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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영진은 좁은 욕실로 달려 들어가 옷을 입은 채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을 맞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을 태우고 있는 용암과도 같은 뜨거움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사장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죽은 사장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저런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힘들게 싸우다 쓸쓸하게 패배한 것이다.
“…….”
알몸으로 방에 돌아온 그는 캡슐의 소파에 길게 누워 캡슐의 덮개를 닫았다.
얼마를 벌어야 할까?
10억? 100억?
얼마를 벌어야 부자가 되는 걸까?
아마도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평생을 걸려도 불가능하리라.
그때 문득 카페에서 명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돈이 좀 된다던데.’
그 말이 귓가를 맴돌며 사라질 즈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부랑자 같은 놈이 내 비싼 구두에 먼지를 묻혀?’
‘하여간 가난한 동네는 오면 안 된다니까. 더러워서.’
“…….”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한 그는 에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현금 거래에 관해 훑어보았다.
기본적인 환전 환율부터 수많은 아이템들. 아직은 서비스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괜찮아 보이는 물품들은 별로 없었지만 성사되고 있는 액수를 보아 잠재적인 가능성은 충분히 보였다.
“해 보자. ……해 보겠어.”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우윅,구윅
코끼리처럼 거대한 몸통을 가진 적갈색 늑대의 온몸에는 선인장의 가시가 무수히 박혀 있었다. 멀리서 보면 고슴도치라고 착각할 만큼이나 끔찍한 모습.
고통과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늑대는 낮게 울부짖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대항할 힘이 없는 것이다.
휘이이―
푸욱!
또 하나의 길고 단단한 가시 창이 날아와 목덜미에 쑤셔 박히자, 한때는 사막을 호령하던 거대한 몸은 그 울음을 끝으로 천천히 무너졌다.
네임드 몬스터 ‘세레크’를 무찔렀습니다.
“으하하하!”
케이는 피투성이가 된 레이와 함께 그와 비슷한 몰골로 주먹을 쳐들었다.
잡았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가며 치고 빠지는 혈투 끝에 겨우겨우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처음부터 ‘던지고 빠지는’ 전술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죽는 쪽은 케이가 되었을 것이다.
<사막 늑대 리더 세레크의 뼈투구>
종류 : 투구 방어력 : 15 내구력 : 100/100
무게 : 10 사용제한 : 없음 인벤토리 중첩 : 불가
사막 늑대들의 오랜 지도자 세레크의 머리뼈.
광포한 사막 늑대들의 지도자답게 굵고 단단한 뼈로 이루어져 있다. 사막의 늑대들, 혹은 보통의 개과 몬스터들이 보면 두려워할 것이다.
부가 옵션 : 개과 동물들에 대한 공격력 20%, 방어력 20% 증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 가죽과 고기를 발라내는 레이를 보던 케이는 기본적으로 떨어진 잡템들 사이에 있던 큼직한 머리뼈를 주워 확인한 뒤 오오, 탄성을 질렀다.
“이것은 좋은 투구다!”
40레벨대의 네임드 몬스터답게 제법 그럴싸한 아이템을 준 것이다.
쓰고 있던 선인장 뚜껑을 벗고 그것을 써 보니 방어력 10 차이가 심리적 안정감을 더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고 나서 다시 벗어 버리고 선인장 뚜껑을 도로 얹는 케이를 본 레이는 자신이 시체에서 수습한 가죽과 뼈, 고기 중 반을 건네며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투구라며?”
“더위 내성 10%. 벗으니까 숨을 못 쉬겠어.”
선인장 뚜껑에 붙어 있던 옵션이 아까운 것이다.
“그렇게 차이가 나나?”
다시금 갸웃하며 자신의 선인장 뚜껑을 벗어 본 레이는 조금 전 케이처럼 몇 초 만에 다시 눌러 쓰며 얼굴을 굳혔다.
“이러다가 이거 평생 못 벗는 거 아냐?”
“겨우 10%인데…… 적응을 해 봐야 하나.”
다시금 뼈투구로 바꿔 쓴 케이는 레이가 준 잡템들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으아아, 하며 또다시 투구를 바꿨다.
“더워!”
“곤란하네.”
웃으며 고개를 젓는 레이. 케이는 마주 웃으며 뼈투구를 내밀었다.
