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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4화)
제2장 풍객(風客)(6)


피를 게워 내며 몸을 추스르던 팽보강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인영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자네…….”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던 남궁진 또한 홍단야의 등장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홍단야를 바라봤다. 그런 남궁진의 반응과는 달리 홍단야의 얼굴에는 냉막함이 가득했다.
“남궁진, 네가 깨달은 경지를 겨우 이따위 쓰레기를 정리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거냐.”
“……!”
싸늘한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남궁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날카로운 기운이 점차 사그라졌다.
동시에 팽풍걸의 몸에서 성난 파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풍객, 이노옴!”
파앙!
한차례 노호성과 함께 팽풍걸의 몸이 남궁진을 뛰어넘어 홍단야를 향해 쇄도했다.
치리링.
팽풍걸의 도가 거칠게 울며 도기를 내뿜었다. 팽풍걸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도기에 홍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심하세요!”
청연의 외침이 울리는 순간, 팽풍걸의 도가 홍단야의 정수리를 쪼갤 듯 쏘아졌다.
허리 밑으로 축 처져 있던 홍단야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파바방!
퍼엉!
“크윽!”
한차례 폭음과 함께 허공을 날아 바닥에 착지한 팽풍걸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자식!”
콰우우우.
팽풍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에 홍단야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굳게 닫혔던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광혼야수혈(狂魂野獸血)인가…….”
“광……혼야수혈?”
조용히 누워 있던 팽보강이 독백하듯 홍단야의 말을 따라했다.
“광혼야수혈이라니?”
이제는 전과 같은 기세로 돌아온 남궁진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홍단야가 답했다.
“광혼야수혈. 간단히 말해 사술(邪術)이다. 그저 사술의 주문을 외우며 운기를 하는 것만으로 무공을 모르는 사람도 단숨에 고수로 만들어 주는 고급 사술이지. 이 사술을 시전한 사람은 성격이 광폭해지고 끝에는 온몸의 피를 토하며 죽는다.”
남궁진은 물론 팽보강과 청연 또한 놀라 눈을 부릅떴다.
무공을 모르는 범부조차 단숨에 고수로 만들어 주는 사술이라니. 그런 사술은 듣도 보도 못했다. 사술의 본산이라 알려진 혈교(血敎)에도 저런 사술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술법이 있단 말인가!”
정신을 수습한 남궁진이 경악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진의 물음에 힐긋 팽보강을 쳐다본 홍단야가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 광혼야수혈은 선천지기를 사용하는 사술이니까.”
“선천지기라니!”
선천지기는 일종의 잠력(潛力)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목숨이 아주 위급할 때 인간의 몸을 추슬러 주는 기운이었다. 그런 선천지기를 이용해 무공을 사용한다면 당장에 위력을 높일 수는 있지만 선천지기를 모두 사용한 나중에는 그 기운이 다해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이다.
“혀, 형님…….”
팽보강이 애처로운 눈으로 팽풍걸을 바라봤다.
“이익! 믿을 수 없다! 선천지기를 사용하는 사술이라니! 이건 고금제일의 신공인 적류무상신공이란 말이다!”
콰우우우!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문 팽풍걸이 다시금 기운을 내뿜었다.
주르륵.
돌연 코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혀, 형님, 코에서 피가…….”
팽보강의 말에 팽풍걸이 손을 들어 코 밑을 문지르자 코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손에 묻어 나왔다.
“이, 이게……!”
팽풍걸이 당황하며 미친 듯이 코를 문질렀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쾅!
“이, 이럴 수는 없다!”
도로 동굴의 벽을 후려친 팽풍걸이 악을 쓰듯 외쳤다.
“이건 적류무상신공이다! 하북팽가를 무림제일가로 만들어 줄 고금제일의 적류무상신공이란 말이다! 내 복수를 도와줄 적류무상신공이란 말이다! 광혼야수혈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콰우우우.
팽풍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거세져 감에 따라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양 또한 많아졌다.
