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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니라, 이곳에 이승균님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훈은 두서없는 명한의 말에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승균이 자신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승균이 입사원서를 낼 때부터 이미 계획이 되어 있던 사안이기에 종훈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중이었다.
한데 이명한 차장이 갑자기 무슨 일로 승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설마 이제황 회장이 계획보다 일찍 승균을 집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제삼자이기에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요?”
“그게 말이지요…….”
이명한 차장이 망설여지는 것이 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곧 자신의 속내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게 아니라…… 이것은 사장님만 알고 계십시오. 지금부터 하는 제 말은 전적으로 MS 그룹 내 임원진들의 생각이니 이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사장님이나 저나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명한은 종훈에게 협박을 하듯 은근하게 말을 하였다.
사실 그의 말은 종훈이 생각하기에도 무척이나 타당했다.
자신의 친구인 상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그리고 장장 6년여에 걸쳐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 와 승균이 회사로 돌아온다면 분명 흔들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룹에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종훈은 명한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이승균님께는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까지 마음을 굳히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승균님이 조금 더 밖으로 돌았으면 하는 것이 저나 그룹 경영진의 생각입니다.”
명한은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을 마치 MS 그룹의 다른 경영진도 그렇다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황 회장이 지시한 것을 어기고 자신이 임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어떻게든 승균의 복귀를 늦추려 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사실 종훈도 이제황 회장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에서 승균을 그렇게 대하는지 아직까지 전혀 짐작을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이제황 회장의 의중이 여전히 승균에게 있는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현재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예전 승균에게 기대하던 바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상균의 측근인 이명한 차장과 같은 이들은 어떻게든 승균이 복귀하는 것을 늦춰 상균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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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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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균은 아침 일찍 집에 들러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회사로 출근하였다.
승연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원 대출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승균은 출근을 하자마자 과장인 태연에게 직원 대출 서류를 제출하였다.
태연은 승균이 제출한 대출 서류를 검토하고 빠진 것이 있나 꼼꼼히 확인한 다음 부장에게 서류를 넘겼다.
아마 별 이상이 없다면 승균의 대출은 3일 안에 무난하게 이루어질 것이었다.
대체로 백호 PMC의 직원―용병―들이 대출을 신청할 때는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신속하게 처리를 하는 편이었다.
또한 은행들에 비해 대출 심사가 그리 까다롭지도 않아 늦어도 3일 정도면 완료가 되었다.
“승균 씨, 부장님께 대출 서류를 올렸으니 별 이상이 없는 한 대출이 완료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과장님.”
승균은 나이는 어리지만 이것저것 자신을 위해 신경 써 주는 태연에게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승균은 알까?
그렇게나 신경 써 주고 있는 태연이 사실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사실 대학을 다닐 때 승균은 무척이나 유명하였다.
대그룹의 후계자이면서도 언제나 남에게 친절하고, 적당한 키에 꽃 미남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적당히 잘생기고, 또 주위의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아는 카리스마까지 갖춰 많은 이들이 승균을 선망했다.
태연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눈에 승균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몰래 승균에 대한 짝사랑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승균이 졸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는 바람에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이 나 버렸다.
그 뒤로 태연은 승균 같은, 아니, 그와 비슷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나이를 먹어 간 것이었다.
물론 그래서인지 일에 전념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중견 기업인 백호 PMC에서 과장이란 직책을 맡을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승균이 백호 PMC에 입사 신청을 한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무척이나 놀란 태연이었다.
