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북천무제 1권(15화)
제2장 풍객(風客)(7)


부들부들.
“처, 청!”
팽풍걸의 몸이 끓어오르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북궁청을 찾아 동굴을 훑어보는 팽풍걸의 귀를 남궁진의 목소리가 때렸다.
“성공했네!”
휙.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린 팽풍걸의 입에서 억!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네놈이 청이를!”
남궁진의 품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는 북궁청이 죽은 듯이 안겨 있었다.
“어서 몸을…… 어헉!”
입구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남궁진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도기에 숨을 삼키며 재빨리 발을 놀렸다.
콰―카강!
방금 전까지 남궁진이 있던 자리로 도기들이 쏟아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네깟 놈이 감히 그녀를 만지다니! 죽여주마!”
쿠르르릉!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득한 기운이 팽풍걸의 몸을 뒤덮었다.
“죽여…… 울컥, 주마!”
으르렁거리는 팽풍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팽풍걸 자신은 광기에 잠식당해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씨익. 씨익.
“크르릉. 죽여주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팽풍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불끈불끈.
옷 밖으로 드러난 팽풍걸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크르릉.”
저것이야말로 광혼야수혈의 마지막 단계로 선천지기가 바닥을 보인 사람이 마지막 남은 선천지기를 쥐어짜 근육에 자극을 주어 한 마리 야수로 변하는 단계였다.
‘저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남궁진이 품에 북궁청을 안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팽풍걸의 변한 모습에 경악했다.
흐트러졌던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음산함을 뽐냈고, 피부는 검게 죽어 빛을 잃었다. 두 눈에서는 형형한 붉은빛이 새어 나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크르릉.”
파밧.
낮은 목 울림과 함께 팽풍걸의 신형이 남궁진을 향해, 정확히 말해서는 남궁진의 품에 안겨 있는 북궁청을 향해 쏘아졌다.
쐐애액.
팽풍걸의 손에 들린 도가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남궁진의 목을 노렸다.
‘늦었다!’
팽풍걸의 변화에 신경이 팔려 있던 남궁진이 코앞에서 들이닥치는 도에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품 안의 북궁청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비켜라!”
째쟁.
팽풍걸의 도가 막 남궁진의 목을 베려는 순간,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팽풍걸의 도가 보이지 않는 암경에 의해 남궁진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피잇.
“큭!”
완벽하게 비껴가지는 않았는지 남궁진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휘리릭.
퍼벙!
“쿠왁!”
바람 소리와 함께 연이어 울려 퍼진 소리에 팽풍걸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홍단야가 슬쩍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나가라.”
“자, 자네는?”
“난 놈을 처리하고 나가겠다.”
“하지만…….”
남궁진이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보다 못한 홍단야가 남궁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믿어라.”
“……알겠네.”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남궁진이 재빨리 몸을 돌려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와앙! 어딜 가느냐!”
쨍그랑.
이제는 이성마저 상실했는지 손에 들린 도를 냅다 던진 팽풍걸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손톱을 곧추 세우고 남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홍단야가 팽풍걸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잠시 멈칫한 팽풍걸이 눈을 빛내며 홍단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빗. 피피핏.
팽풍걸의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허공이 찢겨 나가며 날카로운 소리를 터트렸다.
이성은 상실했어도 무공만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손에도 쇄천호조의 묘리를 담은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크와앙.”
쐐액.
오른손으로 머리를 노리며 좌측에서 들이닥쳤고, 우측에서는 옆구리를 노리고 왼손이 들이닥쳤다.
“흐읍.”
가볍게 숨을 들이쉰 홍단야가 뒤로 물러서서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절묘한 철판교의 수법이었다.
파방.
팽풍걸의 양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잡았다.
“크릉.”
