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
아아, 퀘스트 실패! ……포기하면 편해. 하지 마.
최종 순위 15 / 154,920,391
“빌어먹을!”
영진은 고함을 내지르며 그동안 쌓아 온 모든 노하우를 총동원했다. 자그마치 150회가 넘는 재도전이었다.
처음 에니티를 접한 지 벌써 3일 동안 정플만 하고 있었다.
일일 시도 횟수는 60회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
정플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센터에 가는 걸 잊어 버렸던 영진은 하루 지난 어제 다녀와 발악을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센터에서의 상담 결과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5달간 보험료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참작이 되어 별다른 트집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의 적립금을 일시불로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조금 실망이라면 실망이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었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센터에서는 보험 가입자가 실업하게 될 경우 적합한 다음 일자리에 연결해 주는 일 역시 해 주는데, 영진의 경우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과 교육 이수 수준에 따른 직장을 소개시켜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취업까지 이끌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취업할 때까지의 기본적인 생활비는 센터에서 매달 지급된다고 했다.
액수를 보니 월 50만 원가량. 그가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보험료를 제외하고 딱 먹고 살았던 만큼의 액수였지만 그 수준대로만 생활을 유지하면 부족하진 않을 것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센터와 연결된 구직자는 별도의 구직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진을 도와주는 센터는 정부 산하의 공기업이었지만 시중에는 사설 센터들 역시 많이 있었다.
센터 직원의 말은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 역시 많고 가지각색의 사연과 형편들이 있는데 생활비를 받고 있으면서도 일자리를 구하려 하게 되면 형편이 좋지 못한 다른 구직자들이 피해를 본다.’라는 이유였지만 온전히 수긍할 만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확실한 것은 생활비를 받는 동안은 그저 쉬면 되는 것이고, 무리해서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구하려 하거나 구했을 경우엔 보험 적립금에서 손해를 보거나 신용등급이 낮아진다는 것.
쉽게 말해 ‘일자리는 알아서 찾아다 줄 테니까 그동안 조용히 쉬고 있어라’쯤 되는 이야기였다.
영진은 각 센터간의 일자리 나눠 갖기를 의심했지만 일자리를 구할 동안 생활비를 준다고 하니 더 따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기간이 얼마가 되던 그에게 맞는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쉬어도 된다는 것이 내심 기쁘기도 했다.
무위도식.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비록 딱 굶지 않을 만큼의 생활만 유지되겠지만 13살 이후 공장 일을 해 온 5년 동안 2박 3일의 연차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고, 가끔 있는 비번 외엔 별다른 휴식 기간이 없었기에 우연찮게 찾아온 휴가가 꿀맛 같은 것이었다.
다만 지금껏 공장과 집만 오가던 생활을 한 탓에 별다른 인간관계도 만들어 두지 못했던 그는 딱히 쉬는 동안 할 것이 없었다.
같은 처지의 공장 직원들은 모두 그처럼 센터의 도움을 받거나, 보험을 들지 않아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었고 가장 친했던 명훈은 부모의 가게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휴대전화라는 것도 처음 가져 보는 영진이었다.
센터에서 지급하는 생활비에 휴대전화 대금도 포함되었고, 그쪽에서도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편할 거라고 ‘조금 강하게’ 조언했기에 공짜라는 핑계로 꽤 옛날 모델이긴 했지만 그의 기준으로는 제법 쓸 만한 전화기를 한 대 구입하게 되었다.
그렇죠! 퀘스트 실패! 짐작했던 대로네요!
최종 순위 403 / 154,920,391
조금 흥분한 영진은 좋아지고 있던 최종 순위가 다시금 퍽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고함을 지르지도, 인상을 구기지도 않은 그는 그저 차분하게 재시작을 기다리는 모습이 그 전과 무언가 달랐다.
“…….”
가만히 주위를 돌아본 그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의 제한 횟수까지도 이제 열 번이 채 남지 않았어.’
그렇다. 성급하게 재도전을 반복하던 사이 벌써 그렇게 된 것이다. 영진으로서는 성급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무모할 만한 시도도 있었고, 무턱대고 행한 것도 있었다.
