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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설정된 대로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예. 이렇게 갑시다.”
2등급 변환이 실행된 캐릭터 설정을 저장 및 전송했습니다. 다음으로 캐릭터의 이름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이름? 한영진.”
실제 이름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시게 되면 익명성에서 손해를 보실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익명성.
그렇다. 그는 1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테스트용 게임을 하던 버릇대로 본인의 이름을 말했던 영진은 딱히 생각해 둔 이름이 없었기에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은 없었다.
“추천해 주는 이름 같은 건 없나?”
이름 무작위 추출기가 있습니다. 원하시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 좋네. 한번 봅시다.”
옆에 떠오른 큼직한 기계는 카지노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롯머신이었고, 별도의 안내가 나오진 않았지만 영진은 옆에 달린 레버를 아래로 철컥 당겼고 안에서 무언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니터에는 하얀 것들이 돌아가고 있었고, 잠시 후 멈춰선 그곳엔 ‘시라서스’라거나 ‘미하일’, ‘젠스턴’ 같은 그냥저냥 어디서 나왔을 법한 이름들이 생겨나 있었다.
“아무거나 해도 될 것 같은데 왠지 더 당겨 보고 싶네.”
영진은 다시금 레버를 당겨 다른 이름을 기다렸고, 그 뒤에 나온 이름 중 하나를 보았다.
“두 글자 이름이 아직 남아 있었나?”
눈에 들어온 이름은 ‘케이’. 왠지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기에 그것을 선택한 그는 뒤이은 안내에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네임 <케이>, 설정되었습니다. 퍼스트네임의 경우 게임상으로 동명이인이 가능합니다. 라스트네임을 설정해 주십시오. 라스트네임은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케이…… 케이 한.”
영진은 조금 생각해 보다가 그냥 현재의 성을 그대로 써 보기로 했다. 복잡한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얼른얼른 캐릭터를 만들어 접속해 보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것이다.
다행히도 ‘한’이라는 성의 유저는 없었는지 캐릭터 설정이 이상 없이 되었다는 안내와 함께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우우웅―
눈에 보이는 것은 광활한 우주.
“…….”
영진은 육체 없이 우주를 떠도는 상태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많은 터널과 항성을 지나 한 공간에 멈추는 광경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지루하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잘 만들었네.”
순수한 감탄.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몇 개의 행성들이었고, 중심엔 커다란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실제 살고 있는 태양계와 유사한 모습. 각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일정한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있었고, 그는 그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중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어떻게 구현했는지 알고 싶을 만큼 무척이나 인상적인 느낌이었다.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굽어보는 느낌은 다름 아닌 그의 위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내 아들아.]
중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엔 아주 커다랗고 아름다운, 잘은 모르겠지만 정확한 구체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잡티 없이 동그란 에메랄드빛의 별이 하나 떠 있었다.
“예?”
아주 천천히 자전하고 있는 그 별의 주위엔 마치 심복이라도 되는 양 수많은 작은 별들이 각자의 빛을 발하며 가까운 궤도로 공전 중이었고, 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마도 우주의 신이라는 존재가 바로 저 별이 아닐까 싶었다.
문득 그는 들려오는 말에 응? 하고 다시금 그쪽을 향했다.
[너는 부정하다.]
“엥?”
그가 알고 있는 부정과 지금 듣게 된 부정이라는 말이 같은 뜻일까? 영진은 현재 육체가 없는 상황이라 표정을 보일 수 없었지만, 실제 얼굴은 무척 황당해하고 있었다.
[너는 정당한 자격 없이 빛을 손에 쥐기 위해 부정한 일을 했다.]
다음에 이어진 말과 함께, 우주 공간 한편에 커다란 스크린이 생겨나며 영상이 펼쳐졌다.
아아, 그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걸었던 마지막 정플에서의 모습이었다.
“…….”
그리고 화면이 분할된 스크린 속의 그는 열심히 다른 정자들의 꼬리를 묶고 있거나, 수정에 거의 성공한 정자가 파 놓은 구멍으로 헤드드릴을 감행하고 있었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약간 뿌듯한 마음으로 구간 반복 중인 헤드드릴 장면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갔네.”
보아하니 원래 파고 있던 정자와 휘돌며 엉겨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필사적으로 싸우듯 배배 꼬여 엉기던 정자 두 마리가 퀘스트가 성공한 이후에도 그렇게 난자 속에서 한참이나 싸움을 이어 가더니, 문득 어딘가에서 쏘아진 밝은 빛을 맞고 한 마리로 합쳐져 버린 것이었다.
