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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3화)
제2장 풍객(風客)(5)
“크윽!”
몸을 날려 청연과 팽보강의 앞을 막아선 남궁진이 쇄도하는 도기를 향해 섬전처럼 손을 휘둘렀다.
쿠오오오.
고막을 찢을 듯한 용소와 함께 남궁진의 손바닥에서 한바탕 장기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개방의 성명절기이자 패도적인 위력으로는 손에 꼽힌다는 강룡십팔장이었다.
쿠르르릉.
꽈가강!
붉은색의 도기와 푸른색의 장기가 뒤섞여 거센 기파를 사방으로 뿌렸다.
평소의 팽보강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중상을 입은 지금이라면 치명적인 기파였다. 이내 팽보강을 안아 든 청연이 나머지 한 손으로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해일처럼 덮쳐드는 기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피핏.
꽈가강!
낭창낭창 부드럽게 휘어진 청연의 검이 기파의 중심으로 들어가 기파를 흔들자 팽보강을 덮치려던 기파들이 사방으로 갈라져 애꿎은 동굴의 벽을 때렸다.
패도적인 위력에 중점을 둔 개방의 강룡십팔장과는 달리 부드러움에 그 중점을 둔 화산파의 검법인 옥녀검법(玉女劍法)이었다.
“치잇!”
예상 밖의 청연의 저력에 팽풍걸이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그에 맞춰 팽풍걸과 난전을 벌이던 남궁진 또한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숨을 몰아쉬는 팽풍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다 죽여주마!”
쿠르르릉.
팽풍걸의 도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어마어마한 기운에 남궁진의 안색이 굳었다.
‘저 정도였단 말인가……!’
적류무상신공을 수련한 지 겨우 백 일이 되었다는 팽풍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적류무상신공은 정말 고금제일의 신공(神功)이었다.
‘아니면 고금제일의 마공(魔功)이거나 말이야!’
힘을 얻는 데는 그만큼의 수련과 책임이 따른다. 그런 것도 없이 저 정도 힘을 얻는다면 이 세상에 고수가 아닌 이가 없을 것이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수련을 해야 한다. 그렇게 탄생된 고수들은 생명을 쉽게 해하지 않는다. 물론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하는 마인(魔人)들도 있지만 그들은 극소수였고, 그들 대부분이 마공의 영향으로 마기와 사기가 골수 깊숙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우웅.
청연의 검에서 투명한 검기가 맺혔다. 남궁진 또한 내공을 쥐어짜 강룡십팔장을 준비했다. 섣부르게 공격했다가 저 어마어마한 기가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 동굴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방어로써 기를 와해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 죽여주마!”
스산한 빛을 뿌리는 팽풍걸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받아랏! 천종도벽(天踪刀壁)!”
“회천진룡(回天進龍)!”
퍼퍼펑!
팽풍걸의 도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말 그대로 도의 벽을 만들었다. 동시에 남궁진의 손에서 뻗어 나간 일장(一掌)이 한 마리 용이 되어 도의 벽을 향해 돌진했다.
쿠워어어.
“큭!”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는 거대한 용소에 정신을 잃었던 팽보강이 한 움큼 피를 토하며 눈을 부릅떴다.
“팽 공자! 정신이 드나요?”
“처, 청연 소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팽보강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두 고수의 절기가 굉음과 함께 부딪혔다.
콰―카가가강!
파밧.
폭음과 동시에 피어나는 먼지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서로 부딪혔다.
남궁진과 팽풍걸이었다.
“죽어라!”
부우웅.
날카롭게 소리친 팽풍걸이 도를 횡으로 휘두르며 나머지 손의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남궁진의 얼굴을 내리그었다. 하북팽가의 조법(爪法)인 쇄천호조(碎天虎爪)였다. 하늘도 부숴 버린다는 이름답게 그 수법이 악랄하고 패도적이어서 하북팽가의 사람들에게서조차 잊혀 가는 조법이었다.
부우욱.
“흡!”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찢어발기며 쇄도하는 도와 호조에 남궁진이 정신없이 손을 휘두르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어딜!”
