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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7화)
제4장 묘인족이 가진 세 개의 신기(2)
“네 녀석은 내가 일족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냐? 의외로 잔인한 녀석이로군.”
“흥! 웃기지 마. 남의 눈 신경 쓸 필요 뭐 있어? 결국 나만 당당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진정 강하다는 것 아닌가? 남의 눈 신경 쓰며 전전긍긍 살아갈 생각이면 애초에 자신이 강하다는 생각 따윈 하지도 말았어야지.”
“…….”
칸은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쨌든 ‘남의 눈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칸의 결심이 상당히 흔들리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럼 이제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그냥 살아 있어라. 그럼 내가 적어도 빌어먹을 아버지 대접 정도는 해 주마. 그리고 솔직히 족장이라는 것도 귀찮아. 귀찮은 일은 그냥 지금처럼 네가 도맡아서 해.”
“……그럴 순 없다. 가장 강한 묘인족이 족장이 되는 건 우리 묘인족의 불문율이다. 그걸 어길 수는 없다.”
제길! 골치 아프군. 산 너머 산이라더니 이제는 또 규율 문제인가? 나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알았다. 그럼 내가 족장이 되어 주지.”
내게 깔려 있던 칸도 비틀거리며 따라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아픈 어깨를 감싸 쥘 뿐, 나처럼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칸의 묘한 시선을 뒤로하고 이번 소란 덕에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묘인족의 삼신기인지 뭔지 하는 걸 하나씩 주워 챙기며 말했다.
“하지만 다들 떠드는 것처럼 아직 이곳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묘인족 전체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런데 칸! 혹시 ‘섭정’이라는 제도를 알고 있나?”
하지만 내 말에 칸은 그저 고개만 갸웃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이곳에도 그런 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어쨌든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는 왕이 어려서 제대로 국무를 보지 못할 때 그 집안의 어른이 나서서 어린 왕 대신 국무를 보는 제도가 있었다. 이른바 ‘섭정’이라는 거지. 네 말대로 내가 묘인족의 족장이 되겠다. 대신 넌 나의 섭정이 되어서 지금처럼 계속 족장 노릇을 해라. 그럼 골치 아픈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꽉 막힌 머리가 쉽게 뚫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 일은 이제껏 묘인족에게는 없었다.”
칸은 여전히 저어하는 표정이었고 나는 삼신기를 손으로 툭툭 던져 가며 그냥 피식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이번에 내가 만들지 뭐. 어때? 내 말대로 섭정이 될래? 아니면 내 손에 팔다리에 혀까지 잘려서 폐인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아 볼래? 걱정 마! 적어도 벽에 똥칠할 때까지는 돌봐 줄 테니까.”
“…….”
“물론 반대로 내 섭정이 되어 준다면 적어도 아버지 대우 정도는 해 주마.”
그 말에 칸은 조금 고민을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던 듯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뜩 내 손톱에 꿰뚫린 자기 어깨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륜 아들.”
하지만 나는 그 대답에 그냥 피식 웃어 버렸다.
날 아들로 부른다는 소리는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덜떨어진 아버지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데?”
나는 화해의 의미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칸에게 손을 내밀었고 칸 역시 그 손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묘하네. 삼신기라고 했던가?”
내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묘인족의 보물이라는 세 개의 구슬은 현재 내 손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걸로 저글링을 하는 내 모습이 내심 불안했는지 칸은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망가진다면 그건 이미 신기가 아니겠지. 값싼 중국제도 아니고 말이야. 후훗!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붉은 구슬이 모습을 바꾸어 준다는 건가?”
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변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하고 그 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거라.”
그 말에 내가 예전 강찬우였던 모습을 상상하며 그대로 해 보자 칸의 말처럼 내 모습은 감쪽같이 바뀌어 있었다.
“호오! 이거 신기하네?”
“……혹시 그게 예전 너의 모습이냐?”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면서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다시 나는 묘인족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칸이 말했다.
