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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단 퀘스트
에니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익숙한 안내음성이 들린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이것에 질린 사람들이 로그인 안내음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사설 패치를 만들었다던데 왠지 미심쩍어서 받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뭔가 그럴싸한 것을 만들고 그 안에 바이러스나 해킹프로그램을 심어서 유포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형, 이제 왔어?”
모래언덕 위에 앉아 있던 레이가 툭툭 털고 일어나며 인사했다. 레이 캐릭의 경우 케이가 로그아웃을 하면 그 역시 게임상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케이의 계정에 속해 있는 캐릭인 것이다. 다만 접속하게 되면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온 것으로 설정된다.
“가자. 어느 쪽이었지?”
“이쪽.”
케이의 물음에 나침반을 들고 있던 레이가 주저 없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케이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그저 걷는 것으로는 기력이 그렇게 많이 소모되진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력이 바닥나려고 하면 잠시 접속을 종료하고 좀 쉬다가 들어가면 다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현재 며칠을 굶으며 걷고 있었기에 케이도 레이도 둘 다 허기진 상태여서 이동 속도에 약간의 페널티가 가해지고 있었다.
며칠 더 굶게 되면 능력치와 체력에도 페널티가 번져 갈 테고, 점점 더 심해지게 되면 접속만 하고 있어도 체력이 깎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에는 들어가자마자 죽고 재시작하고 죽는 ‘무한 데드의 루프’에 빠지겠지. 케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에니티 커뮤니티에서 이것저것 조사해 본 덕이었다.
부활 포인트를 지정하지 않은 유저는 죽었을 시 죽은 다음 재시작하면 죽었던 자리에서 부활하게 된다.
부활 후 1분은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없는 무적상태가 되므로 적당히 위험에서 벗어날 여유는 있겠지만 허기짐으로 인한 체력 소모는 막을 방도가 없다.
허기로 인한 무한 데드에 빠지게 되면 캐릭 삭제 외엔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뭐라도 나와라. 전갈이라도 씹어 먹어 주마.”
“그건 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레이였고, 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튀겨먹는 나라도 있는데.”
“그런 나라가 있어? 몰랐네. 맛있나?”
“먹을 만하니까 먹겠지.”
전갈 튀김. 아마도 어렸을 적 고아원에서 TV로 보았던 해외 풍물 기행 따위의 프로그램에서 접해 본 것 같다.
무슨 맛일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과 같은 허기진 상태라면 역시 먹어 볼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캐릭터의 허기 상태는 그대로 케이의 뇌에 전해져 비슷한 공복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현실의 그 역시 아침에 먹었던 밥은 이미 소화가 된 터라 약간의 배고픔은 갖고 있던 중이었다.
“어?”
또 하나의 모래언덕을 앞장서서 올라간 레이의 목소리에 위를 올려다보며 갸웃한 케이는 몇 걸음 더 올라가서 모래언덕 위에 다다르자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똑같은 말을 했다.
“어?”
땅 위로 듬성듬성 솟아나 있는 커다란 것들. 그것은 그가 사막을 걷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보는 생물이었다.
“우와아!”
“선인장이다!”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래언덕을 반쯤 구르며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인장!
사막에서 가장 반가운 것 중 하나다.
근데 조금 이상했다. 신나게 달려가던 케이의 보폭은 조금씩 좁아져 갔고, 뒤를 따르던 레이 역시 비슷한 보폭으로 속도를 줄였다.
둘 모두 지친 기색이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뭐가 저렇게 커. 원래 저래?”
“글쎄.”
선인장은 확실하다. 둥글 길쭉하고, 가시가 있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이 보통 사람 키를 훌쩍훌쩍 넘길 만큼 과하게 비대하다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원.”
케이는 가장 커다란 선인장 주위를 돌며 난감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놈의 선인장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커다랗단 말인가? 처음엔 몬스터인 줄 알고 겁까지 먹었다.
몇 발짝 떨어져서 모래를 던져 보거나, 슬금슬금 다가가서 가시를 툭 치고 도망치기를 수차례, 그것이 그냥 선인장임을 확인한 그들은 오히려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앗 따거!”
