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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잘 차려입은 한 남성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한데 그는 승균은 쳐다보지도 않고 수연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아냐. 곧 끝나니 기다려.”
두 사람은 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누구시죠? 지금 저희 부부가 이야기 중이니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승균은 낯선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도, 아내인 수연도 승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내가 좀 전에도 이야기했잖아, 우린 이제 끝났다고. 난 당신과 더 이상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리고 여기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마. 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너무도 단호한 말.
눈앞의 남자가 아내의 애인이라는 말에 승균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이미 마음이 떠난 여인에게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련을 버리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듯했다.
“그럼 승연이는 어떻게 할 거야?”
승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수연이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수연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받았다.
“그건 당신이 키우지 그래? 새로 출발을 하려는 사람에게 애가 딸린다면 너무 힘들지 않겠소?”
승균은 잠시 남자를 노려보다 다시 수연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당신의 인생을 위해 승연이까지 버리면서까지 새 출발을 하고 싶은 거야?’
승균은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으로 수연을 쳐다보았다.
그런 승균의 눈빛이 부담되는 듯 수연은 한동안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결국 수연은 꼭 다문 입을 열어 힘겹게 말을 하였다.
“승연이는 당신이 키우도록 해.”
그 순간, 승균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통감했다.
아들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새 출발을 원하는 수연의 마음을 확인한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승균은 수연과 남자를 한 번씩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알았다. 우리의 인연이 이 정도였다니……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주지.”
승균은 애써 담담히 말을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져 가는 승균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더는 참지 못한 듯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남자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는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남자는 수연의 애인이 아니었다.
그저 수연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 뿐인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남자가 보여 주는 모습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남자의 정체는 YM엔터테인먼트의 사장으로, 우연히 바에서 일을 하는 수연을 보고는 스타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판단해 스카웃을 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남자는 수연이 생각보다 나이가 많고, 또 아이가 있는 유부녀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연의 사정을 알게 된 남자는 족쇄가 될 것이 분명한 승균을 떼어내기 위해 수연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몇 년만 고생하면 많은 인기와 부를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20대 후반에 자식까지 낳은 수연이지만, 겉보기에는 아직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아가씨로 보여졌다.
그렇기에 남자는 수연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남자의 말에 수연도 귀가 솔깃했다.
어려운 형편에 가족 모두가 고생하느니, 자신이 빠져나감으로써 남편이 시댁과 다시 인연을 맺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못 이기는 척 YM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김영민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수연의 생각으로는 오직 이 방법만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차가운 가면을 쓰고 승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고 이를 악물며 이혼을 요구했는데, 승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모든 것을 그냥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영민이 들어오는 통에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냉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은 수연이지만, 승균이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멀어지는 남편에게 달려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그러니 용서해 달라고.
하지만 착한 그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 넣은 지금, 수연에게는 그럴 용기가 차마 없었다.
그저 흐느껴 오열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흑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승균 씨. 정말로 미안해요…….”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모습에 영민은 말없이 기다렸다.
수연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하자 이윽고 영민이 입을 열었다.
“수연아, 일단 네 숙소로 가자.”
영민은 소속 연예인들이 머무르는 숙소로 수연을 데려가려 하였다.
하지만 수연은 아직 이혼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에 그동안만이라도 아들과 함께하고 싶어 영민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에 영민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계약을 맺은 상태라 너무 몰아붙이다가는 역효과가 날 거라는 생각에 순순히 허락을 한 것이었다.
“좋아. 그럼 그동안만이라도 아들과 함께 있도록 해. 하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너도 해야 할지 잘 알 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커피숍 밖으로 나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영민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어딘가로 전화를 하였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였습니다. 예, 예. 그럼 회장님, 약속대로 저희의…….”
무언가 은밀한 거래가 있었는지, 영민은 회장님이라 부르며 통화 상대에게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 나갔다.

*
*
*

한편, 수연의 이혼 요구에 충격을 받은 승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과 의절까지 하며 지금의 가정을 꾸렸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부정된 것이었다.
그동안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에 힘든 줄을 모르는 승균이었다.
‘그녀는 아니었나. 모든 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던가?’
승균은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커피숍을 나와 정처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한강이 보이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복잡한 생각에 방황하듯 걸어온 것이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균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내리려던 찰나, 강물 위로 승연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었다.
조금은 여성스러운 아들의 이름.
그녀의 이름에서 한 글자,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떼어 지은 소중한 아들.
그때만 해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 없고, 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터라 축하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승균은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더는 수연이 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소중한 아들마저 포기한 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새 출발을 하겠다는 수연에게 연민이 생겼다.
너무나 착하고 아름답던 여인, 수연.
그랬던 그녀가 자신을 만나 생활고에 찌들어 자식까지 포기하게 된 것이다.
승균은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찌하여 순수하던 그녀를 망쳐 버리게 된 건지.
하지만 그런 후회도 잠시였다.
당장 앞으로 헤쳐 나갈 일이 막막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승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더 걱정이 되었다.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아들이라 앞으로 엄마 없이 홀로 커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적정이 된 것이다.

*
*
*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승균의 눈에 수연의 신발이 보였다.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방으로 들어서 보니 수연이 승연을 껴안은 채 울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승연은 연신 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수연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런 승연의 모습에도 안 된다고만 말하는 수연의 모습에 승균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더는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승균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산 승균은 곧장 집 근처 공원으로 향하였다.
비어 있는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승균은 소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술도 잘 하지 못하는 승균이지만, 그의 몸으로 들어가는 소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정신적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불량스러운 무리들이 승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 공원은 인근 불량배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
대변혁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치안이 불안정해져 더욱 이러한 무리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전에는 경찰 같은 존재가 있어 국민들을 위해하는 행위를 적절히 단속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대변혁이 진행되며 국가의 기능이 일부 마비되었을 때, 그러한 틈을 타 힘을 가진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들은 총기마저 보유하여 약해진 공권력과 대립하며 자신들의 세를 떨치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렇게 세력을 불린 조직은 또 다른 조직과 항쟁을 벌여 흡수하거나 연합을 맺어 점점 거대화되어 가는 현상을 보였다.
급기야 합법적인 간판을 내건 조직은 자신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승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은 그런 커다란 조직과는 관련이 없는, 이곳 토박이들이 만든 불량 서클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이런 불량배들이 거대 조직들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존재였다.
확고한 조직의 질서가 잡혀 있지 않은 탓에 의외로 이런 자들이 더욱 잔인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불량배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에 승균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불량배들의 입장에서 승균은 적대하는 세력이거나, 아니면 멋도 모르는 먹잇감인 셈이었다.
조심스럽게 승균을 살피던 불량배들은 이내 먹잇감 중 하나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이, 형씨.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 들어온 거야.”
불량배 중 한 명이 시비를 걸며 승균이 들고 있던 술병을 후려쳤다.
한쪽으로 힘없이 굴러 떨어지는 술병.
승균은 바닥을 구르는 술병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불량배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외모.
하지만 곧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봉지에 든 새로운 술병을 꺼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승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