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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풍덩.
“음?”
그때였다. ‘풍덩’ 소리와 함께 소란스런 음성이 영진이 지나쳐 온 연못에서 들렸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뛰어들지 않고 있었다.
“어쩐대.”
“그러게. 어쩌지.”
연못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머리를 슥 들이민 영진의 눈에 연못 가장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부모와 함께 연못의 잉어에게 물고기 밥을 주고 있던 아이였다. 아이의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연못의 수심은 1미터 50센티미터로 낮았지만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에게는 낮은 깊이가 아니었다.
‘위험하다.’
단순히 그 생각 외엔 없었다. 같이 왔던 부모도 보이지 않았고, 둘러싼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
정신을 차렸을 무렵, 그는 이끼와 물풀 따위로 엉망이 된 아이를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안아들고 있었다.
“비켜요!”
모여든 사람들을 밀치며 자리를 만든 영진은 아이를 바닥에 눕혔다. 다행히 아이는 물만 토해 냈을 뿐 정신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혜미야!”
그제야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각각 양손에 들고 오던 아이의 부모가 놀라 달려왔다.
이름이 혜미야?”
“……응.”
더는 토할 것이 없는지 허리를 펴고 그를 올려다본 여자아이는 달려온 부모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혼자 두시면 곤란하지요.”
영진은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는 검은 양복의 신사를 향해 말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으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한 영진의 말투는 무척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식을 함부로 방치하는 부모에 대한 반감도 섞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 오빠한테 잘 데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아이 엄마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은?”
문득 울음을 그친 혜미라는 아이가 한 말에 아이를 달래던 아빠는 문득 멀찌감치 바닥에서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빠가 다시 사 줄게. 이번엔 아빠랑 같이 가자.”
“응.”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는 딸의 손을 잡고 일어서더니, 문득 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얼마 안 되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영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신사는 극구 거절하는 그의 주머니에 억지로 돈을 넣어 주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얼마 안 되지만 세탁 비용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
그 뒤에 내민 것은 그의 명함이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시면 이 은혜를 갚아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예.”
일단 명함을 내미는데 안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돈은…….”
“그럼 이만.”
다시 주머니로 손을 넣으려던 영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뒤에 서둘러 딸을 데리고 가는 양복 신사의 뒤만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쫓아가서 돌려주기도 어색한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돈 때문이 아닌데 말이지.”
중얼거리던 영진은 왼손에 들고 있던 명함으로 눈을 돌렸다.
(주)대한물산 경비실장 강 국 진.
멋들어진 회사 로고와 함께 적혀 있는 직함과 이름은 왠지 모를 부러움이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들어 본 적은 없는 회사였다.
영진은 반바지고 뭐고 다 젖은 상태라서 명함을 넣을 곳이 없어 그냥 왼손에 든 채로 집으로 향했다.

“헉!”
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돈뭉치는 빳빳한 수표들이었다.
“하나, 둘, 셋, 넷……. 실수로 준 건가?”
뭔가 좀 묵직하게 넣어 준 것 같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거절하느라 바빴기에 뭘 넣어 주는지 알지 못했던 그는 열 장이 넘는 수표들을 보며 놀람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1백만 원 수표가 열두 장……. 분명히 실수일 거야.”
그는 서둘러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경비실입니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낮고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남자 목소리. 영진은 낮게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꺼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오늘 명함을 받게 되었는데 그분께 연락을 드려야 할 일이 생겨서요. 혹시 그쪽 개인 전화로 연결을 하거나, 번호를 알려 주실 수 없을까 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수화기 너머로 음성이 들려왔다.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딱딱하게 묻는 목소리에 주눅이 든 영진은 우물우물 대답했다.
“아, 명함에는 ‘주식회사 대한물산’의 ‘경비실장 강국진’ 님으로 적혀 있습니다.”
―누구라고요?
“예? 아, 강국진 님 말입니다. 경비실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조금 억양이 변한 듯한 사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어딘가로 별개의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1분 이상을 기다리고 나서야 다시금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공원에 계셨던 분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연결 가능할까요?”
―현재 직접 연결은 무리가 있고, 일단 어떤 용건이신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생각보다 바쁜 일을 하는 회사인 건가? 영진은 문득 생각해 보았지만 그럼 아침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갈 만한 여유는 뭘까 하는 의문만 더해졌다.
“실은 거절하긴 했지만 억지로 주셔서 받게 된 돈의 액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실수를 하신 것 같은데, 자세한 정황은 그분과 통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천이백 만원의 수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예? 네. 맞습니다. 근데, 저…….”
―그것은 큰…… 아니, 실장님께서 전한 금액이 맞습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아니라고요?”
