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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4화)
제2장 홍안의 소년(2)


시안나는 잠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친구를 사귀거라.”
“싫습니다.”
내 즉각적인 대답에 그녀는 또 한 번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부연 설명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귀찮습니다. 그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은요. 뭐, 나중에 그 녀석들도 좀 머리가 굵어져서 말이 좀 통하면 또 모를까요? 어쨌든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럼 넌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을 작정이냐?”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어쨌든 그녀도 더 이상 날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넌 보통 아이는 아니구나. 알았다! 더 이상 작은 그릇으로 널 옭매이려 하지 않으마. 그럼 족장이 되거라.”
“…….”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 나더러 족장이 되라고? 시안나가 말했다.
“아들아! 인생에는 목적이 필요하단다. 하지만 아무래도 넌 사는 목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너에게 목적을 지워 주마. 우리 묘인족의 족장이 되거라. 물론 그게 언제가 되었든 상관은 없다.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앞으로 그것을 위해 정진했으면 한다.”
“끄으응.”
하지만 말이야. 내가 족장이 된다는 건 내 손으로 칸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소리란 말이지. 어쨌든 그 재수 없는 칸도 결국은 당신 남편 아니던가?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슬쩍 그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러려면 제가 아버지와 싸워야만 합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어머니?”
물론 그녀도 내 고민을 어느 정도 눈치 챈 것인지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다. 네 말대로 그는 이미 나에게 관심을 접은 남자다. 최강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될 수 없다면 최강의 자식을 가진 어미라도 되고 싶다.”
“…….”
뭐, 결국 시안나도 전형적인 묘인족 여자라는 건가?
나는 시안나의 말에 잠시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내가 남과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는 해도 그녀가 내 어머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긴,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도 못 들어드리는 후레자식이 될 수는 없지. 하지만 이거, 꽤 귀찮은 일이 되겠는걸.’
내 인생 모토가 ‘일단 귀찮은 일은 피하고 보자’이지만…… 아무래도 이 경우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한 번 정도는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어머니를 위해서 말이다.
결국 그렇게 결심을 굳힌 내가 시안나의 손을 놓고는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내가 일족의 족장이 되는 거란 말씀이시죠?”
그리고는 곧 발길을 돌려 어딘가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시안나는 도리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지금 어딜 가는 거냐?”
내가 말했다.
“족장이 되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족장이랑 맞짱 뜨러 갑니다. 하하!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지금 바로 족장이 되어서 돌아올 테니까요.”
“카…… 카이렌?”
설마 내가 지금 당장 뛰어들지는 몰랐는지 시안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만류하려 들었다.
“내…… 내 말은 지금 당장 하라는 게 아니다. 넌 아직 성인도 아니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훗! 지금 못하는 일을 나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뭐,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죠.”
“카이렌.”
물론 그녀도 묘인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훗! 같은 묘인족이라면 아줌마(?)가 이팔청춘 팔팔한 사내자식을 당해 내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원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 후후!
어쨌든 나는 시안나가 나를 힘으로 막기 전에 얼른 집 울타리 밖으로 몸을 날려 버렸다.



제3장 묘인족의 족장이 되다(1)


간만에 귀찮은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나는 그보다 훨씬 더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여어! 이게 누구야? 겁쟁이 카이렌 아냐?”
기껏 집 밖으로 나섰더니 바로 케린 애들과 딱하고 마주쳐 버린 것이다.
케린.
그는 나와 같이 칸 족장의 아들이면서 재수 없게 나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난 내 또래의 묘인족 소년이었다.
어쨌든 생긴 것도 칸을 판박이처럼 빼다 닮은 녀석으로 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는지 또래치고도 꽤나 강한 편이었다.
물론 케린이 똘마니로 데리고 다니는 샤이카와 카인, 그리고 케린에게 바짝 붙어 있는 세이란이라는 여자 묘인족도 꼬맹이치고는 상당히 강한 녀석들이었다.
