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


한국 게임 업계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던 와중 몇몇 가상현실 게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가 인기를 끌면 그 아류들 역시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 마련.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이 난입하기 시작했고, 몇몇 킬러 컨텐츠들이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중세 무협을 배경으로 한 ‘용호전’이라는 게임이 크게 히트를 쳤고,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에인션트’라는 게임이 다년간의 개발 끝에 튀어나와 많은 유저들을 중독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수많은 게임들이 나와 재미를 어필해 보았지만 비슷비슷한 특징의 게임들이 난립하다 보니 고정된 시장에서의 세력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확고한 유저 층을 확보하며 세계 게임 시장에 한국 게임 열풍을 이끌었던 몇몇 게임사들 외엔 수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와중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게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국 최대 기업인 배달상사가 게임 업계 진출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 시기 게임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중견 기업 세 곳을 한꺼번에 집어삼킨 것이다.
업계 2위와 4위, 5위의 기업을 그대로 인수해 버린 것이다. 나름 게임 업계에선 대기업이라고 자신하던 그들 역시 전자 산업과 방위 산업, 건설과 환경 등 수많은 분야에 걸쳐 세계를 아우르던 배달 상사에게는 한낱 사자 앞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단지 업계 1위의 코리아게임즈를 인수하지 않은 것은 인수한 세 기업을 통해서 그 시장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는 배달상사 회장의 자신만만한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이 인수한 세 회사 모두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한 게임들을 통해 급 성공을 이룬 회사들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합쳐져 나오게 될 게임 역시 가상현실을 다루는 게임일 것이라는 추측이 전 세계 게이머들 사이에서 당연한 이야기로 굳어져 갔다.
그리고 10년 후.
전 세계는 소리 소문 없이, 일체의 광고 없이 공개 테스트에 돌입한 한 게임을 접하게 된다.
에니티. 그것이 그 게임의 이름이었다.
홍보 없는 게임이라는 것은 모험에 불과한 것. 입소문이 없다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 게임은 달랐다.

홍보나 광고 따위에 들일 돈이라면 차라리 게임의 질을 높이는 데 쓰겠다!

배달 상사 자회사의 한 부서에서 평범한 부장을 맡고 있다가 에니티 사업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벼락출세를 하게 된 강효찬의 오만한 발언은 광고업계의 비난 논조와 맞물려, 오히려 각 언론사의 열띤 취재 경쟁을 불러일으켜 돈을 쓴 것보다도 더 큰 광고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단지 테스트, 그것도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임에도 수많은 기사들을 접한 엄청난 사람들이 접속을 시도한 것이었다.
영진이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 역시 그런 뉴스 기사들과 더불어 캡슐을 배달한 집의 학생들, 혹은 공장 사무실로 걸려온 문의 전화에서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에니티라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판타지가 배경이라는 것,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것과 게임사의 말을 빌면 ‘무자비할 만큼의 중독성’이 있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마케팅을 잘했기 때문이겠지.’
그땐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었다.
“에니티라.”
놀라운 것은 이 게임의 개발이 10년 이상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개발 8년, 비공개 테스트 2년 반. 공개 테스트 1주일.
커다란 회사가 단 하나의 게임을 10년 이상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은 끈기도 끈기지만 그 엄청난 자금 압박을 이겨 낼 수 있는 거대 기업의 저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만한 자금력이 있으면서도 별도의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배짱! 그것은 단순히 돈을 들이지 않고 이슈를 만드는 마케팅 솜씨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게임에 자신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대체 어떤 게임이기에? 영진은 간략한 홍보 동영상과 몇몇 스크린 샷을 감상해 보았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그저 화려하고 그럭저럭 재미가 있겠구나 정도지 게임사에서 말하는 ‘중독성’에 대해선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중에도 게시판에는 수많은 게시물들이 실시간으로 작성되고 있었고, 그중 한 게시물의 제목이 눈에 들어와 클릭해 본 그는 순간 ‘이게 뭐야.’ 하는 얼굴이 되었다.


진리의 정플


<정플이 진리>
닥치고 정플.
정플이 진리임.

“정플?”
정플이 뭐지? 하며 댓글들을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정플 하악하악. (에슈먼드)
―난 벌써 삼백 번이 넘어갔다고! (밀리건)
―가소로운 것들. 이 몸은 열 번 만에 성공했다. (오돌뼈)
┖ 님. 제발 비법 좀 가르쳐 주세요. (헌팅턴)
┖ 간나 색히. 구라치지 말라! (아름다운 오늘)
┖ 훗. 믿지 못해도 상관없지. 사실이니까. (오돌뼈)
―누가 노하우 좀 가르쳐 주세요. 진짜 이 짓만 천 번을 넘게 하니 할 맛이 안 납니다. (게슈타포)
┖저도요.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헌팅턴)
┖ 스무스한 허리놀림에 이은 강력한 헤드뱅잉. (알파와 오메가)
┖ 아놔. 그걸 가르쳐 주면 안 되죠. (오돌뼈)

그 외에도 꽤 많은 게시물들이 ‘정플’이라는 것을 찬양하거나 헐뜯는 등 이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게임사를 비난하며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모습들은 찬양 일색이었다.
“몇 번이 넘었다. 방법 좀 가르쳐 달라……. 퀘스트 같은 건가 보군.”
그래도 그렇지 백 번이 넘도록 뭔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좀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게임이라는 것은 즐기라고 만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즐기는 게 아니라 게임 때문에 더욱 열이 받는 것이 아닌가.
“나 같으면 포기하고 다른 퀘스트를 하겠다.”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뒤로 넘겨 공식사이트로 다시 들어온 영진의 눈에 보이는 문구 하나가 있었다.