“남궁진, 북궁청을 챙길 준비를 해라. 내가 팽풍걸을 맡겠다.”
“하, 하지만…….”
“저 정도 상태라면 많아 봐야 일다경이다. 네 손으로 편하게 해 줄 생각이 아니라면 내 말을 들어라.”
머뭇거리는 남궁진을 향해 차갑게 말한 홍단야가 청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준비해라. 동굴을 부수겠다.”
“예.”
남궁진과 마찬가지로 잠시 머뭇했던 청연이 곧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팽보강은 아니었다.
“푸, 풍객! 부탁하마! 아니, 부탁드립니다! 우리 형님을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
“형님을 살려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한다면 하북팽가는 너, 아니 당신의 수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제발 형님을 살려 주십시오!”
팽보강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상처에서 붉은 피가 꾸역꾸역 솟구쳤다. 그럼에도 팽보강의 애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처절한 팽보강의 모습에 청연의 눈 위로 습막이 차올랐다.
“팽 공자…….”
홍단야에게 애원하던 팽보강이 이제는 남궁진의 바지를 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진 형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형님을 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
팽보강의 애원에 남궁진이 애써 고개를 돌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팽풍걸을 바라봤다.
피를 멈추게 하는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선천지기가 상했다면 이미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신수는 물론이고 전설의 화타가 온다 해도 무리였다.
“미안하구나…….”
팽보강의 시선을 피하던 남궁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 형님…….”
애절한 목소리가 남궁진의 귓가를 때렸다.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있던 홍단야가 팽보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결정해라.”
“……?”
“동굴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도록 놔둘지, 아니면 편하게 보내 줄지를 말이다.”
난데없이 결정하라는 홍단야의 말에 일행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이어지는 홍단야의 말에 모두의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홍단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동굴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도록 놔두는 것은 말 그대로 동굴을 부숴 그 안에 팽풍걸을 가두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팽풍걸은 극심한 고통 속에 온몸의 피를 천천히 흘리며 죽을 것이다.
편하게 보내 준다는 것은 홍단야 자신이 직접 팽풍걸의 목숨을 끊어 준다는 뜻이었다.
팽보강에게는 팽풍걸을 동굴에 가두는 이전의 방법보다 더 고통스럽겠지만 팽풍걸을 위해서는 두 번째를 선택해야 했다.
‘형님!’
붉게 핏발 선 팽보강의 눈 위로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질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팽보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편히…… 보내 주십시오.”
“보강아!”
남궁진이 놀라 부르짖었다.
설마 팽보강이 스스로의 입으로 제 형을 죽여 달라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패룡이며 노호도며 하나같이 난폭한 별호들로 불리지만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궁진이었기에 그 놀람이 더했다.
주르륵.
“형님을 위한 선택입니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형님께 이 말 하나만 전해 주십시오.”
“말해라.”
홍단야가 차갑게 답했다.
마지막 모습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겠다는 듯이 핏발 선 눈으로 팽풍걸을 보던 팽보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북팽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알겠다.”
말을 마친 홍단야가 스윽 몸을 돌려 남궁진을 향해 말했다.
“난 상관 말고 북궁청을 챙기는 즉시 동굴을 빠져나가라.”
“알겠…….”
“어딜 나가겠다는 거냐!”
부우웅.
콰―앙!
돌연 팽풍걸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도를 휘둘렀다. 부채꼴 모양의 도기가 동굴의 벽을 때렸다.
콰르릉.
우레 소리와 함께 홍단야의 손이 핏빛 기운에 휩싸였다.
“따라와라.”
끄덕.
고개를 끄덕인 남궁진이 청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몸을 날림과 동시에 입구를 향해 달려라.”
“……입구 근처에 안개가 있을 거다. 무시하고 안개를 뚫고 나가라.”
남궁진의 말을 홍단야가 이었다.
난데없는 안개 타령에 잠시 멈칫한 청연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풍객 정도의 사람이 허언을 할 리가 없었다.
“꼭 밖에서 만나요.”