이어 한 마리가 된 빛나는 정자는 여전히 빛을 뿜어내며 그것을 품은 난자를 사납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성교육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뭐지?”
난자의 내부를 비춰 주던 화면이 그 바깥으로 바뀌었다.
정자를 하나로 합쳤던 빛은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난자한테까지 퍼져 한참을 흔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쿠쾅, 하는 낮은 폭발음과 함께 난자를 둘로 쪼개며 차라랑― 하는 효과음을 발했다.
[너의 부정 때문에 또 다른 나의 아들들이 죽음을 당하였구나.]
해당 상황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던 중 뒤이은 목소리와 함께 전환된 화면엔 꼬리가 묶인 채로 서로 뭉쳐 지쳐 죽어 버린 정자들이 보이고 있었고, 영진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 위를 향했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모든 것을 쥐어짰을 뿐이다.
5백여 쌍의 꼬리를 묶기 위해서 그가 투자한 시간 역시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큰 노력이었다.
“물론 묶지 않았어도 헤드드릴을 안 이상 다시 해도 금방 성공할 거라 장담합니다. ……다시 시키진 말고.”
당당하게 말하다 뒤에 가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십여 초가 지난 후였다. 인공지능이 뭔가를 연산한 것일까? 영진은 설마 정플존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아닐까 속이 탔다.
[아들아. 네가 피하려 했던 시련은 너의 시작과 함께 찾아올 것이니, 너는 부정한 너의 탄생을 그 시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니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가만 들어보니 정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도 좀 찝찝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현재로써는 마땅히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거라. 너의 세계로.]
그 말과 함께 그는 눈앞에 있던 태양계로 이끌려 가기 시작했고, 지구를 닮은 푸른 별의 대기권으로 들어가자 찬란한 빛으로 시야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에니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 위치는 무작위로 지정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고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그럼 무운을 빕니다.
기본적으로 에니티는 불평등을 베이스로 하는 게임이다. 마치 실제 사회와 같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남과 다르다.
태어남과 동시에 사는 곳도, 형편도 달라진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캐릭터 자체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불평등을 꼽으라면 바로 저 ‘시작 위치 무작위’를 들 수 있다.
지난 며칠 전반적인 게임 노하우에 대해 알아보고자 공식 사이트와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던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에서 시작하게 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외딴 산골마을에서 게임을 시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후하고 착한 엔피씨를 만나 이런저런 도움을 받아 초반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사기꾼 엔피씨를 만나 시작부터 쪽박을 찰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현실만 하겠나.”
영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게임. 현실의 불평등과는 그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지금 서울의 특정 지역은 자체적인 치안 조직이 있을 정도로 부자들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일정 거리는 자체 제작한 그들 고유의 식별표를 갖고 있어야만 진입할 수 있는, 그야말로 귀족들의 도시였다.
영진으로선 들어보기만 했을 뿐, 꿈꿀 수조차 없는 그런 곳 말이다.
“…….”
하지만 빛 무리에 휩싸였다가 시력을 회복한 이후 처음 에니티의 세상을 접한 그는 방금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막.
끝도 없는 사막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깔끔하고, 태양은 그를 말려죽일 작정인 듯했다.
케이는 서둘러 옆에 떠오른 게임 시작 설정창을 읽어 보았다.
<케이 한의 탄생>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의 빛을 꾀한 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는 한씨 성을 가진 집안의 케이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부정한 태생은 그의 삶을 어지럽혔고, 이제 그는 일가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이 되어 머나먼 동방의 사막까지 이르러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할 뻔했던 쌍둥이 동생 레이 한만이 망가진 형의 인생을 돕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켜 줄 뿐이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은 케이 한에게 첫 번째 시련이 될 수도, 마지막 시련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따스한 모래가 그와 불쌍한 동생의 무덤으로 어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레니아의 아들이여!
부디 태생의 부정을 씻고 다시금 세상에 거듭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에바레스 대륙에 그대의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기를 빈다.
호칭을 획득하였습니다.
<태생이 비겁한>
호칭 획득에 따라 스킬을 배웠습니다.
<액티브 스킬 ‘구차한 임기응변’>
“이건 뭔…….”
그제야 옆에 있던 존재를 깨닫고 고개를 돌린 케이는 잔뜩 흥분한 자신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연방 주위를 살피고 있는, 그와 흡사한 외모의 사내를 발견하고 눈썹을 오므렸다.
“왜 그래, 형?”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케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레이 한’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금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
케이는 시작 설정창에 다음 페이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뒤로 넘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