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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가 뽑았다는 거지.”
케이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히죽거리며 말했다. 언제 찔렸는지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쪽 어깨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은 이 순간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했다.
“와, 대단하다 형! 근데 팔은 괜찮아?”
레이는 순수하게 감탄한 얼굴로 말하다 문득 안쓰러운 얼굴로 바뀌어 물었고, 케이는 그제야 오른쪽 어깨를 내려다보곤 몇 개의 작은 구멍 위로 몽글몽글 솟고 있는 피를 왼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조금 쉬어야겠군.”
“설마 다 뽑으려고?”
놀라 묻는 레이에게 한 손을 내저으며 들고 있던 가시 창을 휙 던져 준 케이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는 레이를 향해 승리자의 얼굴로 말했다.
“안 뽑아. 그냥 돌려서 뺄 거야.”
“아!”
케이는 꽤 좋은 눈썰미를 갖고 있었다.
뭉그러지긴 했지만 가시가 박혀 있던 부분의 역방향 결은 그 겉을 따라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일단 뽑던 녀석부터 마저…….”
아직 피통이 작은 탓에 몇 분만 앉아 있어도 금방 회복되는 케이였지만 앉은 지 몇 초 되지 않았는데 엉덩이를 떼고 천천히 일어났다.
“형…….”
“쉿.”
옆에 서 있던 레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뒷걸음쳐 다가왔고, 케이는 천천히 일어난 뒤, 가시 창을 돌려주려던 레이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약탈자……. 약탈자……,
음울한. 너무나 낮고 처량해서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방금 가시를 하나 뽑아낸 그 선인장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선인장들의 한가운데 있던 그것은 그것을 빼고 가장 높은 키를 가진 것보다 두 배나 더 커다란 녀석이었지만 조금씩 그 키가 더 커지고 있었다. 그 주변 땅의 모래가 사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쪽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선인장들의…… 적……. 꾸오오오……!
키가 커진 것이 아니다. 일어난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와 함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선인장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하체를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사막 선인장 가디언]
새빨간 이름이 하늘에 닿을 듯한 그 녀석의 머리 위에 짠― 하고 드러났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에니티의 퀘스트는 대부분 이렇게 두루마리 형태로 부여되었다. 이 두루마리를 타인에게 팔 수도 있기에 숨겨진 퀘스트나 보상이 좋은 퀘스트는 유저들 사이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퀘스트 <사막 선인장 가디언의 폭주>
오랜 세월 사막을 지켜 오던 선인장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포악한 자들의 칼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을 베고, 피를 뽑아 마셨다.
피와 눈물이 서린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그들에게도 스스로를 지켜 줄 존재가 생겨났다. 그는 레니아에게서 ‘가디언’의 이름을 허락받은 존재로서 난폭한 약탈자들로부터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족보다 큰 육체와 긴 가시, 늠름한 두 다리를 선물 받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선인장 근처에 온 존재는 없었다.
자연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그의 다리는 조금씩 굳어 갔고, 가디언 역시 다른 선인장들처럼 조용히 삶을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생이 비겁한 한 존재가 그의 잠을 깨웠다!
그는 분노한다!
소리치며 두 다리를 편다!
약탈자들을 살려 두지 않겠다고 포효한다!
비겁한 자여, 그대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퀘스트 충족요건>
분노로 폭주한 사막 선인장 가디언을 쓰러뜨려 위협에서 벗어난다.
<퀘스트 팁>
수행 도중 사망하였을 경우 사막 선인장 가디언의 옆에서 재시작 된다.
서둘러 주워 든 퀘스트 전문을 읽어 본 케이는 옆에 있던 레이에게 눈짓하며 재빨리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되는 일이 없어!”
온전히 일어난 가디언의 키는 10미터에 육박할 정도!
비록 팔은 없었지만 짧은 다리를 제외한 온몸에 박힌 가시 창들이야말로 무엇보다 무서운 흉기였다.
“어떡하지, 형? 어디로 가야 되지?”
당황하며 나침반을 꺼내 드는 레이에게 손을 내저어 보인 케이는 달리던 걸음을 조금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선인장을 지키던 녀석은 놈 하나뿐인 것 같다.
녀석이 일어나 뿌직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주위에 있던 나머지 선인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다.
“갈 곳은 거기밖에 없다.”
“거기라면 동남쪽이야!”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어디인지 짐작한 레이가 소리치자 끄덕인 케이는 대체 눈이 어디에 달려 있는 건지 망설임 없이 그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 선인장에 식겁해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곳에 오기 전 그들을 집어삼키려 했던 모래 구덩이. 뒤에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고 있는 저 녀석도 충분히 빠뜨릴 만큼 커다란 모래 구덩이는 늪처럼 위의 것들을 빨아들이는 곳이기도 했다.
“제길, 방심했어.”
어쩐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몬스터 하나 안 만나고 사막에서 처음 접한 것이 선인장 군락이라니. 나름 의심한다고 했지만 역시 방심한 것이었다.
“그래도 딱히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쫓아오는 선인장 가디언의 발놀림은 생각보다 빨랐다. 다리가 짧긴 해도 일단 그들보다 키가 컸기에 한 걸음을 움직여도 그들이 서너 걸음 움직인 것과 비슷한 것이다.
“저런 것에 죽고 싶진 않다고!”
무시무시한 가시 창들에 온몸을 찔리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케이는 옆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레이를 향해 외쳤다.
