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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7화)
제3장 탐화견(貪花犬) 이호(2)


마지막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무너진 동굴이 먼지구름과 함께 사방으로 돌조각을 튀겼다. 다리는 열심히 놀리면서도 두 눈만은 먼지구름 속을 주시하던 남궁진의 입가에 마침내 작은 미소가 걸렸다.
스윽.
먼지구름을 뚫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홍단야가 매종도의 부축을 받고 있는 팽보강에게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머, 멈춰라!”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홍단야의 앞을 막아선 팽무보가 거센 일갈을 토해 냈다.
“……?”
말없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홍단야의 모습에 팽무도의 커다란 몸집이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럼을 느낀 팽무도가 일부러 가슴을 펴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풍걸은 어디 있느냐!”
“죽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홍단야의 대답에 팽가 무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남궁진과 청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망설이거나 대답을 피할 줄 알았건만 홍단야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진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으으.”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팽무도가 핏발 선 눈으로 절규했다.
“거, 거짓말 마라. 아무리 풍걸이가 무공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놈이 아니다!”
“…….”
팽무도의 절규에 침묵으로 답한 홍단야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파밧.
“머, 멈춰라!”
이번에 홍단야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철혈천호단의 무인 중 하나였다.
이번에는 홍단야도 짜증이 났는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도는 팽 공자님의 도가 분명하다! 너는 그 도를…….”
“비켜라.”
“……!”
싸늘한 홍단야의 말에 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일그러진 무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놈이 감히……!”
“길을 내어 주십시오.”
흥분해 도를 뽑으려던 무인을 제지한 이는 바로 팽보강이었다.
“하, 하지만 공자님…….”
“길을 내어 주십시오.”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내뱉은 팽보강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다가오는 홍단야를 바라봤다.
스윽.
팽보강의 바로 앞에 멈춰 선 홍단야가 도신 중간 중간에 흉하게 금이 간 도를 내밀었다.
“좋은 도다.”
“……!”
홍단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붉게 충혈된 팽보강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도를 받아 든 팽보강이 홍단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약속은 지킨다.”
자기 할 말을 끝낸 홍단야가 바람 소리 나도록 몸을 돌려 남궁진을 향해 걸어갔다.
파밧.
그때 무인들의 무리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와 홍단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냐.”
인영은 철혈천호단으로 보이는 화려한 차람의 이십 대 후반의 사내였다.
홍단야를 향해 포권을 취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대협! 저희 공자님과 함께 색마를 처리하신 대협께 정말 탄복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팽가로 돌아가서 저희 공자님이 색마에게 어떻게 맞서 싸우셨는지 그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
“……!”
사내의 말에 팽가의 무인들과 의원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색마에 맞서다니……?”
홍단야의 입에서 싸늘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대, 대협?”
홍단야의 변화의 이유를 알 리 없는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말해 보아라. 색마에게 맞서다니? 누가?”
싸늘한 홍단야의 물음에 사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구라니요. 물론 저희 팽풍걸 공자님…….”
“대, 대협!”
“입 다물어라.”
상황을 보다 못한 청연이 홍단야에게 다가가다 홍단야의 말에 안색을 굳히며 그 자리에 멈췄다. 다시 사내에게 고개를 돌린 홍단야가 차가운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말해라.”
“그, 그것이…….”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말을 꺼냈던 사내가 주춤거리며 홍단야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말해 보라고 했다.”
스오오오.
홍단야의 몸을 중심으로 차가운 기운이 파도처럼 들고 일어났다.
털썩.
“대, 대협!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내가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었다. 홍단야의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냐.”
“예?”
홍단야의 물음에 사내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사내를 무시하고 몸을 돌린 홍단야가 하얗게 안색을 굳힌 남궁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진, 설명해라.”
“그것이…….”
남궁진마저도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보다 못한 팽보강이 매종도의 부축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서며 전음을 보냈다.
“대협,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번 한 번만…….”
“전음 보내지 마라.”
“……!”
싸늘한 일침에 팽보강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네 행동이 떳떳하다면 입으로 직접 말해라.”
“대, 대협!”
홍단야의 말에 팽보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직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 무인들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 둘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
어색한 침묵이 망아곡에 감돌았다.
“네가 분명 말했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팽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들겠다고.”
홍단야의 질책에 팽보강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천하에 진실을 밝히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세가 내에서만은 진실을 밝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 천하제일가가 아니더냐!”
“……아아!”
척추를 찌르르 울리는 묘한 느낌에 팽보강의 입에서 자의와는 상관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형님과 자신이 꿈꾸었던 가문의 미래!
자신과 형님이 꿈꾸던 천하제일가는 자신의 잘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잘못을 고쳐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문이었다.
부르르.
팽보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흑!”
팽보강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모두…… 세가로 돌아가세요. 모든 것은 세가로 돌아가 이야기하겠습니다.”
투툭. 툭.
팽보강의 눈에서 떨어진 굵은 눈물이 땅바닥을 때렸다.