뭐! 이 경우에는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이 녀석들은 내가 집 밖에 잘 나오질 않다 보니 내게 멋대로 겁쟁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치고 박고 싸우면서 크는 묘인족의 관습을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싸움을 통해 자연스레 서열이 결정되는데 나는 분명 그런 묘인족의 관습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있었으니 말이다. 고로 내 서열은 당연히 종족 내에서도 꼴찌.
게다가 홍안이라는 점 때문에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녀석이 부지기수였다.
“젠장! 귀찮은 놈들을 만났군.”
그렇다고 내가 이런 꼬맹이들을 무서워할 리는 만무하고…….
어쨌든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 꼬맹이들은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울컥해서는 소리쳤다.
“이것 봐라? 이 자식 겁 대가리를 상실한 거 아냐?”
“케린! 잘됐다. 이참에 내가 나서서 저 새끼 눈깔을 뽑아 버릴 테니까…….”
그래도 케린은 골목대장답게 피식 웃으며 샤이카와 카인을 손으로 제지했다.
“관둬, 샤이카. 어쨌든 이 녀석도 내 동생이라고…….”
그리고는 케린이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너도 내 동생 중 하나니까 이참에 충고 하나 해 두지. 이제 슬슬 마음을 다잡고 그만 내 밑으로 들어와라. 아니면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거다. 안 그래도 서열도 낮으니만큼 슬슬 딴 녀석들의 괴롭힘도 시작될 거고 그때는 아무리 나라도 널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
흥! 뚫린 입이라고 정말 말은 잘하는군.
사실은 홍안의 묘인족이 자기 쫄따구라고 자랑하고 싶은 거지? 나도 그렇게 바보가 아니란다, 꼬맹아!
뭐! 어쨌든 세이란이라는 이름의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묘인족 계집애까지 날 경멸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조금 서운하기는 하다.
‘저 녀석은 아직 성인도 아닌 주제에 벌써부터 여자가 따라다니는군. 역시 힘은 가지고 봐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난 사실 그것조차도 귀찮았다. 내가 여자 경험이 전혀 없는 숙맥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털북숭이 묘인족 여자는 내 취향하고도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결국 이 녀석들을 상대하기가 귀찮아진 나는 그냥 머쓱하니 이마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생각해 보지.”
“흥!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들어 본 말 같은데?”
그런데 아쉽게도 케린은 이번만큼은 날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케린이 내가 가려던 방향을 일부러 막아서며 내 어깨를 꽉 움켜잡은 것이다. 그것도 손톱을 바짝 세워서 피부를 뚫고 들어갈 정도로 꽉 말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하지만 난 그냥 퉁명스레 케린을 바라보았다.
케린은 아무래도 내가 잔뜩 쫄아서 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기대한 모양이었지만(물론 그러라고 은근슬쩍 손에 엄청 힘을 줘서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도 했다) 그 정도에 무너질 내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케린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놓고는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은 못 간다. 선택해. 내 밑으로 들어오든가!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한판 붙어 보든가!”
그 말에 나는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다른 선택은 전혀 없는 거냐?”
내 말에 케린 대신 세이란이라는 계집애가 우우, 야유를 하며 소리쳤다.
“케린! 그럴 것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저 재수 없는 눈알을 뽑아 버려. 그러고 나서 보내 준다고 해.”
그 말에 나머지 두 떨거지들도 마음에 드는 소리라는 듯이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그 말에 케린도 바로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렇군. 만일 눈깔을 뽑아서 내게 주면 이번만은 그냥 얌전히 보내 주지. 그게 싫으면 내 밑으로 들어와라.”
이거! 미치겠군. 이 철없는 자식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결국 나도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어머니의 얼굴을 봐서라도 귀찮은 일만큼은 최대한 피해 보겠다는 생각인데 말이야. 따지고 보면 지금도 상당히 귀찮은 일을 하러 가는 거잖아?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겠군.
