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8)/
“그래. 취직은 아직이고?”
잠시 후, 진지한 얼굴로 고쳐 앉은 명훈의 물음에 영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몇 군데 연락이 오긴 했는데 하나같이 자격이 되면 학력이 안 되고, 인맥도 좀 보는 것 같고, 아니면 자격이 안 되고. 그런 식이에요.”
“학력, 인맥 중요하지.”
웃으며 고개를 젓던 명훈은 자신의 잔에 얼마 남지 않은 물을 홀짝 다 마시곤 가득 채워져 있는 영진의 물잔을 보았다.
“안 마셨냐?”
“아까 못 봤어요? 막 여기까지 꽉꽉 눌러서 따라주던데.”
“그랬었어?”
“여기서 많이 배웠나 봐요. 전 흉내도 못 내겠어요.”
물잔 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금 감탄의 얼굴로 말하는 영진에 피식 웃은 명훈은 영진의 잔을 들어 자신의 빈 잔에 물을 나눠 따르며 말을 이었다.
“센터가 국영이라서 아마 일처리가 느릴 거야. 쉬는 김에 푹 쉬어.”
“너무 쉬어서 걱정이에요. 게을러지는 것 같아서.”
“네가 게을러져? 개그도 그런 개그가 없겠다.”
“진짜라니깐요. 요샌 막 늦잠도 자요.”
명훈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는 영진. 명훈은 갸웃하며 물었다.
“늦잠? 몇 시에 일어나는데?”
“늦으면 7시 정도?”
“그게 늦잠이냐?”
“공장 다닐 땐 4시에 일어났잖아요.”
“그건 네 교대 시간이 4시 반이었으니까. 몇 시에 자는데?”
“똑같죠. 자정 전후로.”
“음. 그때보단 좀 많이 자긴 하는 것 같네.”
끄덕이던 명훈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참. 너 게임 한다며?”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호상이가 말해 주더라. 전에 길에서 만났다며.”
류호상. 스무 살에 2미터가 넘는 거한이었고,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로 영진보다는 두 살 위지만 마음이 잘 맞고 달리 친구도 없던 터라 서로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기로 했었다.
지난번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났었는데, 호상은 연금보험에 들지 않았었기에 당장 먹고살 길이 없어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했었다.
“아, 그때 받은 쿠폰 있었잖아요. 그거 하고 있죠.”
“아, 그게 있었지. 근데 일주일짜리 아니었나?”
“그거 재판매나 반품이 안 된다고 해서 그냥 한꺼번에 썼어요.”
“음. 다 하면 1년쯤 되겠네. 1년 계정이라. 못 파는 게 아깝네.”
게임 중에는 타인에게 계정을 양도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에니티는 그러지 못하는 게임이었다.
에니티의 1개월 계정비는 10만원.
1년 계정이면 못 받아도 70만원은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명훈이었고 그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었던 영진 역시 새삼스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꽤 재미있나 보네. 아직도 할 정도면. 너 테스트용 게임 같은 것들은 그냥 짧게 해 보고 말았었잖아.”
테스트용 게임이라고 해서 데모 형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간단하게 만들어진 그래픽 테스트 프로그램이나 호환성 테스트를 위한 소프트웨어들도 있지만, 보통은 시중에 있는 게임들을 갖고 테스트를 하는 것. 영진은 공장에서 테스트할 때는 별로 게임을 즐기진 않았었기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뭐. 나름 재미있더라고요.”
“그래? 흐음.”
“동생도 생겼어요.”
“동생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명훈에게 웃어 보인 영진은 에니티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일들, 특히 정플과 꼼수로 인한 쌍둥이 생성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명훈은 정플 이야기를 듣자 에에? 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런 게임이 다 있냐.”
이상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진의 얼굴이 무척 밝은 것을 본 명훈은 그저 웃으며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재미있으면 나도 시간 날 때 한번 해 봐야겠네.”
“가게 일 배우느라 바쁘지 않아요?”
