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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은 묵직하고도 폭발적인 파도가 뒤에서부터 몰아쳐 와 1억 마리의 정자들을 후려쳤고, 앞쪽에 있던 영진은 퀘스트 시작과 동시에 훌쩍 뛰어오르는 것으로 두 다리의 역할을 끝냈다.
뭉쳐 있던 매듭지어진 정자들이 그 파도에 휩쓸려 두어 개의 커다란 공 형태로 되는 것을 확인하고 그중 하나의 앞에서 고스란히 그 힘을 전해 받은 그는 주위를 보았다.
“이건 그렇게 멀리까지 가진 못할 테지.”
원래 이론대로라면 모든 정자들을 매듭지어 놓고 난자를 독차지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초반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면 그런 대로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의외로 뭉쳐 있는 정자들이 초반 파도에서 얻은 추진력이 좋아서 중앙광장 가까이 갈 때까지 별다른 힘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다시 하라면 못해. 안 해.”
말이 두어 시간이지 그 미끈거리는 꼬리들을 묶는 것도 고역이었다. 차라리 실패해도 그냥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 시도였다.
현재 그에게 중요한 것은 50대 50의 확률. 과연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평균을 내 보면 내가 시도했던 숫자 중 60퍼센트 넘게 왼쪽이었고, 40퍼센트가 조금 안 되게 오른쪽이었어.”
그는 뭉쳐 있는 정자들의 추진력이 조금 약해지자 주저 없이 몸을 날려 홀로 허리를 움직였다.
“평균을 믿어 왼쪽? 아니면 오히려 평균은 50이어야 하니까 모자란 오른쪽?”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가 내린 선택은 왼쪽. 그 이유는 그동안 이런 식으로 수없이 평균을 따져 봤지만 계산해서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냥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길로 가는 것이었다.
1 / 109,239,218 진행 중.
완벽한 선두. 그것도 선두 그룹보다도 훨씬 앞서는 선두였다.
‘이대로만 가면 확실한 성공을 장담할 수 있다!’
체력의 안배도 필요 없이 광분의 레이스를 펼치던 영진은 문득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
평소대로라면 난자를 만났어도 벌써 만나 반갑게 머리를 부벼야 정상인 시간인데 난자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2 / 109,239,218 진행 중.
그 순간 현재 순위가 한 칸 내려갔다.
“젠장, 오른쪽이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하는 영진!
평소의 그였다면 그냥 포기하고 다음번을 노렸겠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왠지 모를 오기와 억울함이 그의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소파에 누워 허리를 파닥거리는 것은 아니고 뇌파를 통해 그렇게 상상하는 것을 적용할 뿐이지만 머릿속으로는 실제 허리를 움직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었기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현재 거의 바닥난 체력 게이지만큼 지쳐 있는 상태였지만 그는 점점 떨어져 가는 순위에도 절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수십 마리의 정자들에게 둘러싸여 구애의 헤드뱅잉을 받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리 비켜―!”
딱히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의 순위는 이제 50위 아래로 떨어져 있었고, 지금 와서 들이대 봐야 글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지만 문득 앞을 바라본 그의 눈앞에 구멍을 거의 다 뚫은 것 같은 한 녀석이 보인 것이었다.
‘에니티의 세계에선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문득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평생 할 일도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동작을 상상했다.
온몸 회전 돌진! 롤링 어택!
머리를 중심으로 드릴처럼 회전하며 찔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몇몇 댄서들의 헤드스핀을 상상하며 몸을 잔뜩 웅크린 그는 노리고 있던 그 녀석이 파고 있는 구멍을 목표로 하고 몸을 쭈욱 펴며 필사적으로 회전했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발악 같은 것이었고, 제대로 되더라도 그 구멍으로 머리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그저 잘되면 노하우 하나 더 얻은 거라 생각해 볼 뿐이었지만 왠지 이번 시도는 전력을 다한 기분이라서 실패하게 되면 오늘 제한을 다 못 채우고 쉬러 갈 것 같았다.
1/4가량 남아 있던 체력이 퍽하고 사라져 버렸다.
“끝이군…….”
영진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마도 롤링 어택이 소모하는 체력이 엄청난 것 같았다.
‘그래도 필살기 하나는 깨우쳤군. 좋은 시도였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별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두 눈을 떴다.
그곳엔 그동안 보아 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창 하나가 떠 있었다.