에니티의 세계는 여러분이 만들어 갑니다.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에니티의 세계에선 여러분이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고 그런 멘트군.”
영진은 둘러보며 쿠폰을 인증하는 곳을 찾아 들어간 뒤, 갖고 있던 쿠폰의 번호를 입력했다.
―에니티입니다. 귀하께서 입력하신 쿠폰의 번호는 ‘삼화실업’의 영업용 홍보 쿠폰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귀하의 소속과 성함, 쿠폰 입수 경로를 말씀해 주십시오.
명훈의 말 그대로였다. 영진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삼화실업에서 일하고 있던 한영진입니다. 주인 없는 쿠폰이 있어서 제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담당자를 연결 중입니다.
인공지능 멘트가 사라지고 나서 몇 초 후 화상 화면에 실제 사람이 등장하더니,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영업부 송아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쿠폰을 결제하려고 했는데 회사에 있던 무료 쿠폰이라서요. 일주일짜리인데, 결제할 수 있나요?”
―현재 조회 상으로 ‘삼화 실업’의 ‘한영진’ 님으로 나와 있는데 본인 맞으십니까?
“예. 저 맞습니다.”
―지금 댁이신가요? 본인 확인을 위해 전화 연결이 필요합니다.
그 뒤로 몇 단계에 이르는 본인 확인 절차가 있었지만 캡슐의 인체 스캔 덕분인지 생각보다 까다롭진 않았다.
그가 한영진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여직원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덜 깐깐해졌고, 그는 별다른 문제없이 계정을 만들고 일주일 쿠폰의 적용을 실행할 수 있었다.
―조회 상으로는 아직 결제되지 않은 쿠폰들이 49장 더 있다고 되어 있는데, 말씀대로라면 홍보 쿠폰을 배포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딱히 오더가 내려오지 않아서요. 그리고 회사는 도산했기 때문에 배포할 일은 더욱 없을 거구요. 혹시 반납하거나 파기해야 하나요?”
영진의 질문에 잠시 누군가와 알아보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 뒤, 여직원의 대답이 들려왔다.
―해당 쿠폰은 특별히 한정 생산된 것으로 파악된 업체용 홍보 쿠폰인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홍보용 쿠폰의 경우 액면가의 80%를 지불하고 구매하게 되지만 이 쿠폰은 액면가의 50%만 지불하고 구매하는 대신 개인별로 한 장만 사용하실 수 있는 초기 적용형 쿠폰입니다. 가격이 낮은 대신 한번 업체로의 판매가 이루어진 쿠폰에 대해서는 반품이 불가한 것이 원칙입니다. 물론 2차 거래 역시 금지되어 있습니다.
“쓸 수밖에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규정에는 어긋나지만 쿠폰의 소유주이신 귀하께서 원하신다면 해당 쿠폰들을 전부 귀하의 계정에 적용시켜 드리겠습니다. 그것 외엔 저희로서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없네요.
다시금 목소리가 딱딱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냥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영업부 송아람이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상담원 평가란에 별 다섯 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예.”
상담이 끝나자 곧 팝업창이 떠올라 상담 직원의 목소리나 응대 방식, 태도 등을 평가하는 곳이 생겨났고, 영진은 별생각 없이 별 다섯 개를 주려다가…… 실수로 별 하나를 주고 말았다.
맨 오른쪽이 다섯 개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반대였던 것이다.
“윽.”
게다가 확인 버튼까지 눌러 버려서 평가창이 사라져 버렸다.
“뭐, 큰일이야 있으려고.”
조금 난감해하던 그는 공식 사이트에서 에니티의 클라이언트를 내려 받아 컴퓨터에 설치하도록 하고 잠시 해당 커뮤니티를 더 돌아다님과 동시에 지금 살고 있는 곳 주변에 일자리가 있는지 검색해 보기도 했다.
“요즘 다들 힘들다더니, 정말 일자리가 없구나.”
그럭저럭 힘쓰는 일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흐음.”
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녀도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한 영진은 문득 클라이언트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안내에 인터넷 창들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숲의 바위에 앉아 있는 그의 정면엔 활활 타오르는 황금빛 로고가 떠올라 있었다.
“한번 들어가 봐야지.”
에니티에 접속을 시도하자 보통의 게임들이 그렇듯 그대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 이후 조금씩 안정되는 시야에 장관이 보였다.
푸른 하늘. 구름 사이로 날아다니는 몇몇 알 수 없는 생물들과 땅 위를 달리는 몬스터들과 짐승들.
멀리 보이는 낮은 산 위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성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눈앞의 평원엔 막 전쟁을 치르려 하는 수많은 인간들과 높이 솟은 깃발들이 보였다.
휘날리는 깃발 너머로, ‘당신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에니티(Never Ending Tales)라는 로고가 예의 그 황금빛 아지랑이를 이글거리며 떠올랐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오프닝 영상에 빠져들었던 영진은 급히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했다.
간단한 손바닥 스캔에 이어 아이피 인증 등 몇 단계의 본인 확인 절차가 이루어진 뒤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어둑어둑한 창고였다.
흡사 모든 것들이 사라진 삼화 실업의 공장 내부가 생각나게 하는 것 같은 그런 장소였고 그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허공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