영진은 더욱 크게 놀라 되물었고 상대는 다시금 실수가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실례지만 아까 전엔 경황이 없어 못 여쭈셨다면서 성함을 알아보라 이르셨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이름이요? 아, 제 이름은 한영진입니다. ……한, 영, 진. 예. 맞습니다.”
―예. 한영진 님.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요?
상대의 물음에 조금 얼굴이 붉어진 영진은 꾸며서 답할까 하다 그냥 사실 대로 말했다.
직장을 잃어 센터의 연금을 받아 생활 중이라고 말이다.
―음. 알겠습니다. 자세한 일은 모르겠지만 돈에 대해선 실수가 아닌 것을 아시면 되겠습니다. 더 전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용건은 더 없습니다. 그럼 고생하세요.”
―예. 끊겠습니다.
뚝.
전화는 끊어졌지만 영진은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시선은 떨리는 손에 쥐인 수표 뭉치를 향해 있었다.
“처, 천이백.”
열두 장의 이 종이 쪼가리는 그가 한 푼도 안 쓰고 공장에서 1년을 일해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 돈을 그리 쉽게 척척 꺼내서 주다니!
그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처음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고, 그다음에 드는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딸이었지.”
열 살도 안 된 것 같은 딸.
영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딸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면 당장 주머니에 있는 걸 다 꺼내서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지갑에 천이백 만원이나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이 근방은 빈민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 동네는 더더욱 아니었다. 지갑에 항상 쓸 수 있는 수표가 그만큼이나 있다면 분명히 부자일 텐데 왜 대공원이 아니고 외곽의 시립 공원을?
“모르겠구나.”
부자들의 심리를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지.”
갑자기 거액이 생겨 버렸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어디에 쓰지?”
그는 다시금 수표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 안에 찍혀 있는 0이라는 숫자들이 왠지 실감이 나지 않도록 많았다. 돈이 돈 같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돈은 아니지. 수표지. 아, 수표도 돈인가?”
되는 대로 지껄이던 영진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천이백 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사가 있었다.
“이 방이 5백 만원짜리 전세니까.”
취사가 가능한 방 하나에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이 방은 그가 월세로 살다가 1년 전 5백 만원으로 전세 전환을 한 집이었다.
이 동네가 조금 빈민가에 가까운 터라 방값은 꽤 저렴했고, 매월 관리비와 전기요금으로 10만원가량을 내야 하지만 그것은 현재 센터에서 지불해 주고 있었다.
천이백 만원이면 지금의 전세를 빼고 합쳐서 천칠백. 아마 이 동네 시세대로라면 세 배는 더 큰 방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방이 크면 뭐해. 나 혼자 사는데.”
하지만 딱히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동네가 살기 편하기도 했고, 지금의 집도 혼자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차를 살까?”
천이백 만원이면 그럭저럭 쓸 만한 중고차는 살 수 있을 터. 하지만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차량 관련 보험이나 관리비로 나가는 돈이 적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 역시 영 아니었다.
문득 그의 눈에 띈 것은 자신이 앉아 있는 소파.
“바꿀까?”
천이백이면 요즘 잘 팔리는 상급 캡슐에서 꽤 괜찮은 추가 파츠를 더할 수 있다.
“그것도 좀 그렇다.”
구형이긴 하지만 그의 캡슐 역시 뜯은 지 열흘도 안 된 새것. 몇몇 옵션이 아쉽긴 하지만 바꿀 이유가 없었다.
돈이 생겼는데 쓸 곳이 없다니. 이것만큼 웃긴 일이 있을까?
“저금을 해야겠구나.”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그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저금을 하자.”
그대로 캡슐에 온전히 앉아 덮개를 닫은 그는 부팅 동안 몇몇 중견기업들의 광고가 흘러가고 나서 시작되는 한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많은 컨테이너가 실린 배들이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그 하늘 위로는 회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전용 비행기가 날아가는 영상 뒤로 장엄한 배경음악과 함께 광고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 시대를 열어 가는 글로벌 물류기업. 주식회사 대한물산.
“광고를 하는 회사구나.”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을 뿐, 꽤 큰 회사인 것 같았다. 광고만 아니라 전용 무역기가 있을 정도면 중소기업은 아니라는 이야기.
“경비실장이라.”
아마 회사의 공장이나 물류창고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서가 아닐까 짐작되었다. 어쩌면 그 아래의 경비실 하나를 담당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저렇게 큰 회사니까 경비실 하나를 관리해도 그렇게 큰돈을 버는 거구나.”
막연히 그렇게 생각해 본 영진은 저런 회사의 경비실 하나를 맡으려면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할까 생각해 보다, 결국 저쪽 세계 사람이어야겠지, 라며 쓴웃음으로 생각을 접었다.
“인터넷 연결. 한라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