보통으로 큰 것이 대략 지름 2미터가량에 높이는 케이의 키보다 커 2미터를 넘길 정도. 그 정도라면 ‘그럭저럭 크군.’할 만큼이겠는데 정말 큰 것들은 한참을 올려다볼 만큼이나 커다란, 5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큰 키와 그에 걸맞은 둘레를 갖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선인장의 키가 아니라 그것의 겉에 촘촘히 박혀 있는 가시였다. 그나마 큰 선인장일수록 가시 사이의 틈새가 넓어 그 사이로 손을 넣어볼 수 있었기에 그곳에 있던 선인장들 중 가장 큰, 한참이나 올려봐야 할 만큼 큰 키의 선인장을 노려보던 케이였다.
“끄응…….”
이건 가시라기보다 송곳. 아니, 송곳이라고 하기도 부족했다. 대략 1미터에서 2미터가 넘는 것까지 들쑥날쑥한 길이의 그것들은 가장 두꺼운 안쪽 부분의 지름이 2~5센티미터, 역시 그 길이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하얀색에 희미한 연둣빛이 섞인 그것은 분명히 선인장의 가시였지만 대나무처럼 단단하고, 또 그 끝이 날카로워 방심하고 만졌다간 지금처럼 피를 보게 되었다.
또 한 번 팔을 찔려 체력이 10 가까이 줄어든 케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이런, 씁! 선인장 주제에!”
“조심해, 형. 나도 많이 찔렸어. 이 가시들 무척이나 단단한 것 같아. 위험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까 보냐!”
케이는 다시금 눈앞의 선인장에 나 있는 촘촘한 가시들 틈새로 오른손을 비집어 넣고 가시 하나를 움켜잡았다.
가시 표면의 감촉은 대나무를 만지는 듯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느낌이었고, 그 길이가 꽤 길었기에 선인장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 중 살짝 안쪽의 위치밖에 잡을 수 없었다. 팔을 더 집어넣게 되면 또다시 다른 가시들에 어깨 쪽을 찔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 번 찔려 보니 독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긴 했지만 계속 찔리면 그나마 없는 체력을 자꾸 갉아먹어 휴식을 취해야 했다.
케이가 지금 매달리고 있는 이 가시가 그나마 주변의 가시보다 쥐기가 쉬웠고, 끈기 있게 하나에만 매달렸더니 약간 그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자자자자!”
다시금 이를 악물고 기합을 내지르는 케이의 두 발이 조금씩 모래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가시를 잡아당기고 있던 두 팔의 도드라진 힘줄 위로 비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공장 밥 5년인데 가시 하나 못 뽑을 것 같냐!”
그 무거운 캡슐 외형을 수백 수천 번 날라 옮기던 손이다. 고작 게임에서, 그것도 선인장 가시 하나 못 뽑아서야 체면이 살지 않았다.
“아으으아!”
“……무리하지 마, 형.”
옆에서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나마 작은 선인장들 위주로 돌아보고 있던 레이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가 잡아당기던 가시가 쑤욱 뽑혀 나왔다.
“으악!”
별다른 지지대 없이 무식하게 잡아당기던 케이는 가시가 쑤욱 뽑히자 균형을 잃고 사납게 바닥을 굴렀지만 언제 굴렀냐는 듯 벌떡 일어나 한 손에 쥐어진 2미터가량의 가시를 바라보았다.
그것의 가장 안쪽, 선인장 안에 박혀 있던 뿌리 부분에는 바깥 방향으로 촘촘하게 결들이 나 있었는데 억지로 힘을 주어 당겨서 그런지 잔뜩 뭉개져 있었다.
대략 20센티미터가 넘는 뿌리 부분에 그런 식으로 역방향의 결들이 있으니 안 뽑힐 만도 한 것이었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응?”
영진은 안내와 함께 옆쪽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보았다.
<사막 선인장의 큰 가시>
종류 : 창 공격력 : 5~10 내구력 : 18/20
무게 : 10 사용제한 : 없음 인벤토리 중첩 : 가능
사막, 그곳은 여행자의 로망!
수많은 여행자들과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여린 선인장들의 목을 베고 그 생명수를 취하기 시작하였고, 아예 위협을 느낀 가련한 선인장의 일부는 이처럼 스스로의 몸집을 키우는 것으로 그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몸만 커지는 것으론 달리진 게 없던 그들은 자신의 커다란 몸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 길고 단단한 가시를 열망, 만물의 어머니이신 레니아께서는 그들의 소원을 받아들여 이처럼 늠름한 가시를 선사해 주셨다.
이 단단하고 길며 촘촘하게 박힌 가시를 보라! 이 수많은 가시는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선인장 스스로를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뽑히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