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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끓어오르다


오랜만에 보는 시가지의 풍경은 그것을 향유할 돈이 없는 영진으로선 그저 어색하고 피하고 싶은 복잡함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냥 외곽의 분식집에 가면 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데 어디로 가는 거냐고요.”
“잔말 말고 따라와. 사 준다는 데 무슨 토를 그렇게 다냐, 넌?”
평범한 세미 정장의 명훈이 가볍게 뒤통수를 때리자 이건 아닌데 하는 얼굴로 별수 없이 따라나서는 영진은 평소대로 몇 년 된 구제 청바지에 하얀색 남방 차림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씁!”
“…….”
영진은 갈수록 도심지 깊숙이 들어가는 명훈의 뒤를 따르며 입술을 내밀었지만 별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명훈이 들어선 곳은 제법 규모가 있는 모던카페였고, 그 뒤를 따라 쭈뼛거리며 들어간 영진은 이런 데는 왜 오냐는 눈빛으로 명훈을 쏘아보았지만 그대로 외면당했다.
“두 분이신가요?”
꽤 예쁘게 생긴 여성 점장이 다소곳하게 물어 오자 명훈은 가볍게 끄덕였다.
“예. 두 사람입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친절하게 안내하는 점장의 뒤를 따르는 명훈. 영진은 굴비 엮듯 그 뒤를 따르며 연방 입술을 삐죽거렸다.
척 보아도 무척이나 비쌀 것 같은 분위기. 사방의 벽과 천정을 장식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따위를 흘깃거리던 영진은 점장이 안내한 창가 쪽에 앉는 명훈의 맞은편 자리에 가 앉았다.
“주문은 천천히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생각을 정하셨으면 이곳의 벨을 눌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점장은 다소곳이 목례를 한 뒤 천천히 뒤돌아 카운터로 돌아갔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던 점장은 입고 있는 은청색 세미정장이나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깨끗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고, 명훈은 그 뒷모습을 보며 평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좋긴 뭐가 좋아요. 홀로그램 셀프 주문도 아니고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을 정도면 진짜 비싼 데 아냐? 아 진짜. 밥을 사 준다면서 이런 데는 왜 와요?”
“배고프냐?”
“당연하죠. 일부러 아침도 굶고 나왔구만.”
잔뜩 투덜거리던 영진은 다시금 주변을 주욱 돌아보며 홀과 카운터 쪽을 살폈다. 돌아다니는 알바생들만 해도 서너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레이스 달린 분홍 원피스가 상당히 발랄한 느낌이었다.
“좋구나.”
명훈은 또다시 그놈의 좋구나를 연발하고 있었고, 영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뭘 일부러 그래 임마. 내가 밥 사 준 댔지 분식집 가자고 했냐?”
“아니. 밥을 사 준다고 했으면 밥을 사 줘야지 왜 이런…… 뭐야 이거, 카페라고 하면 되나? 이런 데는 왜 와요?”
영진은 이런 곳에 와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뭔가 굉장히 비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끼는 것이 삶 그 자체가 된 영진의 예감은 이번 역시 틀리지 않았다.
“메뉴입니다.”
벨을 누르자 알바생 하나가 다가와 가죽으로 된 메뉴판 두 개를 각각 건네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영진은 서둘러 메뉴판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
비싸다. 무슨 우유 한 잔이 2만원이냐? 한 달 용돈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근데 가장 싼 음료인 우유 한 잔이 2만원이란다. 영진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명훈에게 발등을 밟혀 저지당했다.
“난 레몬 아이스티 한 잔하고 체리 치즈 케이크 1번 줘, 똑순아. 영진이 넌 뭐 먹을래?”
“음?”
고개를 갸웃한 영진은 명훈이 주문한 메뉴가 아니라 그 말 속에 있던 누군가의 별명을 듣고 고개를 돌려 옆쪽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예쁘장한 소녀. 역시나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똑순이가 맞았다.
“아, 오랜만이네요. 여기서 일하시는구나.”
“주문이나 해, 임마.”
명훈이 메뉴판으로 머리를 툭 치자 다시 아래로 눈을 돌린 영진은 대충 메뉴를 훑어보며 명훈이 시킨 것들과 비슷한 이름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랑…… 이거 주세요.”
“딸기 밀크셰이크, 초콜릿 치즈 케이크 3번 주문 맞으세요?”
“네. 맞아요.”
“준비되는 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즐거운 대화 되세요.”
똑순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함께 일할 당시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척척 해내 똑순이로 불렸던 그녀의 진짜 이름은 최아영이다. 그때는 사실 힘든 일을 하는 공장에서 외모를 꾸밀 여유가 있을 리 없었겠지만, 매일 보던 작업복이 아닌 사복에 화장까지 한 모습을 보니 느낌이 달랐다.
