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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18화)
제3장 탐화견(貪花犬) 이호(3)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스윽.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병을 건네는 홍단야의 입이 움찔거렸다.
전음이었다.
“……!”
부들부들.
술병을 건네받는 팽목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팽목천의 신음에서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 팽목천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북궁 소저를 찾아 주는 조건으로 의수 어르신께 무언가 부탁했다는 소리를 들었네. 그래, 언제 의수 어르신을 만날 생각인가?”
“내일 의수 어르신이 떠나기 직전에 만날 생각입니다.”
팽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다시금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이내 하늘을 힐긋 쳐다본 홍단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잘 가시게, 허허.”
허탈하게 웃은 팽목천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팽가는…… 십 년 동안 봉문을 할 생각이네. 그것으로나마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렇군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펄쩍 뛸 일을 홍단야는 그저 그렇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문!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외부의 일에는 결코 간섭하지 않고 권력 싸움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하북에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이 자리 잡고 있다. 매일같이 서로를 경계하던 두 거대 단체 중 한 곳이 봉문을 한다면 이후 십 년간 하북은 개방의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대세가 중 한 곳인 팽가가 봉문을 한다면 중원에 미치는 그 여파도 작지 않을 것이다.
술을 홀짝인 팽목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팽가는 자네가 도움을 청한다면 언제든지 봉문을 깨고 뛰쳐나갈 것이란 것을 기억해 두게.”
“알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다시 답했다.
“술은 두고 가겠습니다.”
쉿.
팽목천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홍단야가 몸을 날려 사라졌다.
“허…….”
검은 점이 되어 어딘가를 향해 사라지는 홍단야의 신형을 좇던 팽목천이 손에 들린 술병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술병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주르륵.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켜는 팽목천의 수염을 따라 넘쳐 난 술이 따라 흘렀다.
달을 바라보는 팽목천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풍걸아…… 이 미련한 놈아…….”
채 마르지 않은 팽목천의 수염을 따라 투명한 눈물이 따라 흘렀다.

탁.
가볍게 땅에 착지한 홍단야가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있을 목격자를 찾았다. 이내 목격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홍단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거대한 뱀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홍단야가 도착한 곳은 팽가의 후원에 있는 숲이었다.
이 숲은 혈림(血林)이라고 불리는 혈호단의 거처였다. 현재 혈호단은 팽풍걸의 일로 소집된 상태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허허, 풍객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는고.”
날카로운 느낌의 꼽추 노인이 느낌과는 다른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홍단야를 반겼다.
작달막한 키의 꼽추 노인의 허리춤에는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기다란 장도가 매달려 있었다. 검은색 일색 무복 위로 흐트러진 노인의 수염이 탐스러웠다.
이 노인이 바로 혈호단의 단주인 혈살도 팽노악이었다.
전대의 고수로 푸근한 인상과는 달리 손속이 악랄하여 팽가를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그다. 그의 비산혈호도법(飛山血虎刀法)은 대대로 혈호단의 단주들에게만 내려오는 절정 도법으로 대성하면 도강을 내뿜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도법이다. 과거 누군가가 팽노악의 도에서 흐릿한 도강을 봤다는 소문이 한창 나돌았던 적도 있었다.
걸음을 옮긴 홍단야가 입을 열었다.
“도강을 만들어 봐라.”
“……!”
난데없는 홍단야의 말에 팽노악의 눈이 일렁거렸다.
“갑자기 찾아와 도강을 만들라니, 허허. 갑자기 무슨…….”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도강을 만들어라. 팽풍걸의 기억 속에 너는 분명 도강을 만들었다.”
장엄한 장강처럼 흐르는 붉고 장엄한 기운!
이것이 팽풍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팽노악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참 과거의 기억인지 흐릿했지만 그 반대로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기억이었다.
허허 웃은 팽노악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아무리 세가의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 그렇지 않나, 이호?”
“……!”
팽노악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잘도 나를 속이려 했더군.”
“그게 무슨 소린가.”
“시치미 떼지 마라. 사천야혈대법(邪天夜血大法). 한낮 색마인 네놈이 어째서 지하 뇌옥에 갇혔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
이어지는 홍단야의 말에 팽노악, 아니 팽노악의 얼굴을 가진 이호가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알 것 없다. 네놈이 알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다.”
스르륵.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칭칭 감긴 오라를 풀어 손에 쥔 홍단야가 말을 이었다.
“네놈은 날 진짜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
부웅, 부웅.
고오오오.
오라가 돌려질 때마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네놈은 처음부터 팽노악을 죽이고 팽노악의 행세를 했더군. 그래서 일부러 팽풍걸을 헐뜯고 팽풍걸이 보는 앞에서 팽보강에게 가주 자리를 제의해서 팽풍걸을 절망하게 만들었지.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쉽게 유혹에 굴복하니까. 네놈은 그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대법으로 이지를 제압시킨 가짜를 보내 팽풍걸과 손을 잡았겠지.”
“…….”
“네놈은 팽가 내부부터 천천히 먹어 치울 생각이었겠지. 팽노악, 팽풍걸. 그 다음으로는 팽보강. 그렇게 팽가를 장악해 네놈만의 아성을 만들 계획이었겠지.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네놈은 그저 육욕(肉慾)만 채우기에 급급한 놈이니까.”
신랄한 홍단야의 말에 이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콰드득. 콰득.
동시에 저번 망아곡의 입구에서처럼 팽노악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마침내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였던 팽노악의 얼굴이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사내의 얼굴로 변했다. 홍단야의 품에 있는 책에 쓰인 생김새와 일치하는 진짜 이호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이호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냐.”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 나왔다.