퀘스트 <위대한 탄생> 성공!
당신은 아버지의 최고의 정자였군요!
그동안 줄기차게 놀리던 남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왠지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그저 고된 공장 일을 끝내고 퇴근한 것과 비슷한 홀가분함만 느껴졌다.
퀘스트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총 173회의 시도 끝에 성공하셨으며 이 기록은 현재 10,53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가장 높은 순위의 기록은 총 5회 시도 끝에 성공한 유저입니다.
이후에 들려온 것은 처음 퀘스트를 안내해 주던 여자 목소리였다.
그렇게 못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에 웃음을 짓던 그는 뒤에 들려온 1위의 시도 횟수가 5번이라는 것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가대표 수영 선수라도 되나?”
어쩌면 헤드스핀을 할 수 있는 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쩌면 수영을 잘하는 댄서일지도. 이런 나름의 추측을 이어 갈 즈음 다시 한 번 같은 목소리의 안내가 이어졌다.
에니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 접속했을 때도 들은 것이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야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울컥 가슴을 채웠다.
“난 아버지의 최고의 정자였으니까.”
사막의 쌍둥이
찌는 듯한 태양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함이 아닐까?
태양과 그의 사이엔 아무 장애물도 없었다. 구름도 없고, 변변찮은 모자조차 없었다.
“…….”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모래사막. 이곳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보통 상상하는 선인장이 아니라 두 명의 사내였다.
한 사내가 침착한 얼굴로 말없이 사방을 돌아보고 있는 반면 다른 사내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뭔 개고생이야. 시작부터.”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사내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했다.
“너무 불평하지 마, 형.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겠지.”
무척 상반된 성격을 가진 것 같은 둘의 외모는 예상외로 굉장히 닮아 있었다. 닮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흡사한 외모.
그렇다. 그들은 쌍둥이였다.
“제길.”
그리고 연방 투덜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진이었다.
정플을 성공하고 나서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170번이 넘는 시도 끝에 성공했던 터라 그 만족도는 더욱 큰 것. 그만큼 그 뒤에 올 에니티라는 게임에 대한 기대감 역시도 충만해져 있었다.
캐릭터 설정에 들어가겠습니다. 현재 스캔된 실제 생김새에서 1~4등급까지 변형을 가할 수 있습니다. 1등급은 25% 변환, 2등급은 50% 변환, 3등급은 75% 변환이며, 4등급 변환은 모든 생김새를 유저가 직접 꾸미는 것입니다.
그의 전신을 스캔한 후, 안내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한 사람의 모습이 자신과 똑 닮았다는 것을 확인한 영진은 스스로의 알몸을 그렇게 만족스럽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은 얼굴로 이리저리 회전시켜 보며 감상했다.
“일단 1등급 정도 변환을 해 볼까?”
1등급, 25%변환 실행합니다. 만족스럽지 않으실 경우 재변환이나 취소, 혹은 특정 부위의 직접 설정을 하실 수 있습니다.
잠시 울퉁불퉁 꿈지럭거리는 자신의 몸을 보며 조금 눈가를 찌푸리던 영진은 몇 초 뒤 변화를 멈춘 몸을 보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럭저럭 다르긴 한데, 25%라서 잘 모르겠네. 2등급 변환으로 더 가 봅시다. 가상인데 실제 몸대로 하는 건 재미가 없지.”
2등급, 50%변환 실행합니다. 부연 설명은 1등급과 동일합니다.
또 한 번의 육체 변화에 이어, 이번엔 좀 더 바뀐 생김새의 남성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170대 후반인 그의 키보다 조금 더 큰, 180이 약간 넘는 키에 그럭저럭 군살 없는 몸매의 사내는 딱히 근육이 돋보이는 몸은 아니었다.
실제의 그는 오랜 공장 일로 나름 튼튼한 몸을 갖고 있는데 보통 ‘노가다 근육’이라고 말하는 몸과 비슷했다.
“그래도 나쁜 몸은 아니군.”
얼굴 생김새는 그럭저럭 본인의 얼굴에서 큰 변화는 없었다. 얼핏 보면 비슷할 그런 수준의 변화.
짧은 스포츠형의 머리와 짙지도 옅지도 않은 눈썹. 조금은 유순해 보이는 눈매와 평범한 콧날, 굳게 닫힌 입술.
“뭐, 그럭저럭 잘생겼군. 원판이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 말이야.”
물론 본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