“너 써라. 형이 주는 선물이야.”
“사양할게.”
“선물이래두.”
“쪄 죽일 셈이야?”
“…….”
“컹! 컹!”
옥신각신하던 사이 언덕을 넘어 나타난 사막 늑대 한 마리.
녀석은 증발하고 있던 세레크의 시체, 이제는 쓸모없는 부위와 내장만 남아 있던 그것을 보고 화가 난 듯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얼른 전투 준비나 하셔.”
다시금 검과 방패를 고쳐 들며 말하는 레이에 케이는 팍 구겨진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주면 고맙다고 넙죽넙죽 받을 것이지.”
그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가시 창을 두 손으로 고쳐 들기 위해 다른 손에 있던 뼈투구를 머리에 얹었다. 뭔가가 걸리는 느낌.
“뭐가 이렇게 걸려.”
선인장 뚜껑을 쓰고 있었던 것을 깜빡한 그는 창을 내려 두고 두 손으로 뼈투구를 잡고 힘껏 눌러썼다. 으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쑥 들어가며 낮은 종소리가 들렸다.
스킬을 얻으셨습니다.
행동 스킬<순 억지로 아이템 조합>
두 개 이상의 아이템을 서로 합쳐 그 효과를 중첩시킨다.
숙련도에 따라 조합 성공률과 중첩 효과가 상승한다.
귀하의 전용 스킬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으잉?”
“뭐해? 창 안 던지고.”
먼저 창 하나를 던지던 레이가 멀뚱멀뚱 서 있는 케이를 다그쳤고, 케이는 앞에 떠오른 선택지에서 얼른 ‘네’를 선택한 뒤 바닥에 있던 가시 창을 주워 앞을 노려 던졌다.
푸컥!
오랜만에 제대로 던져진 창은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침을 흘리며 달려오던 덩치 큰 늑대의 미간에 쑤셔 박혔다.
제대로 터진 치명타 한 방에 중심을 잃고 무너져 뒹구는 늑대!
“캬오오……!”
단발마의 비명! 하지만 이제 사막 늑대 한 마리 정도는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가시 창만 쭉 사용하다 보니 ‘급조된 창술’의 스킬 레벨이 10이 되어 ‘조잡한 창술’이 되었고, 가시 창 던지기를 많이 했더니 투창술 스킬도 생겨 그럭저럭 많이 오른 상태였다.
어감은 비슷하지만 확실히 전보다 올라간 창의 명중률은 투창에도 그만큼의 효과를 주었다.
창술 관련 스킬들이 꾸준히 올라가다 보니 이러다 창술가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의 레벨은 이미 30대. 사막에서 뼈가 굵어 가고 있었다.
“뭐야, 그 투구는?”
늑대의 잡템을 수거해 오던 레이는 케이가 벗어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던 연두색의 뼈투구를 보며 물었다.
“나도 지금 보는 중이다. 뭔가 저지른 것 같긴 한데.”
<선인장 냄새가 나는 세레크의 뼈투구>
종류 : 투구 방어력 : 10 내구력 : 79/80
무게 : 10 사용제한 : 없음 인벤토리 중첩 : 불가
사막 늑대 리더 세레크의 뼈투구에 사막 거대 선인장을 으깨어 발라 말린 투구. 선인장의 효과가 더해져 사막에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억지로 만진 탓에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부가 옵션 : 더위에 대한 내성 10%.
개과 동물들에 대한 공격력 10%, 방어력 10% 증가.
“역시 좋은 투구다.”
다시 머리에 쓴 케이는 원래의 뼈투구에서 방어와 내구력, 옵션 등에서 많이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더위에 대한 내성은 제대로 남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다시금 새로 얻은 스킬을 확인해 보고 흐음, 턱을 만지작거렸다.
“부서질 걸 각오하고 해서 생겨난 건가?”
아이템 조합.
당장은 이 정도지만 생각해 보면 활용도가 무척 넓었다. 게다가 전용 스킬이라 함은 특정한 스킬을 발생시켰을 경우 최초의 유저가 원할 시 그 유저의 전용 스킬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고로 지금까지 행했던 사람이 없었거나, 행했어도 전용 스킬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전용 스킬을 거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최초라고 보는 게 맞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