이제 보니 무척 예쁘게 생겼구나. 영진은 솔직하게 감탄하며 그녀가 두고 간 냉수를 몇 모금 들이켰다.
앞에서 명훈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아. 진짜.”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넌? 다른 사람들 봐. 다들 좋구나를 외치고 있잖아.”
명훈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영진은 주변의 손님들을 슬쩍 돌아보며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카페에 앉아 있는 손님들 중 대다수가 남자였고, 하나같이 어딘가 약간씩 부족해 보이는 인상들로 제각각 일정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지?”
마치 그 부족한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알바생들이었다.
그 시선들 중에는 예쁘장한 미소로 한 테이블을 응대하고 있는 아영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시선이 향하는 곳은 카운터였다.
“크다.”
키가 적어도 170은 되어 보이는 그 여성은 약간 곱슬진 긴 갈색 머리에 연예인이라고 생각할 법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이름표에는 유지선이라고 쓰여 있었다.
당장 그녀를 향한 시선이 기획사의 스카우터들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문득문득 카운터 옆으로 나올 때마다 원피스의 라인을 따라 드러나는 몸매는 예쁜 얼굴 그 이상으로 그녀를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녀가 카운터 바깥으로 잠깐 나와 일을 본 뒤 다시 들어갈 때마다 홀 곳곳에서 뜻 모를 한숨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음. 좋구나.”
“…….”
진지한 얼굴로 이제는 엄지까지 치켜드는 명훈을 본 영진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들 보려고 여기로 오자고 한 거예요, 설마?”
“반 정도?”
명훈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아니, 무슨 밀크셰이큰지 뭔지가 2만 5천원에 빵 한 쪼가리가 3만원씩이나 해요? 여긴 부자들이나 오는 데 아녜요?”
“부자들은 더 비싼 데로 가지. 그런 데는 막 물 한 잔도 돈 받고 그래.”
“가 봤어요?”
“친구 따라 한 번. 그놈이 냈으니까 다행이지, 비싸서 토하는 줄 알았어.”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고요! 둘이 합치면 11만원, ……그거면 한 달 식비 반인데!”
영진은 자기 돈이 나가기라도 하는 것마냥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11만원!
두 달 치 용돈!
영진의 머릿속에서 지폐들이 파닥파닥 날아다니더니 이내 5천원 지폐로, 천원 지폐로 바뀌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동전으로 바뀌면 아주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 차린 그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명훈을 보았다.
하지만 명훈의 시선은 영진이 아닌 점장과 그 모델 같은 알바생이 있는 카운터 쪽을 향해 있었다. 자연히 영진의 시선도 명훈을 따라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문득 분홍색 원피스가 시야를 가렸다.
“물 새로 가져왔습니다.”
영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야영은 영진의 물잔에 물을 채웠다. 물이 전혀 줄어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고맙습니다.”
“아뇨, 뭘요.”
그녀는 다시금 생긋 웃더니 그대로 서서 영진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굳어 있는 미소.
“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딱히 더 필요한 건……. 형은요?”
“아니. 난 그냥 이대로도 좋구나.”
“그렇다네요.”
쓴웃음을 짓는 영진의 말에 아영은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뒤돌아 카운터로 돌아갔고 영진은 가만히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섣불리 손으로 들어 올렸다간 넘칠 만큼 물이 가득했다.
“이것도 노하우인가 보네. 굉장하다.”
영진은 솔직하게 감탄하며 잔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물을 마셨다.
“음. 저 애가 똑순이 친구인가 보군.”
“……?”
명훈의 말에 그쪽을 본 영진은 카운터에서 아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같은 차림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160이 살짝 넘은 아영에 비해 한 뼘 정도 더 작은 단발머리의 그녀는 학교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범생 스타일이었지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운 외모였다.
“아아, 해물파전에 소주 한 잔…….”
“이놈 아저씨 다 됐네. 대낮부터 술이나 찾고.”
명훈이 핀잔을 주자 영진은 울분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똑순이가 새 직장을 얻었다기에 응원도 해 줄 겸 겸사겸사 온 거야. 너도 같이 응원해 주면 좋지 뭘 그래. 같은 조는 아니었어도 공장 식구였잖아.”
“아, 그런 거였어요?”
그렇게 말하니 불평만 하던 게 조금 미안해진 영진은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아영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영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역시 십대가 좋구나.”
“너도 십대거든? 그래도 좋은 것을 깨달았으니 다행이군.”
“뭐, 저도 남자니까요.”
그의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앞에 앉아 있던 명훈이 피식 웃었다.
“보이니까 보는 거지 뭘 그래. 남자는 어차피 다 똑같은 거야. 감정 숨길 필요 없어. 범죄만 안 저지르면 되지 뭘.”
좀 본다고 닳겠냐? 명훈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알바들을 훑어보며 이젠 그 옷차림까지 분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