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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21화)
제3장 탐화견(貪花犬) 이호(6)


“자, 자네!”
“난 지금 의수에게 묻고 있는 거다, 남궁진.”
홍단야가 자신의 성(姓)까지 붙여 이름을 말하며 제지하자 남궁진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과거 덕에 특별한 일이 아니거나 화날 때가 아니면 ‘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던 홍단야가 성까지 붙여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나?”
“난…….”
벌컥.
“안 돼요, 할아버지!”
북궁낙의 말이 막 이어지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명의 인영이 들이닥쳤다.
북궁낙의 손녀인 북궁청이었다.
“안 돼요, 할아버지! 저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는 없어요! 차라리 제가 죽겠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순식간에 들이닥쳐 북궁낙의 앞을 가로막듯이 쓰러진 북궁청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굳었던 북궁낙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안 된다, 청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살아야 한다!”
성난 표정으로 소리친 북궁낙이 북궁청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 홍단야를 바라보며 외쳤다.
“어서 날 죽이게! 그 대신 청이에게만은 제발 손대지 말아 주게! 모든 것은 이 못난 늙은이의 잘못이니 제발 손녀에게만은 해를 입히지 말아 주게!”
“안 돼요! 제발, 제발 할아버지 대신 저를 죽여주세요!”
서로를 죽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북궁낙과 북궁청의 모습에 남궁진이 얼굴을 구기며 황급히 홍단야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나 또한 부탁함세. 제발 저 둘을 살려 주게. 내 설사 가문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자네의 해독을 돕겠네. 이것은 나, 남궁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이네. 그러니 제발 저 둘을 용서하게.”
“…….”
남궁진의 전음에 홍단야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부답하며 두 명을 바라봤다.
스윽.
“저 또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어느새 나타난 청연이 홍단야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마침내 침묵하던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해라.”
홍단야의 말에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 줄기 눈물이 흘리는 북궁낙의 두 눈을 마주친 홍단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나?”
“물론이네.”
“하, 할아버지!”
북궁청이 다시 한 번 부르짖었지만 북궁낙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스윽.
서서히 움직이는 홍단야의 손에 북궁낙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척.
“응?”
스스로의 자리를 찾듯이 손이 다시 홍단야에게로 돌아가자 북궁낙은 물론, 북궁청과 청연, 남궁진마저도 의아한 얼굴로 홍단야를 바라봤다.
스윽.
“그 마음, 잊지 말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홍단야가 북궁낙과 북궁청을 향해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북궁낙의 거처를 나섰다.
“가, 같이 가세!”
그 뒤를 따라 남궁진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응?’
점차 멀어지는 홍단야의 신형을 좇던 청연이 바닥에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진 붉은 반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붉은 반점의 정체는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홍단야의 피였다.

스윽.
손톱이 파고들어 피를 흘리는 손바닥을 대충 옷에 문지른 홍단야가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대체 왜였을까.
마지막 그 순간, 의수의 머리통을 부수지 못한 이유가.
“하하…….”
홍단야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사한 만월이 떠 있는 밤도 아니건만 독한 화주가 그리웠다.
“대사님…….”
의수가 손녀를 위해 희생하고자 마음먹는 순간, 일순간 대사님과 의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렇기에 손을 거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기에 손을 거둔 것이다.
대사님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 대사님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을 수로 헤아리라면 아마 칠 일 밤낮을 새어도 모자랄 것이다. 어리석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독을 들이켜신 분이었다.
‘하다못해 원망이라도 하셨으면…….’
만약 대사님이 원망이라도 했으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관군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대사님과 함께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대사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자신이 대사님과 같은 독을 들이켜며 스스로의 운명에 족쇄를 채울 때, 대사님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자신을 향해 허허 웃으시며 자신에게 말했다.

“대사님! 세상은 저와 대사님을 버렸습니다!”
“이놈 단야야, 네놈이 아주 웃기는 말은 하는구나. 세상은 아직 너와 나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세상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느냐?”

