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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6화)
제4장 묘인족이 가진 세 개의 신기(1)
미성년의 묘인족이 족장을 쓰러트린 것, 그 전대미문의 사건은 확실히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첫 번째로 재기된 문제가 진짜로 내가 칸을 쓰러트린 건가 하는 사실 확인이었고 두 번째는 아직 미성년인 내가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족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첫 번째 문제는 다소간의 진통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 눈치였다. 어쨌든 정식 대결도 아니고 증인도 케냐라는 젊은 묘인족 여자 하나뿐이었지만 의외로 칸이 선선히 패배를 시인하고 그 사실을 널리 공표해 버린 것이다.
‘하긴! 족장 주제에 그 사실을 숨긴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겠지.’
문제는 바로 두 번째였다.
최고 강자가 족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묘인족에게 있어 불문율에 가까웠다.
하지만 과연 이제 세 살이 된 나를 일족 전체를 책임지는 족장의 자리에 앉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족들도 모두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홍안의 묘인족이라는 사실도 꽤나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 결국 내가 이긴 건 내 눈이 홍안이라서지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는 식의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말이야. 사실 난 그때 특별히 마나를 쓴 것도 아니거든?’
물론 내가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마나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번에 직접 해 보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아직 미성년인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나는 묘인족 최강이라는 칸과 비교해도 그다지 꿀릴 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이번 싸움에서는 그 힘을 눈곱만큼도 빌린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오직 내 실력만으로 칸을 쓰러트린 것이다.
“끄응! 역시 귀찮은 짓은 처음부터 하는 게 아니었어.”
결국 나는 그런 논쟁에 슬슬 질려 가기 시작했다. 지금 내 심정을 한마디 표현하면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 정도가 될까?
물론 시안나 역시 기쁨보다는 우려가 더 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시안나가 날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나도 내가 한 짓을 아마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다시 예전처럼 집에서 며칠 더 뒹굴거리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케냐가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카이렌…… 카이렌 지금 어디 있어요?”
“이런…… 케냐? 왜 그러시죠? 일단 진정부터 하세요.”
일단 나보다 먼저 시안나가 나서서 케냐를 달랬지만 케냐는 아무래도 쉽게 진정할 기미가 아니었다.
“카이렌을 불러 줘요. 빨리요.”
결국 할 수 없이 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자 케냐는 부리나케 내 어깨를 쥐어흔들며 소리쳤다.
“카이렌, 제발 칸을 막아 줘. 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그리고는 두 눈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게 아닌가!
“…….”
대뜸 눈물을 질질 짜낸다고 해서 내가 그게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먹을 리가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일단 말을 해야 알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퉁명스레 케냐의 손을 내 어깨에서 걷어 내면서 말했다.
“먼저 사정부터 말하시죠? 내가 신도 아니고 무턱대고 막으라고 하면 알아들을 리가 없잖습니까? 칸이 또 뭔 짓이라도 저지르겠답니까?”
내 말에 케냐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 사람이 너한테 패한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하고 있어.”
“네? 뭐라고요?”
그 말에 시안나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결에서 패한 묘인족이 분을 못 참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족장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녀석에게 패한 경우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그냥 짜증이 날 뿐이었다.
‘젠장! 왜 끝까지 날 귀찮게 하는 건데? 졌으면 그냥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란 말이야.’
어쨌든 그도 내 아버지고 내 어머니의 남편인만큼,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냥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칸이 새로 거처로 마련한 집으로 얼른 달려갔다. 내가 일전에 부순 통나무집 대신 거처로 마련한 바로 그 통나무집 말이다.
물론 시안나와 케냐까지 허둥지둥 내 뒤를 쫓아왔지만 그 두 여자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틈이 없었다.
“왔느냐.”
어쨌든 내가 허둥지둥 칸의 통나무집에 도착하자 칸은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른팔에 부목을 한 채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칸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그렇다면 웬만한 설득으로는 통하지도 않겠지! 할 수 없이 나는 케냐와 시안나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카이렌! 이 문 열어. 카이렌.”
물론 케냐와 시안나가 급하게 문을 두드려 대기는 했지만 내가 그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대신 내가 문을 등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 분 다 잠시 거기서 기다려요.”
그리고는 다시 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말했다.
“너! 죽을 생각이라며?”
“케냐가 그렇게 말하더냐? 어쨌든 앉아라. 일단 마지막으로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아무래도 단단히 결심을 굳힌 모양이군. 어쨌든 내가 자리에 앉자 칸도 따라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걸쳐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네가 족장 자리를 이어받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더구나. 그래서 이참에 내가 그냥 물러나기로 했다.”
나는 그 말에 도리어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뭐? 지금 그런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받아라.”
그러나 칸은 이미 내 말은 한 귀로 모두 흘려버리겠다고 작정이라고 한 듯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서 내게 들이밀었다.
“이건 우리 묘인족의 족장에게만 물려지는 삼신기(三神器)다. 카이젤님이 우리 묘인족을 위해서 특별히 내려 주신 신의 물건이지.”
그렇게 말하며 칸이 내민 물건은 의외로 각기 색깔이 다른 세 개의 구슬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자 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구슬을 탁자에 올려놓고 각각의 구슬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붉은 구슬은 가진 자의 모습을 바꾸어 준다. 묘인족의 특이한 모습을 감춰서 족장이 주변의 정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물건이지. 두 번째로 이 푸른 구슬은 족장이 어디에 있든지 묘인족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구슬이다. 물론 이 구슬로 대륙에 있는 모든 묘인족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묘인족이 특별한 마법에 걸려 있거나 마나 동결 팔찌를 차고 있는 경우, 아니면 인간에게 길들여져 묘인족의 본성을 완전히 잊어버린 경우에는 추적이 불가능하다. 즉!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태의 묘인족만 찾아낼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정상적인 묘인족이라면 족장 자신이 원하는 묘인족에게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검은 구슬은…… 이건 나도 모른다. 이 세 신기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대 족장에게 전해 들었지만 그 힘이나 효능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어쨌든 받아라. 이걸 받으면 너도 당당한 묘인족의 족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삼신기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칸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진짜 그런 한심한 이유로 죽을 생각인가?”