자신의 사천야혈대법은 조선 제일의 술법이었다.
상대의 이지를 제압하고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술법!
경지가 높은 이호의 경우에는 한 사람을 백치로 만든 다음 자신의 기억을 억지로 주입시켜 자신이 이호라고 믿고 살아가게 할 수 있다. 그것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무공의 경지를 그대로 가진 채로!
망아곡에서 자신의 대용으로 보낸 가짜가 그 경우였다.
물론 부작용으로 보름을 넘기기 전에 칠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죽지만 급한 대로 써먹기에는 쓸 만한 술법이었다.
설마 풍객이 자신의 술법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이호의 놀람은 더했다.
지금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보다 어떻게 술법을 알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오라를 돌리는 홍단야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글쎄.”
스오오.
홍단야의 눈이 분홍빛으로 빛났다. 동시에 이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억! 그, 그것은……!”
파밧.
이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홍단야의 신형이 먼저 움직였다.
쐐애액!
홍단야의 손을 떠난 오라가 형형한 빛을 내뿜으며 이호를 향해 쏘아졌다. 오라를 따라 붉은 궤적이 길게 그어졌다.
“큭!”
따따당!
황급히 허리춤에 달린 장도를 뽑아 오라를 쳐 낸 이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홍단야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뿌드득. 네놈이 어떻게 그분의 술법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파밧.
이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홍단야가 몸을 날렸다. 마치 네가 하는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홍단야의 태도에 이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호 자신은 뛰어난 술법사라는 것과 동시에 절정의 무인이라 자부하는 바였다. 무흔천리비(無痕千里飛)라는 경공과 함께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무흔도법(無痕刀法)이라는 도법은 지하 뇌옥에 있던 다른 죄수들의 무공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기껏 조선에서 이름을 날린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탈혼삭이니 풍객이니 하지만 팽노악마저 죽인 자신이었다. 물론 술법과 함께 약간의 수를 쓰기는 했지만 순수한 무공으로도 팽노악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우우웅.
이호의 장도에서 웅장한 기운이 솟구쳤다.
검기보다 더 크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기운이었다.
모든 무인들이 꿈에서나 바라는 경지인 강기였다.
현 무림에서 강기를 만들 수 있는 무인이 몇이나 될까.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들을 합쳐도 그 수는 결코 두 자리 수를 넘지 않았다.
‘도……강?’
팽풍걸의 기억 속에 박힌 팽노악의 도강보다는 짙었지만 이호의 도강 또한 흐릿했다.
완벽하게 강기의 경지에 발을 들이지 못한 듯했다.
“흐으.”
강기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것인지 이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팔과 다리를 모두 자른 뒤에 천천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던 이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멍청한 놈.”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어투 속에 웅장한 기운이 섞여 나왔다.
고오오오.
홍단야의 오라를 휘감은 붉은 강기가 돌풍을 일으켰다.
이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삭……강(索|)?’
오라에 감긴 강기이니 삭강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저런 기운이라니!’
자신의 강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강맹한 기운에 이호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옥죄는 기운에 두려움에 떨던 이호가 문득 눈을 치켜떴다. 홍단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속에서 친숙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막 열리던 이호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동시에 이호의 눈동자 위로 지독한 불신의 감정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네놈이 그분의 무공을 알고 있는 거냐!”
“…….”
저벅저벅.
이호의 외침에 침묵으로 답한 홍단야가 오라를 꼬나 쥐며 걸음을 옮겼다.
“이, 인정할 수 없다! 네놈의 기운은, 그 저주 받은 기운은 그분의……!”
이호의 격한 외침과 동시에 홍단야의 손에 들려 있던 오라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인 양 홍단야의 손을 떠나 이호를 향해 쏘아졌다.
절규하던 이호가 황급히 도를 거두며 쏘아져 오는 오라를 향해 휘둘렀다.
콰―르릉.
강기와 강기의 부딪힘에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륵.
“크읍.”
이호의 입에서 죽은피가 흘러나왔다.
파르르.
도를 쥔 이호의 손이 가해지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이호의 손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크윽!”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던 이호가 신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넌, 내 가슴 안에 있을 자격이 없다.”
쩌―정.
푸욱.
도와 강기를 한꺼번에 바스러트린 오라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쏘아져 그대로 이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거대한 장창(長槍)에 꿰뚫린 것처럼 이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푸헉!”
치이익.
입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오라에 묻기도 전에 허공에서 산화했다.
“꾸르륵, 네놈이 어떻게 혈…….”
콰드득.
피거품을 게워 내며 입을 열던 이호가 몸을 관통하는 오라에 몸을 비틀었다.
스르륵.
이호의 등으로 삐죽 튀어나온 오라가 스르륵 이호의 등 뒤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호의 목을 휘감았다. 형형한 빛을 내뿜던 강기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꾸욱.
피에 흠뻑 젖은 오라가 목을 옥죄는 느낌에 이호의 몸이 요동쳤다.
“아, 안 돼…….”
이호의 얼굴 위로 절망이 드리워졌다.
“자, 잠깐! 나를 살려 주면 나머지 죄수들의 위치를 알려 주겠다!”
절박한 이호의 말에 홍단야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망설임이 서렸다. 확실히 넓디넓은 중원에서 나머지 죄수들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호의 경우만 하더라도 우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말해라.”
홍단야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결심을 본 이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 목에 오라부터 좀…….”
“…….”
스르륵.
홍단야가 군말 없이 이호의 목을 죄던 오라를 풀었다. 이내 붉게 달아오른 목을 쓰다듬은 이호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