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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20화)
제3장 탐화견(貪花犬) 이호(5)


“삼존은 몰라도 쌍군(雙君)과 오왕(五王), 그리고 일광(一狂)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오왕밖에 모른다.”
“허어. 이거 완전 처음부터 말해 줘야겠군.”
남궁진이 혀를 차자 홍단야가 걸음을 옮기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홍단야가 활동하던 오 년 전에도 오왕이라 불리는 강자들은 있었다. 자신과 약간의 인연이 있는 철림맹의 참천부왕 또한 오왕에 속한 무인이었다. 그때 당시는 삼존이 아닌 사존(四尊)이었고 일광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있지도 않았다.
“일단 굳이 강함의 순서를 매기자면 쌍군, 삼존, 오왕, 일광 순일세. 쌍군은 사 년 전까지는 사존에 속했네. 깨달음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열어 군(君)의 칭호를 받은 군림마군(君臨魔君)이 쌍군 중 한 명이고, 또 한 명은 삼기노군(三技老君)이라는 분으로 정사 중간의 길을 걷는 분이시네. 심한 방랑벽 덕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지.”
한 명의 무림인으로서 정사 중간을 걷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자신의 각오를 둘째 치고 주변에서 수없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인들은 한 단체에 자신이 속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정사 중간을 걷는 무인들도 대다수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아무 곳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삼류에도 끼지 못하는 무인이거나 엄청난 실력을 가진 강자였다. 쌍군의 일인인 삼기노군은 후자에 속하는 무인으로 정사 중간의 길을 걸으며 방랑을 즐겨 하는 무인이다.
“그리고 삼존으로는…….”
저 멀리 보이는 의수의 거처를 본 남궁진이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아까 언급한 매화검존 어르신과 오대세가와 중소 세가들을 중심으로 모여 만든 제왕회(帝王會)의 회주(會主)로 계시는 제왕검존(帝王劍尊) 어르신이 있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 조부님이시지.”
남궁진의 얼굴 위로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재빨리 씁쓸함을 지운 남궁진이 말을 이었다.
“그 다음은 위에서 말한 흑룡회의 회주인 흑룡혈존(黑龍血尊)이 있네. 매화검존 어르신과는 필생의 숙적이라 불릴 정도로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심하지. 어떻게 보면 지금 섬서의 상황이 이 두 분의 영향인지도 모르지.”
잠시 숨을 돌린 남궁진이 말을 이었다.
“그 다음은 오왕이네. 자네와 인연이 있는 철림맹(鐵林盟)의 참천부왕(斬天斧王)을 비롯해 혈궁(血宮)의 혈왕(血王), 그리고 소림사(小林寺)의 자비권왕(慈毘拳王), 무당파(武當派)의 태극검왕(太極劍王), 마도문(魔刀聞)의 철혈도왕(鐵血刀王)이 있네.”
쌍군과 삼존만큼은 아니지만 오왕에 속한 무인들 또한 커다란 단체의 수장이나 그에 버금가는 단체를 가지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특히나 철림맹의 맹주인 참천부왕은 천하의 모든 산적들을 통합한 무인으로 산적들 사이에서 그는 하나의 신화로 표현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일광(一狂)은…….”
막 입을 열려던 남궁진이 멈칫하며 말을 끊었다. 의수의 거처 앞에 서 있는 단아한 모습의 여인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도의수 북궁낙의 손녀이자 의봉이라 불리는 북궁청이었다.
북궁청의 옆에는 화봉인 청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청연 또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남궁진이 홍단야를 향해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는 눈치를 주며 두 사람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오봉 중에서 두 명이나 나와 계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핫.”
“그게 검룡이라 불리셨던 오라버니가 할 말인가요?”
남궁진을 향해 톡 쏘아붙인 청연이 홍단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네요.”
“음.”
홍단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느끼기에 대단히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홍단야나 청연이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내 청연의 뒤에 있던 북궁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저를 구해 주신 분이시죠? 어제는 미처 감사하다는 말도 못 드렸네요.”
“너를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남궁진이다.”
“괴협께서 하신 말씀은 조금 다른데요?”
북궁청의 미소에 홍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하하. 북궁 소저,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홍단야의 불만을 느낀 것인지 남궁진이 애써 사태를 수습하려 나섰지만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붙는 격이었다.
“무슨 말이라뇨? 괴협께서 말씀하시길 풍객께서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하셨다고…….”
이어지는 북궁청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어르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멈춰라, 진.”
호들갑을 떨며 걸음을 옮기는 남궁진을 제지한 홍단야가 싸늘한 눈으로 남궁진을 바라봤다. 본래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홍단야였다. 그렇기에 북궁낙과 몇 명의 인물들에게만 자신이 북궁청을 구출한 것에 대해 도움을 준 것이라는 것을 밝혔고,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말했다.
싸늘하게 변한 홍단야의 표정을 본 남궁진이 황급히 전음을 날렸다.
“모든 것이 다 자네의 해독을 위해서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의봉의 의술은 조부인 의수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하네.”
남궁진의 말에 싸늘했던 홍단야의 표정이 풀렸다. 그래도 홍단야 특유의 냉막함만은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지.”
“그래. 어서 들어가세나.”
싸늘한 목소리에 남궁진이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소저들은 안 들어오시오?”