비록 구룡에는 들지 못했지만 풍천도라는 이름으로 구룡과 당당히 어깨를 마주한 팽풍걸이었다. 그런 그가 단순히 거저 힘을 얻은 멍청이들과 같을 리가 없었다. 횡으로 그어지던 도가 돌연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슈칵!
팽풍걸의 도가 남궁진의 앞섶을 자르고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가자 남궁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런 남궁진의 관자놀이를 향해 팽풍걸의 호조가 들이닥쳤다.
“어헛!”
파밧.
숨을 들이켠 남궁진이 황급히 허리를 꺾었다. 동시에 팽풍걸의 호조가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절묘한 철판교의 수법이었다.
“건방진!”
한차례 이를 간 팽풍걸이 남궁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다른 손에 들린 도로 바닥을 그었다.
부―우웅.
위에는 날카로운 호조!
바닥에는 폭풍과도 같은 패도!
“아아!”
지켜보는 청연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타핫!”
동시에 남궁진의 몸이 그 자리에서 튕기듯 팽풍걸의 뒤편으로 튀어 올랐다.
핑그르르.
착.
허공에서 팽이처럼 돈 남궁진이 바닥을 구르며 몸을 일으켰다.
무인(武人)이라면 가장 치욕스러워한다는 나려타곤이었지만 남궁진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치욕스러움도 찾을 수 없었다.
뿌드득.
비장의 공격이 무용으로 돌아가자 팽풍걸이 이를 갈았다.
“큭. 용이 거지가 되더니 졸지에 당나귀가 되었군.”
“거지가 바닥을 구르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는 게 이상한 것이겠지. 그리고 겨우 그 따위 격장지계로 날 떠보려 하다니, 자네도 많이 멍청해졌군.”
“뭐, 뭣!”
뻔뻔한 남궁진의 말에 팽풍걸이 얼굴을 붉혔다.
부르르.
“네놈이 진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구나……!”
“자네가 내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입힐 듯싶은가.”
자산민만한 말과 함께 가슴팍으로 손을 끌어당기는 남궁진의 모습에 팽풍걸이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언제 네놈의 피라고 했던가?”
“뭐?!”
남궁진의 외침을 무시한 팽풍걸이 도를 들어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팽보강과 그런 팽보강을 간호하는 청연을 겨눴다. 팽풍걸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나 두고 보겠다.”
“이, 이 미친 자식! 보강이는 네놈의 형제인 아이란 말이다!”
절규에 가까운 남궁진의 고함에 팽풍걸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걸렸다.
“형제‘였던’이라는 말이 맞겠지. 이제는 아니니까 말이야. 크하하하!”
“혀, 형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팽보강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팽풍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몸에 전해진 충격으로 몸이 기능을 상실한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팽보강은 팽풍걸이 한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형님!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필요 없다, 더러운 핏줄아! 다 죽어라!”
“안 돼!”
팽풍걸의 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무지막지한 기운에 남궁진이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청연과 팽보강의 앞을 막아섰다.
“경혼진천뢰(驚魂唇天雷)!”
우르릉.
가장 먼저 뇌성벽력이 귓가를 때렸다. 붉은 도기는 그 다음이었다.
꽈―가강!
붉은 도기들이 남궁진 일행을 중심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며 동굴의 벽을 때렸다.
우르르릉.
푸스스.
한 치가 넘게 파고드는 도기에 동굴이 낮은 비명을 토하며 몸을 떨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가루가 남궁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비틀.
“울컥!”
손을 마구 저으며 몰려드는 도기를 일일이 쳐 낸 남궁진이 돌연 검은 피를 게워 냈다. 방금 전의 방어를 하며 내상을 입은 듯 남궁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진 오라버니!”
남궁진의 뒤에서 팽보강을 보호하던 청연이 비틀거리는 남궁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크윽. 물러서거라.”
입가에 흐르는 죽은피를 스윽 닦은 남궁진이 손을 들어 청연을 제지했다.
“역시 제일검룡(第一劍龍)이라 불렸던 놈답구나, 큭. 하지만 검을 버린 검룡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난 검을 버린 것이 아니다.”
조소를 흘리며 말끝을 흐리는 팽풍걸을 향해 남궁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놈은 분명 검을 버렸다고…….”
