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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직 캐릭터를 생성하지 않으셨군요?
캐릭터 생성 퀘스트의 준비가 되셨다면 오른쪽 버튼을 눌러 주세요.

영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내 목소리를 따라 버튼을 눌렀다.
“캐릭터를 만드는 데도 퀘스트가 필요하다고? 뭐가 이래.”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하면 캐릭터를 만들지 못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그러려니 싶었다.
“뭐, 퀘스트가 있다고 해도 튜토리얼처럼 기본적인 걸 가르쳐 주는 그런 퀘스트겠지.”
세상의 어떤 게임이 유저가 게임을 하겠다는데 캐릭터도 못 만들게 하겠는가?
별생각 없이 열린 공간으로 들어선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
“…….”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동굴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다기보다 조금 붉다 싶은 동굴 안은 입구가 막혀 있었다. 동굴을 살피던 영진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들어차 꿈틀거리고 있는 매끈하고 말캉거리는 느낌의 것들…….
그것은 어찌 보면 징그럽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남자로 태어난 그에게 있어 아주 기본적인 교육만 받았다면 싫어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인 바로 그것들이었다.
“정플!”
그제야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붉고 어두운 동굴과 사방에 대기한 꾸물거리는 녀석들. 그리고 우 상단에 떠올라 있는 의문의 분수까지 보고 나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120,142,391 대기 중.

“저, 정플이라는 것이 그것의 줄임말이었던 건가!”
정자 플레이.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하던 정플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경악으로 입을 쩍 벌린 영진은 자신의 몸 역시 주위에 들어차 있는 녀석들과 똑같은 형태에 팔다리만 추가된 것임을 확인했다.
동시에 들려오는 안내 목소리와 함께 생겨난 창이 그의 짐작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퀘스트 <위대한 탄생>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세상의 빛을 보기 전부터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싸워 자신을 증명해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어머니인 레니아의 자궁에선 오늘도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잉태되고, 사라짐을 반복합니다. 그 안에선 여러 신들이 태어났고, 수많은 종족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신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빛을 보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싸워 이겨야만 또 다른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헤엄치세요!

이 험한 바다에서 당신을 구원해 줄 안식처를 찾아내세요.
그리고 이루세요.
당신의 승리는 그토록 원하던 세상의 빛으로 당신에게 보답해 줄 것입니다.

퀘스트 충족 요건 : 랜덤하게 생성되는 당신의 경쟁자들을 이겨 내고 가장 처음으로 수정에 성공한다.
수정 방법 : 머리 부위의 첨체를 이용해 난자의 표면 점막을 녹여 낼 수 있다. 가장 처음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성공이다.

준비가 되셨다면 오른쪽의 버튼을 누르세요.
버튼을 누른 뒤엔 두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차단됩니다.

“아니 뭐 이딴 게 다 있어?”
당장 그만두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호승심이 생겨났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 한번 해 본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찬양까진 아니더라도……. 해볼 법하군.”
왜 에니티의 유저들이 자신들의 캐릭터에 애착을 넘어 집착까지 갖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진리의 정플!
이것을 성공해야만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후우.”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 영진은 무리의 선두 그룹에서 조금 뒤쪽으로 자리를 잡은 뒤 두 손을 까닥거렸다. 아무래도 가장 앞에 있으면 오히려 불리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스무스한 허리놀림에 이은 강력한 헤드뱅잉.’
문득 기억난 댓글, 누군가 말한 비법이라는 것이 우스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다시금 긴장한 얼굴로 정면의 막힌 동굴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앞은 보이지 않은가?
보이지도 않는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이, 일단 한 번 가 볼까?”
준비 자세를 취한 그는 주저 없이 오른쪽 버튼을 눌러 퀘스트를 시작했다.
버튼을 누르자 예고했던 것처럼 두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고, 그는 재빨리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움직인 건 아니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야아, 아? ……으아아!!”
시작과 동시에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후방의 거센 물결, 마치 쓰나미와 같은 해일에 그의 경쟁자들과 뒤섞여 열린 동굴 너머로 무섭게 떠내려갈 뿐이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그냥 엔피씨일까, 아님 다른 유저들일까 같은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벌써 정신을 차린 선두 그룹은 저만치 앞으로 달려, 아니 헤엄쳐 가고 있었다.
꾸물거리는 길쭉한 꼬리가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웃기지 마라!”
사납게 소리치며 자세를 바꾼 그는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경쟁자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1,402,143 / 120,142,391 진행 중.