멀뚱히 서 있는 청연과 북궁청을 향해 남궁진이 묻자 북궁청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기 전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는 북궁청을 스윽 쳐다본 홍단야가 남궁진의 뒤를 따라 의수의 거처로 들어섰다.
덜컥.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지독한 약재 냄새는 누가 봐도 이곳이 의수의 거처란 것을 짐작케 만들었다. 수많은 약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의 중앙에 의수, 북궁낙이 새하얀 옷을 입고 의자도 없는 바닥에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르신, 저희 왔습니다.”
“…….”
남궁진의 인사에도 의수의 눈을 떠질 줄을 몰랐다.
“의수 어르신?”
시체와도 같은 의수의 모습에 남궁진이 막 의수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손을 내밀어 남궁진을 제지한 홍단야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왔다.”
스윽.
남궁진의 부름에도 꼼짝 않던 의수의 눈이 홍단야의 목소리에 천천히 열렸다.
북궁청을 잃어버리기 전과 같은, 현기 가득하고 깊은 눈이었다.
“왔는가…….”
말끝을 흐린 의수가 고개를 돌려 홍단야를 바라봤다. 현기를 내비치는 눈 위로 언뜻 불안감이 스쳤다.
“앉게.”
의수가 자신의 앞자리를 권했다. 그나마 약재들이 쌓여 있지 않은 곳이었다.
턱.
홍단야와 남궁진이 자리에 앉자 의수가 입을 열었다.
“일단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군. 내 손녀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손사래를 치는 남궁진과는 달리 홍단야는 그렇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홍단야의 눈은 끊임없이 해독을 갈망하고 있었다.
“휴우…….”
낮게 한숨을 내쉰 의수가 홍단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턱.
벌떡.
“어, 어르신!”
돌연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의수의 행동에 남궁진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자네는 잠깐 조용히 해 주게. 난 지금 풍객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네.”
고개를 처박은 그대로 남궁진의 만류를 뿌리친 의수가 천천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자네의 독은 해독이 불가능하네.”
“…….”
싸늘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헛!”
동시에 느껴지는 광폭한 기운에 남궁진이 헛숨을 삼키며 황급히 손을 뻗었다.
터억.
파르르.
막 의수의 머리를 터트리려던 홍단야의 손이 남궁진의 손에 가로막혔다. 감당치 못할 힘에 남궁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주르륵.
홍단야의 손을 막은 남궁진의 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무슨 짓인가!”
“후우, 후우.”
거친 호흡을 내쉰 홍단야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처박은 의수를 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고 나를 봐라.”
“…….”
홍단야의 목소리에 스며든 가공할 살기에 남궁진이 전율했다. 망아곡에서 보여 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살기였다. 망아곡에서의 살기가 파도였다면 지금의 살기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해일이었다.
흠칫.
마치 뱀의 그것을 만지는 듯한 차가운 촉감에 남궁진이 흠칫하며 홍단야의 팔을 잡았던 손을 뗐다. 하물며 남궁진보다 무공이 낮은 북궁낙이 홍단야의 살기를 감당할 리가 만무했다.
파르르.
북궁낙의 눈썹이 밀려오는 공포로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고 나를 봐라.”
이어지는 홍단야의 말에 북궁낙이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떠라.”
죽음을 집행하는 사신의 목소리가 이러할까. 홍단야의 목소리에 북궁낙은 물론 남궁진마저도 몸을 흠칫했다.
스륵.
북궁낙이 주름진 노안을 뜨며 홍단야를 바라봤다.
‘허억!’
바로 코앞에 있는 홍단야의 얼굴에 북궁낙이 가슴속으로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분노는 홍단야에 대해 잘 모르는 북궁낙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눈을 봐라.”
“……으음.”
싸늘한 목소리에 북궁낙이 시선을 돌려 홍단야를 눈을 바라봤다.
“묻겠다. 방금 한 말이 사실인가.”
인가……. 인가……. 인가…….
홍단야의 목소리가 북궁낙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어으…….”
한차례 신음을 흘린 북궁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이네. 자네의 독은 내 능력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하네. 발작의 주기를 조금 늦출 수는 있지만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어, 어르신.”
북궁낙의 말에 남궁진이 당황했다.
남궁진 또한 설마 선도의수라 불리는 북궁낙이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남궁진이 불안한 눈빛으로 홍단야를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홍단야는 결코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는다. 홍단야의 성격으로 보건대, 설사 무림 공적이 되더라도 의수에게 이번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받아 낼 것이다.
“자, 자네…….”
“다시 한 번 묻겠다.”
남궁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홍단야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정말 해독이 불가능한가.”
“그, 그렇네.”
푹.
말을 마친 북궁낙이 푹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아무리 팽가와 무림맹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풍객의 반응으로 보건대 몸 성히 팽가를 나서기는 그른 듯했다.
“정말, 정말 미안하네. 이 늙은이가 손녀의 목숨을 구하고자 그만…….”
툭툭.
북궁낙이 애처롭게 말하며 고개를 한층 더 숙였다. 북궁낙의 눈에서 떨어진 투명한 눈물이 약재에 찌든 바닥을 때리며 얼룩을 만들었다.
“후우.”
홍단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전의 한숨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한 한숨이었다면 이번 것은 달랐다.
살의, 분노, 허탈함.
모든 것이 섞인 한숨이었다.
“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나?”
“……!”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홍단야가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