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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처에선 가죽 방패도 하나 나왔다. 아마도 아까 전에 빛났던 것은 이 방패 정면에 있는 둥근 금속판이 빛에 반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케이는 방패를 레이에게 건넸다.
“네가 써라.”
레이는 말없이 받아 들었고, 케이는 몸을 돌려 언덕에 반쯤 묻혀 있던 시체를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했다. 모래였기에 파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혹시나 시체가 상할까 조심하는 것이었다.
“으차!”
조심조심 가로눕힌 시체는 대략 키 180가량의 남성인 것 같았다. 골격이 장대한 것을 보아 전사인 것도 같지만 장비를 보면 그저 그런 모험가일 수도 있었다.
“모래사막에 반쯤 묻힌 시체라.”
‘게다가 탈진한 게 아니라 살해당한 시체.’
시체의 가슴팍엔 또렷한 검상이 있었다. 가죽조끼와 그 안의 해진 천 옷에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버려진 게 아니라면 이곳에서 죽은 거겠지. 아니면 근처에서 당하고 도망치다 이곳에서 쓰러졌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제법 커다란 방패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어쩌다 가슴을 허용했을까? 레이가 들고 있는 ‘징이 박힌 낡은 가죽방패’는 꽤 낡긴 했어도 별다른 상처는 나 있지 않았다.
케이는 주저 없이 시체의 양 어깻죽지를 잡고 옆으로 넘겨 뒤집었다.
“그렇군.”
등에 나 있는 큼직한 구멍. 이 사람은 뒤에서 찔린 것이었다. 아마 상대는 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빨랐거나, 아니면…….
“여러 명이었겠군.”
이제 생각해 볼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케이는 다시금 미라가 된 시체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시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게임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공장에서 호환성 테스트를 했던 몇몇 성인등급 게임들에 어려서부터 적응이 되어 있던 차였기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었다.
“왜 죽었을까?”
시체는 말이 없다.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에 시체가 있다는 것. 말이나 낙타에 싣고 와서 버린 것이 아니라면 이 근방에서 싸움이 있었을 거라는 것. 그리고 등 뒤를 찌를 만큼의 원한이나 악의가 있는 사람, 혹은 사람들.
그의 다음 행동은 시체의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형…….”
“산 사람은 살아야지.”
구멍이 나고 먼지가 잔뜩 묻어 있긴 했지만 가죽조끼는 제법 튼튼한 것이었다. 시체의 팔을 들어 조끼를 벗기려던 케이는 문득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구겨진 종이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집어 펴 들자 그대로 부스러지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케이와 레이는 한 걸음 물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쪽 허공에 떠오른 빛 속에는 지금 이곳에 누워 있는 주인공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지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론. 아론 헹겔만이다……. 프레이노스 상단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는…… 쿨럭! 그렇다.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내가 죽은 지 오래일 테지. 어쩌면 놈들이 내 시체를 처리해 버렸을 수도 있으니 아무도 보지 못할지도……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쿨럭!
아론이라는 사내는 연방 기침을 하며 피를 뱉어 냈다. 이미 검에 당한 뒤인 것 같았고, 그는 문득 주위를 살핀 뒤 다시금 정면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 이곳까지 발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막은 그들의 세상이다. 우리도 자신의 실력을 믿고 거리를 줄여 보려 위험을 무릅썼지만…… 결국 자만이 부른 참극이었다.
……나를 발견한 자여. 그대에게 줄 것은 말라 비틀어져 있을 내 몸뚱이와 그것에 걸쳐져 있는 이 보잘것없는 것들밖에 없다. 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간절한 부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조끼 안쪽에 있던 나침반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동쪽에 놈들이 있다. ……멜하드 마적단! 놈들은 분명 당신이 이것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 사막은 그들의 것이니까…… 쿨럭! ……우리의 일행은 모두 죽거나 끌려갔다. 임무 중 죽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니 억울할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목숨보다 훨씬 중요한 물건이 놈들 손에 있다. 그것을 되찾아 가엘리안의 에쉬타트 신전에 전해 주지 않겠는가? 이것은 단순히 상업적인 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 국가의 운명이 달린 일이다.
“음?”
퀘스트 <하밀란의 천사상>
아론과 백여 명의 호위 아래 가엘리안으로 향하던 프레이노스 상단은 겉으로 보이는 무역품과 더불어 비밀리에 에쉬타트 신전에 가져다 줄 중요한 물건을 수송 중에 있었지만 슘가르 사막에서 악명을 떨치던 멜하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그것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오랜 옛날 존재했던 마이칸 제국의 조각가인 하밀란이 조각한 천사상으로, 프레이노스 상사가 속한 동방의 소국 레이든 왕국에서 대국인 가엘리안에 평화의 목적으로 보내지던 물건이었다.
평소부터 천사상을 탐내 오던 가엘리안의 왕 지울라프 3세는 전쟁을 치러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고 싶어 했기에 레이든의 왕은 그것을 조공으로 바침으로써 전쟁을 피하고 백성들을 지켜 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천사상이 예정대로 가엘리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곧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대지가 적셔질 것……. 그대는 과연 마적단의 손에서 그것을 되찾아 위기에 빠진 레이든을 구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난이도 : AA+
그대로 빛은 사라져 버렸고, 신음하던 아론의 얼굴 역시 그와 함께 스르르 사라졌다.
카므 사막이 아니라 슘가르 사막이었군.
케이는 중얼거리며 다시금 아론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할 거야?”
“생각해 보고.”