우엉우엉.
이름 모를 야조의 울음소리와 커다란 보름달이 운치 있는 야경을 그려 냈다.
홀짝.
거대한 느티나무 꼭대기에 앉아 보름달을 감상하던 인영이 손에 들린 술병을 입에 대고 홀짝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놀라 자빠질 만한 광경이었다. 인영이 앉아 있는 나무는 다름 아닌 하북팽가 내원에 있는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홀짝.
팽가의 가주도 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인영, 홍단야가 다시 한 번 술을 홀짝였다. 하북팽가의 술 창고에 있던 술이라 그런지 가끔 즐기던 싸구려 화주와는 맛이 달랐다.
‘대사님…….’
과거의 추억을 좇아 회색빛으로 변한 홍단야의 시선이 저 멀리, 조선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조선에도 달은 뜨겠지.’
투명한 술이 다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대사님도 나와 같은 달을 보고 계시겠지.’
한 모금의 술이 다시 한 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사부…….’
술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감상에 젖으니 그토록 싫어하던 사부의 얼굴마저 아련하게 다가왔다. 사부와 지기인 대사님은 불문의 계율 때문에 술을 멀리하셨지만 사부는 그런 대사님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독 술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홍단야는 어릴 때부터 술을 입에 대고 살아야 했다.
홀짝.
다시 술을 들이켠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나직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天若不愛酒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하늘에 어찌 술 별이 있으랴
地若不愛酒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땅에 어찌 술 샘이 있으랴
天地旣愛酒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하니
愛酒不愧天
내가 술을 사랑함이 하늘에 부끄러울 것이 없노라
已聞淸比聖
이미 맑은 술은 성인에 견준다 하고
復道濁如賢
다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니
聖賢旣已飮
성인과 현인을 이미 마신 우리가
何必求神仙
어찌 구태여 신선이 되길 바라겠는가
三盃通大道
석 잔 술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
한 말 술이면 자연과 합쳐지거늘
俱得醉中趣
모두 취한 가운데 즐거움을 얻었으니
勿謂醒者傳
술 깬 이에게는 전하여 말하지도 말라

이 시(詩)는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으로 사부가 술만 마시면 노래처럼 흥얼거려 홍단야의 귀에도 익숙해진 시였다.
“월하독작이라. 정말 딱 어울리는군.”
“음.”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달을 보던 홍단야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렸다. 나무 밑에는 하북팽가의 가주인 붕산패도 팽목천이 멀뚱히 서서 홍단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쩍.
탁.
가벼운 몸놀림으로 느티나무에서 내려온 홍단야가 팽목천을 바라봤다. 술기운이야 내려오기 전에 내공을 이용해 날려 보냈기에 홍단야의 얼굴에 별다른 취기는 찾을 수 없었다.
“회의는 끝났습니까.”
“그렇다네.”
팽목천에게서는 더 이상 홍단야에 대한 적대감을 찾을 수 없었다.
팽보강에게서 모든 진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홍단야 또한 처음의 싸늘함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하지만 자식을 잃은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할까. 가주라는 무거운 직책에 눌려 슬픔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팽목천을 향한 홍단야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쓸쓸한 눈으로 달을 보던 팽목천이 시선을 돌려 홍단야의 양옆을 바라봤다.
“일행은 어디에 있나?”
“남궁진을 말하는 것이라면 숙소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렇군.”
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지.”
홍단야로부터 술병을 건네받은 팽목천이 술병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 좋은 소흥주(紹興酒)로구만.”
팽목천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으며 홍단야에게 술병을 건넸다. 술병을 건네받은 홍단야가 술을 들이켰다. 이내 다시 홍단야에게 술병을 건네받은 팽목천이 술병에 입을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나, 아니 팽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네…….”
술을 들이켠 팽목천이 홍단야에게 술병을 건넸다.
이번 사건으로 팽가가 잃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록 세간에는 비밀로 붙여 두기로 최종 약조가 되었지만 이로써 팽가는 개방에 커다란 약점을 잡힌 셈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으로 팽가의 귀빈이었던 북궁낙과 북궁청이 떠나게 되었다. 그 둘은 내일 팽가를 떠나 무림맹(武林盟)으로 갈 것이다.
홍단야가 술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팽가는 한 가지를 더 잃게 될 것입니다.”
“……!”
홍단야의 말에 팽목천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