“난 검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손에 든 검을 버리고 마음에 검을 들었을 뿐이다.”
고―오오오.
동시에 남궁진의 몸을 중심으로 청량한 바람이 한차례 휘몰아쳤다. 동굴을 가득 메운 사기조차 한순간에 날려 버릴 듯한 청량한 바람에 팽풍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친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입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팽풍걸의 손은 압박해 오는 압력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란 말이냐!’
놈은 분명 검을 버렸다. 그 증거로 놈의 손으로는 평생 검을 잡을 수조차 없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불안감은 대체 뭐냔 말이냐!’
엄습하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 낸 팽풍걸이 조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큭, 검도 들지 못하는 병신이 무슨…….”
“꼭 검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무슨 소리냐!”
말을 멈춘 남궁진이 가슴팍까지 끌어 올렸던 두 손에 가해진 힘을 풀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내 굳게 닫혔던 남궁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가 직접 검이 되면 되는 것이다.”
지이잉.
동시에 남궁진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전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기운에 팽풍걸이 당황하며 비명을 질렀다.
확실히 지금 남궁진이 내뿜는 기운은 한 자루 검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날카로웠다. 단순히 날카로운 기세를 지닌 무공을 익힌다고 해서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궁진은 그의 말대로 한 자루 검이 된 것이다.
팽풍걸의 입술을 비집고 멍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신검합일 따위가 아니었다.
신겁합일은 검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지만 지금 남궁진은 그 자체가 한 자루 검이었다. 검이 곧 남궁진이며 남궁진이 곧 검이 되는 경지가 아니라 남궁진 자체가 검이 되는 경지인 것이다.
‘이, 이 기운은…….’
지금 남궁진이 내뿜는 기운은 오 년 전, 풍객이 내뿜던 기운과 흡사했다.
“으어, 어…….”
엄습하는 위압감에 팽풍걸이 떨리는 손으로 애써 도를 세웠다.
“진 오라버니!”
“진 형님!”
팽보강과 청연마저도 남궁진의 위압감에 놀라 입을 벌렸다.
팽풍걸이 아무리 오 년 전에 비해 강해졌다지만 지금의 남궁진만큼은 아니었다. 지금 남궁진은 그만큼 강했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남궁진이 두 손을 축 늘어트린 채 팽풍걸을 향해 말했다.
“와라.”
어떠한 결의마저 느껴지는 남궁진의 말에 팽풍걸이 입술을 깨물었다.
“큭, 큭큭. 오늘 네놈을 죽이고 팽가의 위대함을 중원 무림에 알리겠다!”
“…….”
살기 어린 팽풍걸의 말에 남궁진이 침묵으로 답하며 자세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스윽.
남궁진의 몸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동굴의 입구 쪽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멈춰라.”
뚝.
메아리치는 싸늘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누, 누구?”
멍하니 혼을 빼놓고 있던 청연이 동굴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넋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 대답 대신 공 같은 물체가 대굴대굴 굴러 청연을 지나 팽풍걸과 남궁진의 사이에서 멈췄다.
“……머, 머리?”
청연이 멍한 목소리로 물체의 정체를 확인했다.
물체는 바로 머리였다.
산발한 머리와 함께 전체적으로 이목구비의 선이 얇은 중년의 머리였는데 대체 무엇을 보고 죽었는지 감지 못한 눈에는 경악과 함께 붉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한때는 몸과 머리의 연결점을 해 주던 목엔 마치 거인이 억지로 쥐어뜯은 듯한 거친 상처가 있었다. 더군다나 잘린 목 부분에서 삐죽 튀어나온 뼈는 머리의 참담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으!”
머리를 주시하는 팽풍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호!’
머리의 주인은 홍단야를 막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이호였다.
‘실패했던가!’
이호의 머리가 잘린 채 여기 있다면 그것은 곧 실패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끓어오르는 분노와 당혹감에 막 입을 열려던 팽풍걸이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말을 삼키며 숨을 들이켰다.
저벅저벅.
일부러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듯, 어둠 속에서 나직한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스윽.
“푸, 풍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