영진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 명훈은 물 몇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배울 건 다 배웠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전문적인 건 기술자들이 알아서 하니까. 거래는 직원들이 하는 거고. 난 관리나 결재 같은 거만 해 주면서 그 사람들 월급 챙겨 주는 게 다라고 보면 돼.”
“네에.”
“요샌 인수인계 중이라 좀 바쁘긴 하지만 완전히 인수받으면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아. 수리 주문이 밀리지 않는 이상은 공장처럼 야근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명훈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예정인 가게는 차량용 부품 판매와 수리 등을 하는 카센터였다.
현재의 자동차들은 기름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부품 교체나 관리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카센터에 맡겨야 했다.
명훈의 카센터는 크진 않지만 자리를 잘 잡아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고 있는 곳이었다.
애초 더 일찍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젊었을 때는 고생을 해 봐야 한다며 서른다섯 살이 되면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공장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명훈의 지금 나이가 31살이었지만 공장이 그렇게 된 후, 그 정도면 성실한 것 같으니 되었다며 물려받는 것이 앞당겨졌다고 했었다.
“카센터야 내가 직접적으로 뭔가 할 수는 없지만 딱히 하지 않아도 돈은 굴러들어 오는 곳이고. 그럭저럭 궤도에 오르면 내 사업을 따로 시작해 볼 생각이야.”
“형의 사업?”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보는 명훈에 눈을 동그랗게 뜬 영진은 재차 끄덕이며 잇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전에 네 방에 캡슐을 개조하고 설치하면서 생각해 봤던 거야.”
명훈이 구상하고 있는 것은 현재에도 무수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용 캡슐의 개조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가정에 한두 개씩은 있는 캡슐은 따로 전문 캡슐방까지 있을 만큼 과거 데스크탑 컴퓨터가 갖고 있던 자리를 대신하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초기자본이 많이 들어가고 이용료도 비싸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런 이유에서 정식 업그레이드가 아닌 사설 개조를 행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었다.
구매처에서 행하는 정식 업그레이드에는 일정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부품에 무리가 가지 않는 기준 내에서 업그레이드를 해 주거나 부품을 교체해 주는데, 그 기준이 상당히 좁아서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부품이나 칩은 쏟아지는데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니 개인적으로 개조를 하게 되는 것, 캡슐 회사의 기준은 너무 과한 안전 기준이었기에 그 이상 오버클럭을 하거나 부품을 적당히 교체해도 대부분 큰 무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개인적으로 캡슐을 분해하게 되면 A/S가 불가능하다는 것. 혹시나 고장이라도 나게 되면 적게는 수백 만원에서 많게는 천 만원에 이르는 캡슐 값이 홀라당 날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수리를 해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기술은 그야말로 취미 수준의 것. 전문적인 지식이 결여돼 있어 더 큰 고장을 일으키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수리 불가의 캡슐들을 전문적으로 수리해 주고 돈을 받는 거야.”
명훈의 말에 영진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럴싸한 사업이었다.
망가지고 수리도 안 되는 캡슐은 창고 구석으로 밀려 나거나 고물상에 고철 값으로 넘어가기도 할 만큼 큰 문제였다. 그것을 전문적으로 수리해 준다면 그중 반만 고쳐도 유저들로서는 무척이나 좋은 일.
고장 난 캡슐 값 수백 만원이 날아가고 새로 사야 할 수백 만원의 부담이 드는 상황에서 그 모든 금전적 부담이 그대로 사라지며 다만 약간의 수리비 부담만 남는 것이다.
영진이 알기로는 아직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은 없었고 그 이유는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상용 캡슐을 분해하고 만지는 일은 그 주인이 아닌 이상 자격증이 필요하다. 고가의 전자제품인 만큼 아무나 건드릴 수 없는 것이기에 관련 자격증이 있는 것이었다.
영진이 갖고 있는 ‘상용 캡슐 테스트 및 관리 1종’이 바로 그것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따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자격증이었다.