“어쨌든 그 구슬로는 인간이나 엘프같이 비슷한 크기를 가진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만 변할 수 있다. 동물이나 형태가 다른 몬스터는 물론이고 드워프와 호비트도 불가능하지. 그리고 두 번째 구슬에 정신을 집중하면 현재 묘인족의 모든 위치가 파악될 거다.”
칸의 말대로 지그시 눈을 감고는 푸른 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천구의(天球儀) 속 별처럼 머릿속에 묘인족의 위치가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내가 있는 마을에 대부분의 묘인족이 집중되어 있었고 간혹 저 멀리 희미하게 느껴지는 묘인족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총 수는 대략 일만 정도?
“흠! 묘인족도 그렇게 번성한 종족은 아니군.”
칸이 말했다.
“거기서 원하는 상대를 집중하면 그 묘인족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물론 그자도 환영처럼 생긴 네 모습을 보게 될 거다.”
“흐으으음.”
그 말에 나는 칸의 통나무집 문밖에서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시안나와 케냐에게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마치 빨려 들 듯이 점이 확대되더니 이내 익숙한 묘인족의 모습이 되는 게 아닌가!
“카이렌?”
마치 홀로그램 같은 내 모습에 시안나와 케냐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다.
“헤에! 이거 신기하네.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지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죽겠다는 소리는 안 하겠다는군요. 아! 물론 족장 자리도 승계를 받았습니다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정신을 풀자 어느덧 나는 내가 원래 있던 곳, 즉 칸의 맞은편 자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푸른 구슬을 바라보았고,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칸은 마치 철부지 자식을 보는 어른처럼 피식하고 웃었다.
“훗! 신기하냐?”
뭐! 그 웃음이 조금 불쾌하기는 하지만 신기한 건 사실이라 나도 별반 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검은 구슬을 쥐고는 다시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흐으음.”
하지만 마지막 검은 구슬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쏟아 부은 마나는 고스란히 가져가 버린 주제에 말이다. 마치 내 마나를 처먹는 블랙홀 같은 느낌이랄까?
“마지막 구슬은 아직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 묘인족의 삼신기이기는 하지만 이제껏 그걸 제대로 사용한 묘인족은 없었다. 물론 삼신기는 우리 묘인족밖에 사용하지 못하니 다른 종족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
“흐으음.”
“여하튼 그 검은 구슬은 어쩌면 두 구슬보다 훨씬 더 막대한 마나를 불어넣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사실 아무런 효능도 없고 단순히 마나만 잡아먹는 애물단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걸 확인할 방도는 없는 셈이다.”
나는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검은 구슬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세 개의 구슬을 한곳에 뭉쳤다.
“근데 이건 마치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은 기분인걸! 모습을 바꿀 수도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을과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설마 이걸 가지고 바깥세상이라도 나가 보라 이건가?”
“잘 봤다. 사실 삼신기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지.”
“…….”
칸이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 묘인족은 수도 적고 의외로 힘도 약한 편이다. 결국 이곳 레바돈에서 소수 종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거다. 결국 묘인족의 삼신기는 그걸 위해서 대대로 묘인족의 족장에게 전해지는 거지. 주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해 두는 것도 족장이 가진 본연의 임무 중 하나인 셈이다.”
“흐으음! 그럼 나도 이걸 가지고 언젠가 바깥세상으로 여행을 한번 떠나 봐야 한다는 건가?”
내가 다시 삼신기로 저글링을 하기 시작하자 칸이 끄응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좀 조심히 다뤄라. 쩝! 어쨌든 너도 그걸로 주변 정세를 파악할 생각이겠지만 그건 성인식 이후로 미뤄라. 미성년의 애송이는 절대 묘인족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아무리 너라도 그 불문율만큼은 지켜 줬으면 한다.”
“뭐! 그건 걱정 마. 아무래도 성인이 되기 전에 먼저 해 둬야 할 일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약해 빠진 묘인족 녀석들을 단련시키는 일 같은 거 말이지. 내가 일족 녀석들을 괴롭힐 걸 생각하며 키득키득하고 웃어 대자 칸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뒷일은 내가 대충 수습해 놓으마. 섭정이라는 게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네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냥 계속해 나가면 된다는 거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칸도 알았다는 듯이 나랑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 그리고 말인데…… 혹시 자질이나 실력이 괜찮은 녀석들 중에 말을 잘 들어 먹을 것 같은 녀석들로 한 열 명 정도만 내게 소개시켜 주면 안 될까?”
