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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2화)
제2장 풍객(風客)(4)


“…….”
경악과 불신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팽보강의 시선을 덤덤히 받은 팽풍걸이 팽보강의 배에 박힌 도를 비틀었다.
콰지직.
“으아아악!”
뒤늦게 팽보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청연의 목소리가 거세게 떨렸다.
“크크큭.”
쑤욱.
한차례 비린 광소를 흘린 팽풍걸이 팽보강의 배에 박힌 도를 거칠게 빼내자 팽보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퍽.
쿠당탕!
“크악!”
입과 배에서 피를 게워 내며 비틀거리는 팽보강을 발로 찬 팽풍걸이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팽 공자!”
멍하니 있던 청연이 뒤늦게 다가와 다급히 팽보강의 상처를 천으로 감쌌다. 다행히 단전에 이상이 간 것은 아니었지만 장기들이 상당히 심각하게 손상된 듯,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에 누런 장기 조각들이 틈틈이 섞여 있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팽보강의 상처를 지혈한 청연이 팽풍걸을 향해 표독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역시 팽 오라버니가 범인이었군요!”
“크크큭. 글쎄다.”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능청스럽게 웃는 팽풍걸의 모습에 청연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망칠 궁리라도 하는 것인지 고개를 숙인 청연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크하하핫!”
우르르릉.
청연의 모습에 팽풍걸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중후한 내공을 담은 팽풍걸의 웃음에 동굴이 비명을 지르며 돌가루를 뿌렸다. 상처를 입은 팽보강이 팽풍걸의 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피를 게워 냈다.
“그, 그만 해요!”
청연의 외침에 거짓말처럼 팽풍걸의 웃음이 멈췄다.
소름 끼치는 적막에 청연이 지워지지 않는 불신의 눈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왜?”
“크크크. 왜? 무엇을 말이냐! 이것? 아니면 저것? 그것도 아니면 이것?!”
과장된 동작으로 북궁청과 아이들의 시체 더미, 그리고 팽보강을 차례차례 가리킨 팽풍걸이 말했다.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내 특별히 대답해 주마, 크크큭.”
“모든 것…… 모든 것을 말해 주세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한 청연의 모습이 의아할 법도 하건만 이미 광기에 잠식당한 팽풍걸이 그것을 눈치 챌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라…….”
읊조리는 팽풍걸의 눈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팽풍걸의 눈이 흐릿해졌다.
“그래.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오 년 전, 빌어먹을 풍객과의 만남이었다. 그 당시 알량한 힘을 믿고 날뛰던 난 풍객에게 비무를 신청했지. 크큭. 결과는 연이 너도 알고 있겠지? 척추와 함께 단전이 으스러진 난 의수 늙은이의 치료로 간신히 척추를 고쳐 병신이 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으스러진 단전은 무리였지. 운기조식을 해 봤자 으스러진 단전으로는 내공을 담을 수 없었다. 크큭. 그때부터였다!”
잠시 숨을 고른 팽풍걸의 눈이 다시 광기로 번들거렸다.
“차기 가주감이라며 날 떠받들던 것들이 하나 둘씩 등을 돌리더니 마침내 내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더구나. 크하하하. 연아, 네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공으로 시작해 명예와 미래까지 모든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풍객이라는 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 공자는 항상 오라버니를 믿었어요!”
“알고 있다.”
너무나 쉬운 팽풍걸의 대답에 청연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절규에 가까운 청연의 외침에 팽풍걸이 한차례 낮은 광소를 흘렸다.
“크흐흐.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다. 모든 사람들이 날 버려도 내 동생만은 날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구나, 크흐흐. 난 보고 말았다. 팽노악, 그 노물과 함께 가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계략을 짜는 저놈의 모습을!”
바닥에 쓰러진 팽보강을 향해 겨눈 팽풍걸의 도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래도 난 용서하려고 했다! 난 팽가를 사랑했으니까! 무가이기에 강한 자가 가주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놈은 가주 자리로도 모자라 내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했다. 북궁청, 그녀를…… 나에게서 뺏으려고 했단 말이다!”
팽풍걸의 몸에서 숨 막히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본래 북궁청은 팽풍걸과 장래가 약속된 사이였다. 물론 두 사람의 마음은 상관없이 팽목천과 북궁낙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지만 팽풍걸은 진심으로 북궁청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팽풍걸이 폐인이 되고 나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북궁낙으로서도 무공이 사라진 팽풍걸에게 자신의 손녀를 보내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고, 팽목천 또한 동감했다.
“그녀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개망나니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따듯한 눈으로 날 봐 준 그녀였다! 내가 다치면 따뜻한 손길로 날 치료해 준 그녀였다! 내가 꾸중을 들으면 따듯한 말로 위로해 준 그녀였다!”
치리링. 치링.
팽풍걸의 도가 광기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나만의 것이다! 그녀의 눈도, 그녀의 손가락도, 그녀의 혀도! 그녀의 모든 것은 바로 나, 팽풍걸의 것이다!”
어느 날, 팽목천의 거처를 지나가던 팽풍걸은 듣고야 말았다.
자신의 동생인 팽보강과 북궁청을 맺어 주자는 팽목천과 북궁낙의 대화를.
