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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8화)
2. 유극문(有極門)(4)


설앵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귀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꼬맹아. 인사는 됐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 다들 신경 날카로우니까 네가 있으면 신경이 거슬려.”
“네.”
어찌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이지만, 나는 설앵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섣불리 떠났다면 어떤 트집을 잡혔을지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비굴해 보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연무전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잠깐! 꼬마야!”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척 봐도 강력한 외공(外功)을 익힌 듯 전신이 단단한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 무기는 검(劍)으로 보였다.
“네, 선배.”
그는 얄팍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뭐라 했지?”
“태오입니다.”
“그래 태오. 여기까지 선배들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냥 발만 아프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잖은가.”
검로를 연습하던 설앵이 인상을 찡그리며 옆에서 외쳤다.
“관둬! 생각이 없는 거야, 낙무(酪務)?”
“설앵. 넌 가만히 있어. 난 그냥 귀여운 후배랑 얘기할 뿐이니까.”
거구의 사내의 이름은 낙무인 듯했다. 설앵의 말을 일축한 낙무는 자신의 검을 들어서 자세를 취했다.
“태오. 유극문의 제일 기초가 되는 소영검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혀 모릅니다.”
“엉? 몰라?”
“네. 배운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도리어 낙무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낙무뿐만이 아니라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들도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그야 당연하다.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무협소설 좋아하는 농부의 자식이었다. 소영검법이란 것도 지금 처음 듣는데 대체 뭘 기대한 거냐? 나는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들었고, 낙무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 좋아. 그러면 내가 시범을 보여 주지.”
휘이익!
갑자기 낙무의 신형이 크게 움직였다. 굉장히 빨랐지만 문주나 제갈휴라고 했던 사람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나마 눈으로 희끗거리는 걸 볼 수는 있는 정도였다. 낙무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휘이이잉!
나는 낙무가 내 주변에서 맴돌면서 빠르게 검로(劍路)와 검식(劍式)을 혼합하는 걸 알아챘다. 무협소설에서 보면 이렇게 무림인이 오두방정을 떨면서 칼을 죽어라 휘두르는 건 그런 경우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멍하니 낙무의 행동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그의 행동이 끝나 있었다.
하단세로 칼을 내린 낙무가 뽐내듯이 말했다.
“이게 소영검법이다.”
“아, 네. 그렇군요…….”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장단을 맞춰줘야겠다. 그러자 낙무는 내게 가검(假劍)을 던져 주며 웃었다. 가검은 날이 세워지지 않은 수련용 검이다.
“하하! 장로의 제자가 될 정도면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겠지? 한 번 하는 데까지 소영검법을 따라해 봐라, 태오.”
본격적으로 질투 나는 놈 물먹이기에 들어간 건가.
‘이런 건 마을에서도 몇 번 겪었지. 무협소설이 아니라도 현실에서 흔히 있는 일이야.’
나는 대충 예상했던 흐름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낙무가 나를 골탕먹이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이 자리에서는 적당히 수치를 당해 주면 적당할 것이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설앵이 끼어들었다.
“애도 아니고 자꾸 유치하게 굴래?”
곱지 못한 눈으로 낙무를 노려보던 설앵이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야, 넌 할 필요 없으니까 가검 이리 줘. 빨리 연무장에서 나가.”
잘 보니까 상당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인형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활기찬 생명력이 느껴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되어 있었다.
“…….”
설앵은 아무래도 수련생들이 나를 괴롭히려는 게 마음에 안드는 것 같았다. 나는 물끄러미 가검의 날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날이 무디게 닳아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해 보죠.”
“뭐?”
“그래 해 봐!”
지켜보던 낙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설앵은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무덤을 파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칼을 휘두르기로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존심 세우기의 차원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뭐하는 거냐!!”
관전하던 수련생들이 깜짝 놀라서 화들짝 제자리로 돌아갔다. 낙무는 바싹 얼어 버렸고, 설앵은 자기는 모른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커다란 사자후와 함께 등장한 원갑 사범은 낙무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냐, 안 했냐!”
“죄송합니다.”
이후로 낙무가 된소리를 듣는 동안에 나는 슬그머니 입구를 빠져나왔다.
내가 소영검법을 한 번 보고 다 외웠냐고?
설령 외웠다고 해도 무협소설에 따르면 웬만한 검법은 내공의 뒷받침이 없으면 온전히 시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상대할수록 지고 들어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어차피 무협소설의 줄거리 대로라면 내가 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또다른 흐름으로 넘어간다는 걸 알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왠지 원갑 사범이 내 위기를 보고 싶어서 일부러 군중 사이에 떨어뜨려 놓은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내가 곤란해지면 원갑 사범이 질책을 들을 테니, 그는 당연히 일이 벌어지기 직전에 나타나서 태연하게 사태를 정지시킬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기왕 넘어갈 전개라면, 내 자존심을 세워두는 편이 낫지 않은가?
아니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사실 대충 보고 움직임 정도는 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암기력 하나는 자신 있었던 게 바로 나다. 무협소설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한숨을 쉬었다.
“후. 다시는 오기 싫다…….”
어쩌면 나는 인생에 운이 별로 없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