳤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의 윤곽이 얇은 것이 뱀을 연상케 했다.
그가 바로 지하 뇌옥에서 도망친 아홉 명의 죄수 중 한 명인 탐화견(貪花犬) 이호였다.
“대단하군. 여태껏 혈선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내 만원일변기공(萬元一變技功)을 눈치 채지 못했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호기심 가득한 이호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호가 익힌 만원일변기공은 과거 고구려 때, 대도(大盜)로 활약하던 백면신투(百面神偸) 장세필의 기공으로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대상에 관계없이 얼굴과 체형을 동일하게 바꿀 수 있는 기기묘묘한 기공이다. 이것을 대성(大成)하면 생김새는 물론이고 상대의 기운까지 동일하게 뿜어낼 수 있다고 전해졌다.
어릴 적, 우연한 기연으로 만원일변기공을 익힌 이호는 만원일변기공을 대성했고 전해지는 말대로 상대의 기운까지 동일하게 뿜어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두려움이 없었다.”
조용히 팽풍걸, 아니 중년인의 얼굴에 팽풍걸의 몸을 가진 이호를 주시하던 홍단야가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두려움이 없었다.”
“……큭. 크하하하!”
한차례 거친 광소를 터트린 이호가 큭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오 년 전 네놈에게 호된 꼴을 당한 놈이라면 두려움이 있을 법도 하지. 크큭.”
“팽풍걸과 북궁청은 어디 있나.”
홍단야의 물음에 이호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글쎄. 오늘 네놈이 망아산에 모인 팽가의 무인들을 모두 처리한다면 그 멍청한 놈과 계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퍼펑!
도를 들지 않은 손으로 품속에서 꺼낸 죽통(竹桶)을 때리자 죽통의 한쪽 입구에서 붉은색의 불꽃이 튀어나와 망아산의 하늘을 수놓았다. 특수한 목적으로 만든 죽통인 듯,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불꽃이 선명하게 보였다.
“적어도 일다경 안에 팽가의 무인들이 모일 것이다, 크크큭.”
어느새 팽풍걸의 얼굴로 돌아간 이호가 진득한 웃음을 터트렸다.
승리자의 웃음이었다.
“일다경이라…….”
점차 사그라지는 붉은색의 불꽃을 보며 한차례 작게 중얼거린 홍단야가 입매를 비틀었다.
“충분하군.”
홍단야의 입가에 이호의 그것과 같은 웃음이 걸렸다.

“헉, 헉.”
팽보강의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사방이 트인 평평한 땅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동굴의 형태는 매우 복잡했다. 더군다나 동굴 곳곳에 뾰족하게 솟아난 바위와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경공을 시전하는 데 내력 소모가 몇 배로 더 들었다.
“후우, 후우.”
청연 또한 팽보강과 별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화봉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체력이 약한 여자였기에 팽보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팽 공자, 좀 쉬고 움직이죠.”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청연의 말을 무시한 팽보강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배려를 해 주고자 함인지 경공을 멈추고 동굴의 깊숙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체…….”
콰가가강!
팽보강의 목소리가 동굴의 입구에서 터진 커다란 소리에 묻혔다.
우르르릉.
푸스스.
동굴이 비명을 지르며 돌가루를 흩날렸다.
화들짝 놀란 청연이 고개를 돌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동굴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런 청연의 어깨에 무언가가 턱 하니 얹혔다.
한가득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
바로 팽보강의 손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동굴의 입구를 보던 팽보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서 갑시다. 형님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부르르.
어깨 위의 손이 거세게 떨렸다.
그런 팽보강을 보는 청연의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팽 공자…….’
어려서부터 팽가와 인연이 있던 그녀는 그 누구보다 팽보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팽풍걸의 그늘에서 자란 팽보강이었다.
항상 팽풍걸의 뒤를 쫓았고 사람들이 아무리 팽풍걸을 욕해도 끝까지 팽풍걸을 따라 준 착하디착한 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팽풍걸이 폐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폐관수련까지 깨고 나올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팽 공자…….”
팽보강의 입에서 서늘한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뿌드득.
“가야 합니다.”
붉게 충혈된 팽보강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꽈악.
“예, 예.”
잡혀 있는 어깨에 통증을 느꼈는지 청연이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팽보강이 화들짝 놀라며 어깨에 얹은 손을 치웠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팽 공자. 어서 가죠.”