승균의 집안이 어떻다는 것을 대학 시절에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비록 승균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태연은 면접 당시 안내를 해 주면서 바로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면접을 보러 온 승균에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모른 척 넘어갔고, 승균이 자신이 있는 총무부로 왔을 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그랬기에 승균이 빠르게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태연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또 이번에 사고를 당했을 때에도 태연이 나서서 회사에 승균의 사정을 설명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승균이 6개월간 보여 준 능력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태연이 보고할 때 아무 말 없이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승균의 대출 서류가 반려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승균이나 태연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동안 보여 준 승균의 근무 태도라면 충분히 대출이 이루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태연이 이유를 알아보니 계약직이라는 사유 때문에 대출이 반려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출 약관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긴 했지만, 그동안 그런 이유로 대출이 반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려운 때에 대출이 반려된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이미 위에서 그렇게 판단을 내렸으니 태연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승균 씨, 어떻게 하죠? 지금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하, 조금 답답하기는 하네요. 정식 직원이 아니라서 대출이 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승균이 태연을 오히려 다독여 주자 그녀는 마치 자신이 대출을 막은 것만 같아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태연은 갑자기 승균에게 자신이 수술비를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엉겹결에 나온 말이라 태연은 혹시나 승균이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태연의 급작스런 제안에 승균은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출이 거절된 것에 암담해하던 승균에게 태연의 느닷없는 제안은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다행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듯한 승균의 모습에 태연은 자신도 알지 못하게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비록 제가 많은 돈을 모아 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유가 좀 있으니 그것을 빌려 드릴게요.”
승균은 태연의 제안이 기쁘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보여 준 태연의 친절에 대해 자신은 보답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또 이번 대출이 거부된 이유가 자신이 계약직인 탓이란 생각에 승균은 과감하게 정규 용병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까지 태연에게 신세만 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승균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결심한 것이었다.
하여 태연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 정중히 거절했다.
“과장님의 제안은 고맙지만, 이번 문제는 제가 해결을 해야겠네요.”
“아니, 왜?”
태연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승균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이 알기로 현재 승균은 집안과 인연을 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어디에서도 승연의 수술비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원 대출에 대하여 알려 주었을 때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 자신이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제가 정직원이 아니라서 대출 신청이 반려되었으니, 정직원이 되면 그만 아닙니까?”
승균이 정직원이 되겠다는 말에 태연은 일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약직인 승균이 어떻게 바로 정직원이 된단 말인가.
의문이 들어 그를 쳐다보던 태연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혹시…… 승균 씨, 지금 회사에 용병으로 등록을 하겠다는 말이에요?”
태연의 말에 승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록 지금처럼 서류를 다루는 일이 아닌 직접 위험한 현장에 가 몸으로 뛰어야 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피하면서까지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승균은 길이 있는데 어렵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위험한 곳에 지원하는 게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옳은 일인지는 지금 당장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백호 PMC와 같은 민간 군사 기업은 상시로 용병들을 모집하고 있기에 승균의 지원은 금방 처리가 되었다.
어차피 승균은 백호 PMC에 계약직으로 근무를 하고 있는 처지.
회사로서는 그저 돈을 더 주고 위험한 현장에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셈이니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민간 군사 기업에서는 수요보다 공급이 너무도 적기 때문에 수시로 용병 모집을 하고는 했다.
사무직이야 야근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처리가 되지만, 부족한 용병은 다른 것으로 대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용병들에게 무리하게 작업을 시켰다가는 피로도가 높아져 기존의 일마저 망칠 위험이 있기에 언제나 필요한 적정 숫자를 채워 줘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민간 군사 기업들은 군이 파견을 나갈 수 없는 곳에서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그 위험수위는 당연 높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현장이든 사고가 많아 용병의 보충이 절실했다.
다행히 백호 PMC는 신용도가 높아 계약자들이나 용병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아무튼 승균은 승연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용병으로 지원하고 다시 대출 신청을 하였다.
그 일로 인해 백호 PMC의 최종훈 사장은 무척이나 머리가 복잡했다.
사실 승균의 대출서류가 반려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종훈과 총무부 부장만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승균의 신분에 관한 문제였다.
MS 그룹의 회장인 이제황 회장이 사전에 지시를 내렸기에 승균의 직원 대출이 반려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