칸은 내 말에 그저 한숨만 길게 내쉴 따름이었다.
칸이 말했다.
“내가 죽어야 이 소란을 잠재울 수 있다.”
“그딴 소란은 내가 알 바 아니야. 정말 그딴 시시한 이유로 죽을 생각이냐고.”
내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묻자 칸도 짜증이 났는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젠장!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기왕 할 거면 다 크고 나서나 할 것이지 그사이를 못 참고 이딴 분란을 만들어?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네놈은 내 자존심을 도대체 얼마나 짓밟아야 속이 시원한 거냐? 그래! 기쁘냐? 날 묘인족 최초로 다 크지도 않은 애송이한테 무릎 꿇은 멍청한 족장으로 만든 게?”
쿡!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군. 결국 쪽팔린다는 게 이유였나? 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그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특별해서 그런 거니까.”
“…….”
“음! 이참에 그냥 솔직하게 말해 두는 게 좋겠군. 어쨌든 그 대결은 결코 정당한 결투는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애송이가 아니거든.”
칸이 잠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잔뜩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내가 말했다.
“어쨌든 너한테만은 밝혀 두는 게 좋겠군. 내 과거를 말이야. 사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물론 칸은 그 말을 선뜻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나라도 내 앞에서 ‘나는 전생에 아무개였소’라고 지껄이는 인간이 있으면 아마 먼저 비웃고 봤을 것이다.
“뭐!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다. 솔직히 네 앞에서 헛소리나 지껄일 만큼 나도 그리 한가한 놈은 아니니까 말이야!”
어쨌든 내가 지구에서 강찬우라고 불렸던 시절의 일과 환생계에서의 경험, 그리고 다시 이곳 레바돈의 묘인족으로 태어나게 된 사연을 차근하게 설명해 주자 칸은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침착한 얼굴로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가! 역시 홍안의 묘인족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거군.”
그런데 그 말이 결국 내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
“매번 말끝마다 홍안! 홍안! 젠장…… 착각하지 마. 내가 홍안이라서 특별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강찬우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야. 이건 홍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사실 내가 홍안이 아니더라도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평범한 묘인족의 힘만으로도 너 같은 녀석 정도는 가볍게 요리해 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칸은 내 말에 쉽게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정말 미치겠군. 내가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네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내게 패한 사실에 그리 창피해 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칸은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보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나도 잘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자식한테 패한 것도 사실이고 내가 죽어야 이 소란이 잠잠해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답답한…….”
나는 칸의 저 옹고집에 울컥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어차피 정식 대결도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지금처럼 그냥 네가 계속 족장 짓 하라고.”
“그럴 수는 없다. 날 이긴 이상 묘인족의 족장은 너다.”
“기어코 죽을 작정이냐?”
내가 잠시 눈을 부릅떴지만 칸은 여전히 결연한 태도였다. 결국 칸의 태도에 내 신경이 먼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콰당탕탕.
나는 눈앞의 탁자를 걷어차 버리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바로 칸을 바닥에 때려눕혀 버렸다. 그리고는 그의 목줄에 바짝 손톱을 세워서는 소리쳤다.
“개자식…… 사람 말귀를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네가 뒤지면 내가 피곤하단 말이야. 알겠냐? 응? 너 따위 죽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골치가 아파진단 말이야. 그러니까 죽지 마.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죽지 말란 말이다.”
하지만 흥분한 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칸은 여전히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내 공격에 저항 한 번 안 하고는 마치 세상 달관한 사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나더러 이런 굴욕을 참으며 계속 살아 있으란 거냐?”
“호오? 굴욕?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진짜 굴욕이 어떤 건지 내가 직접 보여 줄까?”
“크으으윽.”
내가 칸의 어깨에 천천히 손톱 하나를 박아 넣자 그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세상엔 말이야. 이보다 더 굴욕적인 일도 넘치고 넘치거든? 법인지 나발인지 때문에 죽여 버리고 싶은 놈도 그냥 둬야만 하는 심정을 네가 알아? 내 반평생을 물 먹인 놈을 고작 감방 몇 년 살게 하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내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하냐고.”
“…….”
“젠장! 계속 죽는다는 소리를 할 작정이면 여기서 네 팔다리를 자르고 혀까지 잘라 내겠다. 내가 널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진짜 굴욕이 뭔지 맛볼 수 있도록 말이다.”
칸도 그제야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내가 한다면 하는 놈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칸의 모습을 보면서 도리어 사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세계는 의외로 참 좋은 곳이더구나. 힘만 있으면 뭐든 다 되거든. 한마디로 힘만 강하면 만사 땡이란 소리지. 내게 족장이 되라고 했던가? 돼 주지. 하지만 내가 족장이 되어서 처음 하는 일은 아마 네놈에게 진정한 굴욕이 뭔지 맛보여 주는 일이 될 거다.”
“크…… 큭! 그럼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아무래도 내 협박이 조금 통하기는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야 좀 말귀가 통하겠군. 나는 칸의 어깨에 박아 넣었던 손톱을 한 번에 뽑아냈다.
“크으윽.”
순간 칸의 어깨에서 피가 확 하고 튀었지만 나나 칸이나 둘 다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칸이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내지른 걸 제외하면 말이다.
“너 귀먹었냐? 왜 사람이 몇 번을 말을 했는데도 못 알아들어. 죽지 마.”
하지만 칸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