자신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간 것 때문인지 한차례 낮은 울음을 터트린 팽풍걸이 그대로 홍단야를 깔아뭉갤 듯 발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홍단야의 신형이 번쩍 솟구쳤다. 핏빛 기운에 휘감긴 홍단야의 손이 사방에서 번쩍였다.
퍼버버벙!
“크아악!”
팽풍걸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자지러졌다.
뒹굴뒹굴.
“크와악. 크왁!”
뼈를 울리는 통증에 팽풍걸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흡사 한 마리 야수 같은 모습이었다.
벌떡.
“크르릉. 죽여주마!”
언제 아팠냐는 듯이 몸을 일으킨 팽풍걸이 홍단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왕!”
꽈―앙!
쿠르르릉.
팽풍걸의 주먹이 동굴의 벽을 때리자 벽이 한 치가 넘게 부서졌다. 동굴의 벽이 쩍 갈라졌다.
“크와앙.”
꽝! 꽝! 꽝!
홍단야를 잡지 못한 것에 분풀이를 하는지 팽풍걸이 양손으로 동굴의 벽을 마구 때렸다. 그때마다 벽 위로 실 같은 금이 쩍쩍 퍼지며 동굴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군.’
저 상태로 몇 번만 더 동굴의 벽을 때린다면 동굴이 저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홍단야의 눈이 처음으로 번뜩였다.
척.
양다리를 벌려 자세를 취한 홍단야가 팽풍걸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와라.”
“크와아앙!”
파밧.
홍단야의 도발에 팽풍걸이 걸쭉한 침을 흘리며 몸을 날렸다.
퍼억!
팽풍걸의 주먹이 무방비 상태의 홍단야의 가슴에 꽂히며 둔탁한 소리를 터트렸다. 자신감을 얻은 팽풍걸이 막 두 번째 공격을 위해 손을 치켜든 순간, 돌연 뻗어 나온 홍단야의 손이 팽풍걸의 목을 옥죄었다.
꾸욱.
“커윽…….”
목에 가해지는 엄청난 힘에 팽풍걸이 가래 끓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홍단야의 힘 앞에서는 부질없는 반항일 뿐이었다.
“크르륵.”
한참을 발광하던 팽풍걸이 혀를 빼문 채 반항을 멈췄다. 그래도 눈빛만은 여전히 살기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었다.
“씨익, 씨익.”
“내 두 눈을 봐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팽풍걸의 목을 잡고 억지로 자신의 두 눈을 마주 보게 한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최근 이백 일의 모든 기억을 나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뇌 밑바닥 속으로 가라앉은 기억 하나하나까지 말이다.”
우우웅.
홍단야의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분홍빛으로 변했다.
핏빛에 가까운 짙은 분홍빛이었다.
“씨익…….”
숨을 몰아쉬던 팽풍걸의 호흡이 점차 짧아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살기와 함께 초점이 뚜렷했던 두 눈이 점점 멍하게 풀리며 홍단야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홍빛을 좇았다.
부르르르.
팽풍걸의 몸이 거세게 떨리는가 싶더니 곧 팽풍걸의 두 눈에서 실 같은 분홍빛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홍단야의 두 눈으로 스며들었다.
“으음.”
분홍빛 기운을 받아들이는 홍단야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홍단야가 시전하는 술법은 광혼야수혈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고한 술법으로, 머릿속에 가라앉은 상대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 올려 자신의 뇌 속으로 옮기는 술법이었다.
이 술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과 함께 술법에 대한 지고한 깨달음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두 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술법을 시전하는 술법사의 두뇌였다.
사람의 두뇌는 생각보다 약하다. 그렇기에 망각이라는 방법을 사용해 두뇌를 자극하는 정보들을 지우거나 잊히게 한다. 만약 어떤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날까지의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인간은 진즉에 미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술법은 상당히 위험한 술법으로 분류되어 있다.
상대의 기억을 억지로 자신에게 옮기는 것이니만큼 그만큼 두뇌에 무리가 많이 오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치가 될 수도 있는 술법이었다.