퍼억.
결국 나는 케린의 얼굴에 바로 주먹을 날려 버렸다.
“크으윽.”
물론 부지불식간의 공격이라 케린은 미처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나마 내가 손톱을 뽑아 들지 않고 그냥 주먹을 쥐고 휘두른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 녀석의 안면이 반은 날아가 버렸을 테니까.
하긴! 꼬맹이들을 상대로 흥분하면 어른이 아니지.
내가 말했다.
“적당히 해라, 꼬맹이들아.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
“이 자식이…….”
샤이카와 카인은 케린이 비겁한 암수에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겁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말이야. 너희 공격은 너무 뻔하다고…….
퍼벅.
“컥!”
“크으윽.”
나는 샤이카와 카인의 협공을 가볍게 피해 버리고는 그 두 녀석의 뒤통수를 양손으로 손날을 세워 시원하게 후려 갈겨 버렸다. 결국 두 녀석은 바로 정신을 잃고 철푸덕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뭐! 손톱은 안 세웠지만 묘인족의 힘으로 후려갈겼으니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들이 강한 건 모두 묘인족 특유의 힘과 민첩함 때문이었다. 그러니 같은 수준에서 놓고 보면 이 녀석들의 몸놀림이라는 건 결국 기본도 안 된 애송이들의 드잡이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꼬맹이들아. 이래 봬도 나 역시 대한민국의 특공대 출신이라고. 특공 무술까지 익힌 내가 너희 같은 애송이들한테 당할 것 같으냐?’
“이…… 이 자식……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케린은 아직도 내가 요행을 부린 거라 생각한 듯 이내 손톱을 기다랗다 뽑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진심인지 열 개의 손톱에는 은은히 마나까지 서려 있는 게 아닌가!
“거참! 미성년 또래끼리의 대결에서 마나를 쓰는 건 금기 아니었던가?”
마나란 이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되는 자연의 힘이라고 한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 힘을 자기 몸 내부에 갈무리해서 그걸 다시 검으로 내뿜는 게 가능한데 그게 가능한 인간을 보통 소드 나이트(Sword Knight)라고 한다던가?
물론 그건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지속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만 간신히 얻을 수 있는 지고의 경지라고 들었다. 그러나 묘인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이른바 선택 받은 종족이었다.
결국 묘인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소드 나이트인 셈인데…… 하지만 너무 위험한 기술이라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묘인족끼리의 대결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된 기술이기도 했다.
사실 성인도 안 된 놈이 저렇게 마나를 내뿜는 것도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다. 대부분은 성인식을 거치고 나서 마나를 다룰 줄 알게 되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게 어른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크게 치도곤을 당할 일이었다.
“이 자식! 죽어 버려.”
물론 케린은 서열 꼴찌의 녀석에게 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런 건 안중에도 두지 않고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앞뒤 안 가리고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흥분해서 달려드는 녀석을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쉽다.
퍽.
나는 UFC(미국 무규칙 이종 격투기 대회)에서 페드로 히조가 날려 대던 로우킥을 상상하며 케린의 안쪽 허벅지를 마치 채찍처럼 후려 갈겨 버렸다.
“크헉!”
물론 케린은 제대로 대비도 못했던 만큼 내 공격에 그대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고마운 줄 알아라. 그래도 너 생각해서 뼈가 부러질 정도로는 안 찼다.”
어쨌든 녀석이 내 발길질에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리자 나는 마무리로 미들킥으로 녀석의 머리를 한 번에 후려 갈겨 버렸다.
쿠당당탕.
“어? 이런! 내가 조금 심했나?”
어쨌든 내 로우킥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녀석이라 미들킥 역시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깨끗하게 들어가 버렸다. 한마디로 케린 녀석이 내 일격에 정신을 잃고는 그대로 바닥에 뒹굴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