흘깃 본 현재 순위는 너무나도 암담했다. 전체 순위로 보자면 양호한 점수지만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퀘스트는 단 1등만 살아남기 때문이었다.
“음?”
허리를 흔들던 도중 옆을 보니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게이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헤엄칠수록 게이지가 떨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기에 혹시 체력 게이지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문득 옆이나 앞에서 헤엄치던 수많은 경쟁자들이 지쳐 버린 건지 죽어 버린 것인지 하나둘 픽픽 쓰러져 나뒹구는 것을 확인하자 더욱 심증이 굳어졌다. 체력 게이지가 확실하다!
현재 얼마나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체력은 이제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에엥?”
멀리 전방으로 보이는 광경.
거대한 광장의 극단적인 양쪽으로 뚫려 있는 갈림길. 이미 그곳에 도착한 선두 그룹 일부는 우물쭈물하며 가운데 멈춰 있었고, 일부는 마음을 정했는지 둘 중 하나를 택해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배웠던 짤막한 성지식이 떠올랐다.
남자가 두 개인 것처럼 여자 역시 두 개라는 것!
아마도 달마다 한쪽씩 번갈아 가며 난자를 배출한다는 것까지 기억나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느 쪽이냐고!”
실컷 고함은 치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오른쪽으로 결정하고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왠지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그의 찝찝한 예감은 역시나 들어맞았다.

하하하, 퀘스트 실패! 태어나기 힘들겠네요.

최종 순위 500,905 / 120,142,391

엉뚱한 동굴을 헤매다 체력 게이지가 바닥나 버리자 실패로 종료되는 퀘스트였다.
그대로 눈앞이 컴컴하게 변하더니 분명 놀리는 것으로 들리는 남자 목소리와 더불어 멋들어지게 꾸며진 창 하나가 전면에 떠올라 흔들거렸다. 그곳에는 영진이 마지막에 달성한 순위가 적혀 있었다.
안내 음성도 그것대로 굉장히 기분을 긁어 놓는 것이었지만 앞에서 흔들거리는 순위 창 역시 속을 박박 긁는 무언가가 있었다.
흔들리던 순위창이 사라진 후 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출발하기 전의 풍경, 정면의 ‘재도전’과 ‘다음에 하기’라는 두 선택지였다.
“태어나기 힘들겠다고?”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재도전을 후려쳤다.
“당연히 재도전이다!”
중독성이나 경쟁심리 같은 건 어느 게임이나 같지 않나 생각하던 그는 최초 퀘스트에서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퀘스트 실패!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있는 걸까요?

최종 순위 4 / 154,920,391

“크아아악!”
광분하며 소리쳤다.
캡슐에 방음 기능이 있지 않았다면 옆집에서 신고라도 할 법한 목청이었지만 짜증이 섞여 있진 않았다.
왠지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조금씩 오르는 순위 또한 그것을 반증했다.
갈림길에서 50대 50의 확률만 이겨 낸다면 그럭저럭 성공의 문턱까지는 무난하게 갈 수 있을 정도.
그것은 그가 얻어 낸 몇몇 노하우, 이른바 꼼수들 덕분.
“으음.”
최초 그는 선두 그룹의 두어 마리 튼실하게 생긴 녀석들의 꼬리에 자신의 꼬리를 묶고 출발해 보았다.
꽤 괜찮은 방법이고, 일단 중간 지점까지는 체력의 고갈 없이 갈 수 있었지만 반대로 녀석들이 지쳐 죽어 버리기 때문에 묶인 꼬리를 풀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작하고 나면 두 손을 사용할 수 없기에 몸통을 꿈지럭대며 꼬리 매듭을 푸는 노하우를 익히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또 하나는 최초의 배후폭발(?)에서 오는 추진력을 온전히 얻기 위해 퀘스트 시작과 동시에 펄쩍 뛰어오르는 것. 그것은 그런 대로 효과가 있어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장애물 회피만 잘하면 선두로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플을 하면서 얻어 낸 나름의 노하우는,
‘정말 중요한 건 헤엄이 아니라 수정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정도 노력한다면 난자까지 이르는 과정은 그럭저럭 이행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바로 수정! 난자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해도 가장 먼저 수정에 성공해야만 1등이 되는 것이다.
수십 수백의 정자들이 한 난자를 둘러싸고 강렬한 머리 비비기로 표면을 녹여 낸다. 그것이 진정한 승부인 것이다.
그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 하고 있었다.
애초에 난자까지 이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가정을 세워 상위 그룹만 유지하고 체력을 조금 더 보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의 예상은 그럭저럭 들어맞았다.
점막을 녹이기 위한 헤드뱅잉 역시 적지 않은 체력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그곳까지 잘 왔는데도 지쳐 죽어 버리는 녀석들 역시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