팽풍걸은 세가를 나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렇게 달려 망아산에 도착한 팽풍걸은 허리춤에 달린 도를 꺼내 들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초식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의 묘리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도였다.
그때 때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던 한 아이가 팽풍걸의 눈에 들어왔다.
우습게도 팽풍걸의 두 눈에는 그 아이가 자신을 배신한 자신의 동생, 팽보강의 얼굴로 보였다.
“크크큭. 난 그 아이를 죽였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 어린 심마니를 말이다! 그 뒤로 난 산책을 핑계로 항상 이 산으로 와 어린 심마니들을 납치해 이 동굴에서 죽였다. 먼저 팔을 자르고, 그 다음으로는 다리를 자르고, 마지막으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아이에게 보여 준단다. 연아, 너는 아느냐? 비통한 얼굴로 죽어 가는 아이의 얼굴을 알고 있느냐?!”
광기 서린 팽풍걸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죽이는 그 쾌감을 아느냐? 크크큭.”
붉은 혀를 내밀어 피가 흥건한 도를 핥는 팽풍걸의 모습에 청연의 몸이 떨렸다.
‘미, 미쳤어!’
지금 팽풍걸은 자신이 알던 과거의 그 팽풍걸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팽풍걸이 아니라 단순히 살인에 미친 살인광(殺人狂)일 뿐이다.
“오라버니는…… 미쳤어요.”
청연의 말에 팽풍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크큭. 알고 있다. 난 미쳤다. 미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지. 하지만 이 광기야말로 내 힘의 원천이다! 그놈도 나에 말했다. 이 광기야말로 나를 지탱하는 뿌리라고! 나는 다시 부활했다! 나를 지탱하는 이 광기와 그놈이 건네준 적류무상신공(赤流無上神功)과 함께 말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강과 풍객을 죽이고 내 부활을 하북에 알려 팽가를 천하제일가로 우뚝 일으켜 세울 것이다!”
콰르르릉.
치리링. 치링.
팽풍걸의 몸에서 우레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어 동굴을 가득 메웠다.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던 적색 기운은 어느새 검붉은 기운으로 변해 음습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일류 무인이라 해도 위축될 법한 기운에 청연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꿀꺽.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어요.”
말하라는 듯 도를 치켜든 팽풍걸이 비릿한 미소가 감돈 얼굴을 끄덕였다.
“청이를 납치한 사람이 오라버닌가요?”
청연의 물음에 자신만만한 태도였던 팽풍걸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전의 그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난 최근까지 신공을 수련하느라 움직일 시간도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죠? 오라버니가 말한 그놈이라는 사람인가요?”
청연의 물음에 팽풍걸이 도를 잡은 손에 내공을 주입하며 청연과 팽보강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건 내가 팽가의 가주가 되면 알려 주마. 물론 넌 이 자리에서 저 아이들과 함께 백골이 되어 있겠지만. 크큭.”
팽풍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청연의 몸을 휘감았다.
스윽.
돌연 가만히 앉아 있던 청연이 몸을 일으켰다.
꿈틀.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송충이 같은 팽풍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뇨. 아쉽게도 전 오라버니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요.”
“크흐흐.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특별히 고통 없이…….”
“하지만 제가 아니어도 오라버니를 상대할 사람은 있어요.”
“뭐?”
알 수 없는 청연의 말에 팽풍걸의 얼굴이 멍하게 풀리는 것도 잠시, 곧이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에 팽풍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궁……진!”
“이 무슨 꼴인가, 풍걸.”
소리 없이 나타나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는 남궁진을 노려본 팽풍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네가 모든 진실을 말하기 직전부터네. 내가 연이에게 전음으로 자네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도록 지시했지.”
“……크크큭. 그랬군.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꽝!
투두둑.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린 팽풍걸이 손에 들린 도를 휘둘러 동굴의 벽면을 때렸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서진 파편이 팽풍걸의 얼굴을 때렸다.
“마음 같아서는 옛정을 생각해 살려 두고 싶다만 진실을 안 이상 죽어 줘야겠네, 친구.”
히죽 웃으며 장난스럽게 지껄이는 팽풍걸을 향해 한숨을 내쉰 남궁진이 보폭을 넓히며 청연에게 말했다.
“일단 금창약으로 조치는 해 두었다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위험하니 어서 보강이를 데리고 나가거라.”
“어딜 나간단 말이냐!”
파밧.
팽풍걸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도를 휘둘렀다. 부채꼴 모양의 적색 도기가 팽풍걸의 도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앗!”
파파팡.
갑작스런 팽풍걸의 공격에 남궁진이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 손을 허공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자 강맹한 장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갔다.
꽈가강!
도기와 장기의 격돌에 주변의 바람이 먼지를 머금고 미쳐 날뛰었다.
“그것이 적류무상신공인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궁진이 팽풍걸의 몸을 중심으로 실같이 피어오르는 적색 기운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팽풍걸은 확실히 오 년 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자신과 동수,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크큭, 그래. 겨우 백 일 수련을 했는데 이 정도 위력을 낸다네. 이 무공이야말로 진정한 신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크하하하!”
한바탕 앙천광소와 함께 팽풍걸의 도에서 붉은색 도기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