조선에서조차 이 술법을 시전할 수 있는 술법사의 수가 열을 넘지 않았다.
부들부들.
“커윽. 컥!”
술법의 지속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팽풍걸의 몸에서 일어나는 경련이 거세졌다.
“그르르륵.”
팽풍걸이 새하얀 거품을 토해 내며 눈을 까뒤집었다. 동시에 팽풍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마침내 홍단야의 두 눈 속으로 모두 스며들었다.
“후우.”
털썩.
팽풍걸의 최근 이백 일 전까지의 기억을 모두 흡수한 홍단야가 한숨을 내쉬며 팽풍걸을 옥죄던 손에 힘을 풀자 팽풍걸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쿨럭, 쿨럭.”
“흐읍.”
마른기침을 하는 팽풍걸을 무시한 홍단야가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시취에 의해 미약한 독기가 스며든 공기였지만 홍단야의 몸에 들어섬과 동시에 깨끗한 공기로 바뀌어 홍단야의 폐부를 맑게 해 주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홍단야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군.”
지금 홍단야는 두뇌 속으로 흡수된 팽풍걸의 기억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이내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던 홍단야가 마침내 눈을 뜨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팽풍걸을 바라봤다.
“역시 그랬던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홍단야가 고개를 돌려 일행이 사라진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의 그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크르륵!”
생각에 잠겨 있던 홍단야가 팽풍걸의 신음에 고개를 돌려 바닥에 널브러진 팽풍걸을 바라봤다.
자신이 치료를 한다고 해도 그 가능성이 이 할이 넘지 않는 치명적인 몸 상태였다. 모든 것이 광혼야수혈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전설에 나오는 용(龍)의 내단이 아닌 이상에야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으음.”
스윽.
짧은 신음을 흘린 홍단야가 허리를 숙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팽풍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다.”
오 년 전, 자신의 손으로 폐인으로 만들었을 때도 하지 않았던 사과를 하는 홍단야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이미 팽보강과 약속을 한 상태였다. 약속을 목숨과도 같이 생각하는 홍단야였다.
“끄윽.”
홍단야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팽풍걸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네 동생이 하북팽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
아무 대답 없는 팽풍걸을 향해 홍단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약속하겠다.”
“……?”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팽풍걸의 눈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굳게 닫혔던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중원에 있는 동안 팽가가 소멸될 위기에 처했을 시, 단 한 번! 단 한번만 도움을 주겠다.”
“……!”
팽풍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것은 너와 나, 그리고 하늘과 땅이 아는 약속이다.”
“꺼윽. 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팽풍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륵.
팽풍걸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이 흔들렸을 광경이지만 홍단야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에게 있어 팽풍걸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후회의 눈물이든, 아니면 죄를 뉘우치는 눈물이든 간에.
꾸욱.
홍단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커윽……!”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것일까. 미미한 신음만을 흘리던 팽풍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북궁……청! 사랑…… 영원……히!”
투웅.
탄력 있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까지 북궁청의 이름을 부르짖던 팽풍걸의 몸이 한차례 들썩였다.
추욱.
팽풍걸의 몸이 축 처지며 그나마 몸에 남아 있던 생기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스윽.
허리를 편 홍단야가 싸늘히 식은 팽풍걸의 시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 가슴 안에 있을 자격이 있다.”
휙.
차갑게 말을 내뱉은 홍단야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팽풍걸의 도를 주워 들었다.
스윽.
가볍게 자세를 취한 홍단야가 동굴 안에 쌓인 어린아이들의 시체 더미를 주시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동굴은 묻혀야 했다. 만약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대로 시독이 되어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스윽.
도가 익숙하지 않은 듯, 도를 만지작거리던 홍단야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도를 치켜들었다.
“……개천혈룡(開天血龍)!”
번쩍!
홍단야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순간, 홍단야의 손에 들린 도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