1년에 합격자가 평균 스무 명 정도. 그것도 어느 정도 상대평가로 뽑는 것이 아닌,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1년 동안 합격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되는 자격증이었다.
그 자격증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캡슐을 초기 테스트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하고 공식 업그레이드를 행하거나 캡슐의 수리까지 할 수 있는 포괄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1종, 초기 테스트 일부 과정과 업그레이드, 중요 부분을 제외한 부위의 수리를 할 수 있는 2종, 그리고 한정된 부분의 업그레이드 및 수리를 할 순 있지만 테스트를 할 자격은 없는 3종으로 나뉘었다.
영진이 갖고 있는 것은 가장 높은 등급인 1종 자격증. 그는 2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그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고, 그동안 캡슐 테스트를 다른 업체에 의뢰하여 돈을 주고 해 왔던 삼화실업도 그가 자격증을 따고 나서부터 자체적으로 초기 테스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삼화실업으로선 없어선 안 될 기술자가 영진이었다.
삼화실업을 생각하자 차가운 바닥에 쓸쓸히 누워 있던 사장이 떠올라 다시금 울분이 쌓이던 영진은 앞에 있던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장 조사를 해 보니까 그런 식으로 못 건드리고 있는 고장 난 캡슐들이 무척 많더라고. 그런 것들을 수리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고장 난 캡슐들을 구입해 수리해서 팔거나 부품을 확보해도 괜찮은 사업인 것 같아.”
“저도 괜찮은 사업 같다고 생각되네요.”
“지금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이 개인적으로 하고 있고 실력도 형편없어서 별 이슈가 안 되지만 전문적인 기술자들 몇만 데리고 시작해도 틀림없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거야.”
“음.”
“문제는 기술자라는 거지.”
명훈은 다시금 영진을 보았다.
“뭐. 일손이 딸리게 되면 저도 종종 도와드리러 갈게요.”
“종종이 아니야. 너 내가 그거 시작할 때까지 일자리 안 구해지면 내가 데려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음? 영진은 그제야 명훈이 자신을 보던 눈빛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입을 제의하려던 것. 그로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정말요?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네요. 손 굳기 전에.”
그럼 호상이도 데려갈 거냐는 말에 명훈은 이미 호상에게도 이야기를 해 두었다고 덧붙였다.
삼화실업에서 가장 처음 그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영진이었고, 그가 노력하던 2년 동안 ‘힘들게 뭣하러 고생을 하냐’는 둥 ‘잘 시간도 부족한데 그냥 푹 자는 게 어떠냐’며 그가 성공할 거라는 생각을 거의 않던 어른들은 남들은 보통 4~5년 동안 노력해도 따기 힘든 자격증을 2년 만에, 그것도 황금빛 1종 자격증을 따 오자 크게 놀랐었다.
특히 사장이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명훈은 영진이 처음 1년째 되는 시험에서 떨어지자 함께 공부하자고 먼저 제안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고, 영진이 1종 자격증을 취득한 연도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지만 그 다음해에 응시하여 역시 1종 자격증을 취득했다.
뒤늦게 뭔가를 느낀 호상 역시 불타올랐기에 명훈과 영진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아무래도 세밀한 작업은 솜씨가 부족해 3종 자격증 취득에 그쳤다. 호상은 그 정도로도 무척 만족스러워 했지만.
1종 보통 자격증을 가진 기술자는 캡슐 생산이나 관리업체 어느 곳에 이력서를 내밀어도 그럭저럭 데려가는 수준, 하지만 요즘은 취업난이 심해서 서로 인맥이나 학연, 지연을 따져 우선순위로 일자리를 주기에 실력이 좋지만 인맥이 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OS관리나 세부 분해 조립이 불가한 3종 자격증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몇몇 부분의 수리나 교체는 할 수 있으니 호상만 있어도 명훈과 둘이서 그럭저럭 일을 꾸려 갈 수 있을 테지만, 명훈은 좀 더 크게 벌릴 생각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