“내가 유인할 테니까 네가 그걸로 도와줘, 알았지?”
“너무 위험하잖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옆에서 깔짝대는 것으론 함정에 빠뜨릴 수가 없지 않은가? 케이의 말에 레이는 침울한 얼굴로 끄덕였다.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말고. 이거 길어 봐야 2미터 정도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라.”
멀리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저 언덕 너머에 바로 그들이 노리고 있는 모래 늪이 있다.
―약탈자……! 약탈자……!
놈과의 거리는 이제 10여 미터까지 좁혀진 상황!
그들이 쉽게 지친 탓도 있었지만 일부러 거리를 좁혀 녀석이 광분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레이는 케이의 눈신호에 조금 옆쪽으로 거리를 벌렸고, 케이는 뒤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며 소리쳤다.
“쫓아와 봐! 머릿속에 물만 찬 녀석아!”
발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무언가에 쫓길 때는 더더욱.
“헉, 허억.”
둘은 네 발로 기다시피 하여 언덕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동안 선인장 가디언은 바로 뒤통수까지 쫓아와 있었다.
―적……! 죽인……다……!
“형, 피해!”
언덕 위로 올라온 가디언은 주저 없이 케이를 노리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이크!”
수십 개의 가시 창 끝이 아슬아슬하게 케이의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마음 놓을 틈이 없었다.
아예 쓰러지기라도 하려는 듯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선인장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몸을 한 바퀴 돌렸고, 이를 악문 채 몸을 날린 케이는 회전하는 선인장의 가시 창들이 등을 할퀴는 것을 느끼고 소름이 끼쳤다.
“이리 와!”
하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움직여 녀석을 모래 늪이 위치한 곳으로 유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적…… 적……!
“그래, 적이다! 덮쳐 봐! 깔아뭉개 봐!”
우지지직……!
이리저리 사납게 움직이는 케이는 창백해진 인상을 보아 체력적으로도 큰 무리가 오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만은 살아 있었다.
―우우……! 죽인다……!
“대체 어디로 말하고 있는 거냐, 넌? 입이 어디야?”
케이의 도발에 잔뜩 약이 오른 선인장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여전히 날뛰고 있는 작은 인간의 모습에 성이 났는지 그대로 다리를 굽혔다 펴며 온몸을 날렸다.
“지금이다, 레이!”
케이는 쥐어짜듯 소리치며 옆으로 굴렀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가시 창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적잖게 모래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버린 상황. 지금의 체력으로는 이 깊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잡아, 형!”
2미터 가량의 가시 창을 잡기엔 무리인 위치라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레이까지 이쪽에 발을 들이게 되면 둘 다 빠져나가기 어려워진다.
반쯤 포기한 외침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팔이 닿는 위치에 가시 창 끝이 날아와 박혔다.
“하하!”
주저 없이 그것을 움켜쥐고 위를 올려다본 케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통을 벗고 있는 레이.
그는 자신의 티셔츠를 길게 찢어 가시 창의 굵은 쪽에 묶어 쥐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올라와! 오래 버티면 천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착한 동생이로구나!”
웃으며 말하는 케이의 눈을 마주 보며 씨익 웃는 레이였다.
“이제 아셨어?”
케이는 혹시나 선인장이 다시 일어날까 서둘러 언덕 위로 올라가 뒤를 보았다.
“……뭐?”
“어라?”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우지직, 우직.
그곳은 단순한 모래 구덩이가 아니었다.
“큰일 날 뻔했잖아.”
“……그러게.”
시커멓고 커다란 무언가가 모래 구덩이 한가운데에서 팍 하고 튀어나오더니 막 일어나려던 선인장 가디언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시 창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껍질을 가진 녀석은 얼핏 보아 곤충인 것 같았다.
개미귀신!
케이는 자연 다큐에서 보았던 개미지옥의 광경을 떠올렸다.
“…….”
눈앞에서 그때의 그 다큐보다 더 실감나고 처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막 거대 개미귀신과 사막 선인장 가디언!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녀석들의 사투를 구경하는 것은 재미가 있기도 했지만 지금 그에겐 그것을 감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래저래 위험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선인장을 도발했다면 지금 물어뜯기고 있는 것은 저 녀석이 아니라 케이였을 테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머리를 썼다고 인정된 건지 구차한 임기응변의 레벨이 3레벨이나 올랐다.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던 피. 그는 잠시 자리에 앉아 적당히 회복한 후 여전히 진행되고 있던 거대 몬스터들의 싸움을 뒤로하고 예의 선인장 군락으로 다시 향했다.
“가디언은 저 녀석 하나일 거라고 봐.”
레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케이는 ‘가디언을 쓰러뜨리고 목숨을 보전한다.’라는 퀘스트 요건을 충족시켰는데도 퀘스트를 해결했다는 안내가 나오지 않는 것이 유감이었다.
“쓰러뜨렸는데 말이지. 넘어졌잖아?”
“그건 좀, 비약이…….”
케이는 쓴웃음을 짓는 레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언덕 안쪽으로 자빠졌으니 분명 ‘쓰러진’ 건 맞지 않아? ‘죽여라’라는 말이 아니고 ‘쓰러뜨려라’라는 말인데.”
융통성이 없어, 라고 중얼거리던 케이는 이내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 그들을 기다려 주고 있는 수많은 선인장들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감사히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