퀘스트 두루마리가 바닥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회성 퀘스트 같기는 한데 당장 수행하기는 무리인 것이 사실이었다.
퀘스트의 난이도는 그것을 받은 유저의 레벨과 여러 여건에 따라서 그 난이도가 표시되는 것. 같은 퀘스트라도 레벨이 바뀌거나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면 그 유저에게 걸맞도록 난이도 등급이 바뀌었다.
가끔 난이도가 표시되지 않는 돌발 퀘스트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보통은 생명에 직결되는 퀘스트로 요 전번의 선인장 가디언건과 같은 경우였다.
일단 AA+라면 지금의 그로선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난이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벨 1짜리 캐릭터 둘이서 마적단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끽해야 정찰일 테니까.
케이는 일단 두루마리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다. 당장은 수행하기 어려워도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언제까지라는 기한이 없으니까.”
방어력 10의 ‘구멍 뚫린 가죽조끼’를 티셔츠 위에 걸친 케이는 아론이 입은 바지까지 벗기려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두고 주머니를 뒤져 돈을 찾았다.
30실버 50쿠퍼.
100쿠퍼가 1실버. 10실버가 1골드였으니 3골드 50쿠퍼인 것이다.
케이가 인벤토리에 돈을 넣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 역시 찢어진 티셔츠를 대충 몸에 감은 헐벗은 꼴이었기에 아론이 입고 있던 해진 윗도리나마 벗겨 걸쳤다.
“동쪽이라고 했었지.”
케이는 조끼의 안쪽 주머니를 뒤져 아론이 쓰던 나침반을 꺼냈다. 꽤 공을 들인 티가 나는 나침반의 겉은 금도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덮개를 여닫는 구조였다.
안쪽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인지 ‘J.R’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나침반의 지침은 별 이상 없이 움직였다. 레이가 들고 있던 나침반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
케이는 물끄러미 나침반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를 보고, 들고 있던 나침반을 천천히 옆으로 움직여 보았다.
나침반을 따라 움직이는 레이의 시선. 그것은 순수한 욕심의 눈빛이었다. 케이는 피식 웃었다.
“받아.”
휙 하고 나침반을 던져 주자 움찔 놀라며 두 손으로 받은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해맑게 웃었다.
“동쪽이 어디야?”
“음……. 이쪽.”
케이의 물음에 레이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고, 둘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손에는 무척 낡은 여행자의 검을, 오른손에는 길이 2미터짜리 선인장의 가시 창을 든 채로 걷고 있던 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검을 레이에게 건네주었다.
“검은 역시 방패하고 어울리지. 혹시 싸울 일이 생기면 네가 방어와 근접 공격을 맡아. 내가 창으로 찌를게.”
“음. 알았어.”
레이는 들고 있던 자신의 창을 집어넣고 케이가 건넨 검을 받아들었다. 한 사람은 방패와 검, 다른 사람은 길쭉한 창. 좀 후줄근한 차림에 둘 다 똑같이 생긴 선인장 뚜껑을 쓰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근데 마적단을 어떻게 상대하지?”
“당장은 상대 안 해. 일단 위치만 파악할 거야. 말이 있으면 훔치는 것도 괜찮겠고.”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닐 터.
1백 명의 호위병들을 쓸어버린 마적단이라면 그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보다 말이야. 이 사막이라는 데는 몹이 한 마리도 없는 건가?”
케이의 말에 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없네.”
그들의 기준으로는 ‘사막 선인장 가디언’이나 ‘사막 거대 개미귀신’은 몬스터의 범주를 넘어선 괴물이었다. 뭐 좀 잡아볼 수 있겠거니 할 정도의 녀석은 아직 구경해 보지 못한 것이다.
“어지간히 넓어야 말이지.”
사막을 불평하던 케이가 ‘말이 씨가 된다.’던 속담을 실감한 것은 정확히 게임상으로 한 시간 뒤였다.
“크르르.”
“오, 몬스터다.”
언덕 하나를 앞두고 마주하게 된 것은 날렵하게 생긴 황갈색의 늑대 한 마리였다. 이미 그들의 접근을 알고 있었는지 언덕 아래서 자세를 낮춘 채로 잔뜩 으르렁거리고 있던 녀석의 위에는 ‘사막늑대’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사막늑대라. 강한 놈인가?”
“제법 날렵하게 생겼으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방패와 검을 고쳐 든 레이의 대답에 케이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가시 창을 양손으로 고쳐 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낮게 외쳤다.
“구차한 임기응변!”
먹거나 먹힐 것 같다. 먹는 쪽이 좋겠지?
스킬 레벨이 올랐다더니 그래 봐야 그 수준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저 녀석이 아무래도 선공 몬스터인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아마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늑대고기도 고기가 아닌가?
챙겨 온 선인장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이상 새삼스럽게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녀석과의 거리는 대략 10여 미터.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으르렁대는 녀석이었지만 쉽사리 발을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남아나는 게 창이니까.”
케이는 들고 있던 가시 창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오른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가시 창을 하나 꺼내 들고 그것의 가운데쯤을 쥐었다.
“던지기는 별로 자신이 없는데. ……으싸.”
휘이익―!
그는 오른손에 쥔 가시 창을 투창 삼아 힘껏 던졌다.
금속이 아니라서 무게가 그렇게 많이 나가진 않아 큰 위력을 갖진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일단 수량이 많으니까 몇 개쯤 던져서 도발해 볼 생각이었다.
“맞으면 좋긴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