대사님의 그 말에 자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절망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신과는 달리 대사님은 그저 웃음으로 모든 것을 흘려보내셨다.
분노. 절망. 배신감……. 모든 것들을.
만약 그때 당시 대사님이 자신을 위해 독을 마시고 자신의 족쇄가 되어 자신의 폭주를 막지 않았다면 개천 일호가 자신을 척살하기 위해 달려왔을지도 몰랐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 버린 홍단야가 팽가 내의 자신의 거처로 가 곱게 개어 있는 본래의 포졸복으로 갈아입었다.
“떠나려고 하는 것인가?”
어느새 다가온 팽목천이 물었다.
인기척은 전에 느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이었기에 고개를 돌려 팽목천을 바라봤다.
“예.”
“아쉽군. 남아서 보강이의 얼굴을 보고 갔으면 좋으련만…….”
팽목천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지금 팽보강은 팽풍걸에게 입은 상처가 도져 모든 진실을 말한 직후 정신을 잃어 지금까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
홍단야가 아무 말이 없자 팽목천이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중에라도 꼭 팽가에 들러 주게나. 팽가는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예.”
짧게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거처를 나섰다. 팽목천 또한 가볍게 배웅만 했을 뿐, 더 이상 따라오지는 않았다. 정문이 아닌 후원의 담벼락에 다가선 홍단야가 가볍게 도약해 담 위로 올라섰다. 바로 그때, 홍단야의 뒤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팽목천이 아니었다.
“섭섭하군. 말도 없이 가려 하다니. 자네와 내 사이가 겨우 이 정도였나?”
짓궂은 표정으로 말하는 사내, 바로 남궁진이었다.
“고맙네.”
뜬금없는 남궁진의 말에 홍단야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무엇이 고맙냐고 묻는 듯한 모습에 씨익 웃은 남궁진이 말을 이었다.
“의수 어르신의 일 말일세.”
“단순한 변덕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말이야?”
남궁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 년 전, 남궁진에게 깨달음을 준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홍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는 변덕이 아니라 실수였다.”
“뭐? 푸하하하!”
남궁진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자네가 농담을 할 때가 있다니.”
“농담이 아니다.”
“…….”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던 남궁진이 이어지는 홍단야의 말에 눈물을 닦던 손을 멈춘 채 당황했다.
“그, 그렇군…….”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고 말이야.”
홍단야의 말에 멈칫한 남궁진이 누런 이를 내보이며 씨익 웃었다.
거지다운 멋진 웃음이었다.
“이제 섬서로 갈 것인가?”
끄덕.
홍단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안 한다.”
남궁진이 말하기가 무섭게 홍단야가 받아쳤다. 이번에는 남궁진 또한 예상했는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핫.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래, 어디를 통해 섬서로 가려고 하는가?”
남궁진의 물음에 잠시 말을 멈춘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바람이 가는 곳으로…….”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이 씨익 웃으며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을 만끽했다.
“그래. 자네는 풍객(風客)이었지.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손님 말이야…….”
휘오오오.
바람이 팽가의 후원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을 때는 이미 담벼락 위의 홍단야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떠난 것이다.
“풍객은 떠났나요?”
“그런 것 같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궁진이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뒤에는 청연이 후원의 꽃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가 섬서로 간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래.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섬서로 간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청연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를 따라가겠어요.”
“뭐?”
난데없는 청연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풍객을 따라가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를 따라가서 확인할 것이 있어요.”
청연의 시선이 저 멀리, 이제는 보이지 않는 홍단야의 신형을 좇았다.
‘과연 그가 나에게 대사형을 꺾을 수 있는 깨달음을 줄지를!’
청연의 대사형은 그와 같은 일대 제자 항렬의 검수(劍手)로 단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매화검수(梅花劍手)에 속했던 천재였다. 매화검수로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깨달은 대사형은 스물둘의 나이에 매화검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의 수련에 매진했다. 세상은 대사형에게 검에 미친 인간, 광치검(狂痴劍)이라는 별호를 주었다.
대사형이 구룡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대사형이 구룡에 속했다면 검룡이라는 이름은 앞의 남궁진이 아니라 대사형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청연 또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컸지만 대사형의 앞에서는 평범한 범인, 아니 바보에 불과했다.
그리고 어느 날, 청연은 보았다.
손톱같이 고운 초승달이 뜬 날, 대사형의 검에 쓰러지는 장문인의 모습을!
매화검존의 사숙(師叔)이자 현 화산파의 장문인인 옥허도장은 태룡검(太龍劍)이라는 별호로 섬서에서는 그 적수를 찾기 힘든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채 서른을 넘지 않은 일대 제자에게 쓰러진 것이다.
물론 서로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단순한 비무였고, 세간의 눈을 속이고 몰래 치른 것이었지만 청연은 장문진인이 쓰러지는 순간, 대사형이 자신이 있던 방향을 향해 눈웃음을 치던 것을 잊지 못했다. 그 눈웃음은 너라면 자신을 꺾을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대사형은 무림맹에서의 부름을 핑계로 화산을 떠났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대사형이 자신의 목표가 된 것이.
오직 존경으로 가득했던 대사형의 존재가 꼭 넘어야 할 벽으로 바뀐 것이!
“무엇을 확인한다는 것이냐?”
“……가능성을요.”
“뭐?”
상대는 풍객이다. 총 열 번의 등장과 함께 열 명의 절정 고수들에게 깨달음을 주어 단숨에 객의 호칭을 받은 괴이한 무인! 그라면 대사형이라는 한계에 가로막힌 자신에게 깨달음을 줄지도 몰랐다.
“먼저 가 볼게요, 진 오라버니. 다른 분들에게는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파밧.
“여, 연아!”
뒤에서 들리는 남궁진의 외침을 무시한 청연이 시력을 돋궈 홍단야의 신형을 찾았다.
홍단야의 뒤를 쫓는 청연의 눈이 빛났다.
‘기다려요, 청운 대사형!’
두 눈은 홍단야를 쫓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다른 자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