청연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남궁진을 향해 말했다. 청연의 등에 업힌 팽보강이 신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크윽. 형님을…… 부탁드립니다.”
잠시 말을 멈춘 홍단야가 양손을 가슴팍으로 들어 올렸다. 남궁진 또한 양손을 가슴팍까지 들어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간다.”
쉬잇.
홍단야의 신형이 흐릿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남궁진의 신형이 만들어 낸 바람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으으……!”
등 위에서 들리는 팽보강의 신음 소리에 청연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이내 고개를 돌려 동굴을 한차례 쳐다본 청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꼭 돌아오세요!’
쉬식.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청연의 신형이 사라졌다.

“진! 북궁청을 챙겨라!”
“알겠네.”
상상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이어 팽풍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감히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거냐!”
부우웅.
콰―앙!
무작위로 뽑아낸 도기에 적중당한 시체 더미가 크게 들썩이며 고름을 내뿜었다. 동시에 동굴을 메우고 있던 시취가 한층 더 짙어졌다.
“상처에 고름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피 속에 시체의 고름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간다면 당장에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훗날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홍단야의 경고에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처가 난 부위를 옷으로 덮었다.
“내가 팽풍걸을 맡겠다.”
쉬식.
말과 동시에 흐릿해졌던 홍단야의 신형이 도기를 난사하는 팽풍걸의 머리 위에서 귀신처럼 나타났다.
쐐애액!
“흐억!”
도를 휘두르며 발광을 하던 팽풍걸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홍단야의 수도(手刀)에 숨을 집어삼키며 황급히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방금 전 자신이 남궁진을 조롱했던 나려타곤의 수법이었다.
“이익! 빌어먹을 놈!”
쿠와아아!
팽풍걸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붉은 기운이 더하면 더할수록 팽풍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몇 가지 묻겠다.”
“……?”
난데없는 홍단야의 말에 팽풍걸은 물론이고 북궁청을 내뺄 기회를 엿보던 남궁진마저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겠다.”
‘아!’
홍단야의 전음에 그제야 남궁진이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슬며시 기척을 죽였다.
“언제 이호를 만났나.”
“무, 무슨 소리냐!”
팽풍걸의 반문에 홍단야의 얼굴 위로 차가움이 깔렸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호를 어디서 만났나!”
쿠오오오.
“어으, 어. 패, 팽노악에게 훈계를 받고 아이를 납치해 망아산으로 와서 아이를 죽이다가…….”
홍단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팽풍걸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며 마구 지껄였다.
“힘을 주겠다고……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적류무상신공을……. 마음속 마귀가…….”
공포와 광기에 잠식당한 팽풍걸이 거품을 물며 횡성수설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팽노악이 문득 자신의 거처로 찾아와 난데없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간단한 훈계 정도로 끝났을 잔소리가 일다경을 넘어 일식경이 되었고, 일식경을 넘어 일각이 되었다. 말투 또한 평소의 팽노악답지 않게 매서웠고 신랄했다. 가슴을 난도질하는 팽노악의 잔소리를 듣다 못해 무턱대고 밖으로 뛰쳐나와 망아산으로 향했다.
중간의 마을에 들러 어린아이 하나를 납치해 이곳 망아곡의 동굴로 끌고 와 평소 하던 것처럼 광기에 몸을 맡겼다. 바로 그때 이호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선이 얇아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그가 나타나고 나서부터였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마귀가 고개를 쳐든 것은.
자신은 이호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마귀는 적류무상신공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북궁청!
팽풍걸 자신의 마음속에는 물론이고 마귀의 마음속에서 뚜렷이 박힌 한 여인!
그때부터 팽풍걸은 마귀가 되었고 마귀가 곧 팽풍걸이 되었다.
“으으, 난 잘못하지 않았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내 여자를 내가 가지겠다는데!”
거품이 튀도록 소리를 내지른 팽풍걸이 도를 치켜들었다.
“저 여자는 내 것……?!”
도를 치켜든 팽풍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어디에……?!”
팽풍걸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북궁청이 누워 있던 공터에 꽂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