물론 게시판에서 하는 이야기로는 천 번을 넘게 하고도 성공하지 못해서 계정비만 나가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 정도까지 할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법도 했다.
“내가 한 횟수만 해도 170번이 넘으니까.”
정플을 한 번 하는데 드는 시간은 길면 5분 정도. 하루 60번이라 계산해 보면 일찍 끝난 것들까지 따져 평균을 내더라도 보통 4시간은 플레이했다고 할 수 있다. 정플만 하루에 4시간인 것이다.
“딱히 지루하진 않던데.”
어쩌면 이런 게임을 처음 해 보았기 때문에 느껴지는 흥미일지도 모르지만 삼 일을 죽어라 정플만 하면서도 지겹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진리의 정플이라 하는 것일 수도.”
바보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영진은 그래도 정플만 주구장창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굴을 고쳤다.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을 거다.”
그는 가장 안타깝게 실패했던 3위와 4위 등 몇 번의 경험을 되새겨 보았다. 눈앞에 여전히 ‘재도전’과 ‘다음에 하기’라는 선택지가 떠올라 있었지만 쉽게 손을 올리지 않았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내 주겠다.”
결의를 다지고 나니 왠지 모를 힘이 생겨나는 것도 같았다. 영진은 그 느낌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서둘러 자신의 모든 것을 펼칠 준비를 했다.
1 / 109,239,218 대기 중.
‘조금 적군.’
가장 적었을 때는 8천만 마리까지 갔었던 적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따지면 적은 편이었다.
영진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울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이것은 전혀 엉뚱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가 정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방법. 하지만 상상을 실제로 행하기엔 너무나 무모할 만치 고생스러운 방법을 그는 이를 악문 채로 꿋꿋하게 행하고 있었다.
“징그러운 녀석들.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어쩌면 중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다. 전부 다 해 버리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
“…….”
그는 현재 대기하고 있는 다른 정자들의 꼬리를 한 쌍씩 서로 묶어 버리고 있었다.
분명 다른 정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인공지능이었고, 자신들의 꼬리가 서로 묶이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현재 두 팔과 다리가 있는 정자는 영진 혼자였으니 일단 제대로 묶어 버리면 절대로 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그 수에 있었다.
1억 마리. 그나마 뒤를 잘라서 1억이지 1억 9백만이 넘는 숫자였다.
둘씩 묶는다고 쳐도 5천만이 넘는 꼬리를 묶어야 한다.
하루 종일로는 모자란, 어쩌면 며칠 이상 풀타임으로 그 작업만 해도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되겠지.”
하지만 그는 한다면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두어 시간 만에 포기한 그는 자신이 묶은 선두 그룹의 정자들을 돌아보았다.
대략 5백 쌍, 천 마리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럭저럭 많다면 많을 수도 있지만 1억에 비춰 보면 너무나 초라한 숫자다.
그는 선두열의 꼬리가 묶인 천 마리 가량의 정자들을 보며 문득 어렸을 적에 보았던 어느 중학교의 운동회에서 학생과 가족들이 한쪽 다리를 묶고 달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아마도 퇴근하는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친척들이 웃고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
“새삼스럽게 그런 게 떠오르네.”
좋은 기억은 이제부터 만들어 가면 되지 않나.
어려서부터 수없이 되뇌며 마음을 추스르던 주문이지만 의외로 좋은 기억은 말처럼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18살이 된 지금에 생각해 봐도 웃을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게 몇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흐음.”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재미없는 생각을 치워 낸 그는 뭔가 다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선두열의 매듭을 묶은 정자들을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생각이었고, 그것은 의외로 쉽게 결정되었다.
“타고 가자.”
현재 매듭이 묶인 정자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꾸물거리며 선두 그룹에 뭉쳐 있는 상황이었다.
맨 앞에서부터 묶으면서 뒤쪽으로 가던 것이었으니 당연한 모습이었고, 그나마 풀리거나 끊어지는 것을 염려해 끝부분을 묶은 것이 아니라 머리 가까이 바짝 묶어 버린 터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꿈틀거리고 있었다.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대로 후폭풍이 불면……. 이쯤 있으면 제대로 타고 갈 수 있겠군.”
어느 정도 위치를 잡은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올려 재도전을 선택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