“예!”
힘겹게 말을 이은 팽보강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내 한참 동안 동굴 속으로 걸음을 옮기던 팽보강이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멈췄다.
“이건?”
팽보강의 물음에 청연이 답했다.
“시체 썩는 냄새군요.”
동물 썩는 냄새와 사람 썩는 냄새는 그 차이가 확연했다.
세상에서 가장 역한 냄새를 꼽으라면 단연 사람이 썩는 냄새다.
역한 시취(屍臭)에 청연이 손을 들어 코를 가리고는 시취의 근원지를 찾았다.
이 정도 시취라면 적어도 열 구 이상의 시체가 있다는 소리였다.
안력을 돋워 어둠 속 동굴을 훑던 청연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멈췄다.
거의 동굴 끝자락으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커다란 종유석을 중심으로 무언가 자그마한 물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안력을 돋운 채 걸음을 옮긴 청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대체 왜…… 으헉!”
나름대로 간이 크다고 자부하던 팽보강이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거대한 종유석을 중심으로 수북이 쌓인 것의 정체는 바로 시취의 근원으로 보이는 시체였다. 태반이 모두 썩어 해골로 변해 있었는데 아직 채 썩지 않고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시체들도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시체들을 보던 청연이 믿겨지지 않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아이들이군요.”
“뭐?!”
청연의 말에 팽보강이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거의 대부분 시체들의 골격 자체가 작고 뼈가 얇았다.
청연의 말대로 시체들은 모두 아이들의 시체였다. 애써 부인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썩지 않고 있는 시체들은 분명 어린아이들이었다.
부들부들.
검파를 쥔 청연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칼에 목숨을 거는 무인이라고는 하지만 그전에 그녀는 여자다. 그녀로서는 이런 어린아이들을 죽인 범인에 대한 분노가 더욱더 클 수밖에 없었다.
스윽.
‘대체 누가!’
적어도 백 구는 넘을 듯한 시체의 수에 청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썩은 물들이 바닥에 질펀하게 흘렀다. 저 상태로 몇십 년만 있어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중독시키는 지독한 시독(屍毒)이 되리라.
이내 시체 한 구, 한 구를 유심히 살펴보던 청연의 눈이 부릅떠졌다.
죽은 시체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시체들은 모두 미세하게 뼈가 으스러진 흔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상처는 분명 내공이 없는 사람의 소행이었다. 만약 내공이 있는 자의 소행이라면 미약하게나마 그 흔적이 남을 것이다. 범인이 익히고 있는 내공 특유의 흔적이 남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내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의해 뼈의 단면이 녹아 눌어붙을 수도 있었다. 그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내공이 없는 사람의 소행이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객들의 소행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이 없으니 후자의 확률은 희박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해골을 보던 청연이 몸을 날려 반쯤 썩어 버린 시체에 다가갔다.
시체에 다가선 청연이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시체의 상처를 살짝 벌렸다. 동시에 청연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베인 살가죽이 거칠다.
표면은 날카롭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칠다. 마치 무공을 모르는 범부가 날카로운 보도(寶刀)를 이용해 오로지 힘만을 가해 만든 듯한 상처다.
‘그렇다면 범인은……!
“북궁 소저!”
번쩍!
팽보강의 외침에 생각에 잠겼던 청연의 고개가 번쩍 솟구쳤다.
시체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종유석의 뒤쪽에 창백한 얼굴의 북궁청이 쓰러져 있었다.
붉은색의 혼례복을 걸친 북궁청의 모습에 팽보강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단검을 집어넣고 막 몸을 날리려던 청연의 움직임이 멈췄다.
바로 동굴의 입구 쪽 시체 더미 뒤에서 비척거리며 나오는 인영 때문이었다.
“패, 팽 오라버니!”
“형님!”
“으으. 쿨럭!”
도를 지팡이 삼아 비척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팽풍걸이 입에서 한 움큼 죽은피를 게워 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팽풍걸의 모습에 북궁청을 향해 몸을 날렸던 팽보강이 팽풍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형님, 대체 어떻게……!”
“안 돼!”
푸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팽풍걸의 품에 안기듯 쓰러진 팽보강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몸을 떨었다.
“혀,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