“응? 또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내 말에 칸은 도리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팔짱을 끼고는 대강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칸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건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해서 나온 결론인데…… 아무래도 우리 묘인족은 힘은 좋은데 기술이 너무 없는 것 같단 말이야. 만일 아버지 당신이 조금만 더 기술이 있었어도 나한테 그렇게 무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우리 묘인족은 꽤 강하기는 하지만 실력 좋은 인간 무인한테는 의외로 형편없이 당하지 않아?”
내 말에 칸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역시나 그랬던 모양이군. 그래서 이번에 내가 묘인족들에게 싸우는 기술을 몇 가지 좀 가르쳐 줄까 하고 생각 중이야. 하지만 나 혼자서 묘인족 전체를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열 명 정도 엘리트를 뽑아서 그들이 사범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시킬 생각인데.”
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 그런가? 그거 좋은 생각이군. 바로 구해 놓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칸은 평소 그답지 않게 약간 주눅이 든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도대체 칸답지 않게 왜 저러는 거지? 칸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음…… 혹시 거기에 나도 포함시키면 안 될까?”
그 말에 결국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쿡쿡대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크크큭! 그러니까 강해지겠다는 욕심이 그 드높은 자존심까지 억눌러 버린 건가? 설마 칸의 입에서 자식한테 배우겠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허…… 험!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네 기술에 내가 손도 못 쓰고 당한 것도 사실이다. 만일 내가 그 기술만 익히고 있었다면 너와의 싸움에도 그렇게 맥없이 당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크크큭! 결국 내게 기술을 배워서 다시 나에게 재도전이라도 해 보겠다는 소리인가? 응? 그런 거야, 아버지?”
“…….”
아무래도 칸의 생각도 그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칸의 생각이 괘씸하기보다는 도리어 호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자존심이 강한 묘인족으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강한 자에게 절대적인 경외를 보내는 묘인족이기에 가능한 결론일 수도 있고 말이다.
‘흠! 그러면 칸은 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이미 수긍한 상태라는 건가?’
어쨌든 내가 성년이 되기까지 남은 2년, 그리고 삼신기로 대륙을 활보하기 전까지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껏 괴롭힐 상대가 칸+아홉 명이니까……. 쿠쿠쿡!
제5장 묘인족을 훈련시키다(1)
칸이 선발한 아홉 명의 사범 예비생은(물론 칸을 제외한 숫자이다)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의외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단 칸을 포함해서 여섯 명은 일족 내에서 서열 6위까지의 실력자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네 명은 모두 미래 가치와 발전성, 그리고 역할 분담의 필요성에 의해 뽑힌 모양인데 그중에는 아직 미성년인 묘인족도 두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쳇!”
그 인물이 바로 케린과 세이란이었다.
물론 케린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묘인족의 훈련을 보조하기 위해, 그리고 세이란은 여자애들의 교육을 보조하기 위해 선발된 멤버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 역시 서열 6위까지의 멤버가 모두 남자뿐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여자 묘인족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선발된 여자 묘인족들이었다. 그나마 문제라면 그 두 여자가 의외로 나랑 안면이 상당히 많은 인물이었다는 것 정도랄까?
“하아아! 설마 어머니까지 이 멤버에 포함될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시안나와 케냐를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 남은 두 명의 멤버는 자신의 적극적인 지원과 칸의 은근한 배려로 결국 그 두 사람이 선택된 것이다.
‘젠장! 이러면 내가 괴롭히기가 좀 힘들어지잖아.’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건 칸의 실책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배울 자세라든가 자질과는 상관없이 무턱대고 강한 녀석, 아니면 조건에 맞는 녀석만 고르다 보니 이것들이 당최 내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