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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12화)
3. 수련(修鍊)(4)
태월하는 생각했다.
천하의 모든 달인들이 모여서 힘을 겨루는 검성전. 지난번 우승자도, 지지난번 우승자도, 그전의 우승자도 단 하나의 가문(家門)에서 배출되었다. 천하인들은 그 절대적인 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망하곤 했다. 십 년 후면 차회 검성전이 열리겠지만, 이변이 없다면 우승자는 같을 것이다.
성구몽이 말했다.
“재능도…… 광기도…… 어쩌면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세. 나는 내 생각을 태오를 통해서 시험해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닌 쭉정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태월하 자네, 무협소설(武俠小說) 좋아하나?”
뜬금없는 질문에 태월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또한 무협소설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진지하던 성구몽의 질문이라서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일단은 진심으로 대답해 주었다.
“무림의 호사가들이 어줍잖게 지어낸 이야기 말입니까? 허무맹랑해서 저는 읽지 않습니다.”
“크크, 태오는 무협소설을 매우 좋아하는 녀석이라더군. 문주가 내게 말해 줬어.”
“네? 그 녀석은 농부의 자식이 아니었습니까?”
태월하가 황당한 듯 반문했다. 농부는 자기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기도 바쁘다. 돈 있는 문사가문이나 고관대작이나 지니는 무협소설이란 취미를 갖는다는 건 터무니없다. 책 한 권의 가격이 일 년치 소작물을 뛰어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성구몽이 빙긋 웃었다.
“현실에서 붕 뜬 채로 무림에 동경을 갖고 발을 담근 아이가, 어떤 무림인이 될지 기대가 되지 않나? 고수가 되는 건 둘째치고 난 매우 재밌을 것 같아.”
“악취미군요.”
태월하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성구몽이 반쯤은 장난으로 태오를 가르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솔직히 이제 와서 태오가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자기 취미의 교수법을 실험해 보고 있는 것뿐이다.
즉, 진지하게 제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성구몽이 어두운 건물 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번 수련을 견디면 최소 자격은 있다고 인정해 줄 생각이네. 저 녀석 이전에도 다섯 명쯤 붙잡아서 시험해 봤는데, 다들 사흘도 되지 않아서 죽는 소리를 하며 튀어나오더군.”
물론 지금처럼 자신의 독문절기를 전수하고 요혈을 눌러 준 상태는 아니었다. 그냥 일반 문도를 잡아서 유극신공을 운기시킨 것이다.
방립을 눌러쓴 태월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는 의형제든 뭐든 싫은 일이 있으면 일단 직접적으로 말해 버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격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멸향(滅香)을 들고 가신 거 봤습니다.”
“그래. 들고 갔지.”
“육합천멸진(六合天滅陣) 안에 있으면 정신력이 빠르게 마모되고 진력(盡力)이 소모됩니다. 평소보다 정신력이 열 배나 빠르게 소모될 텐데 보통 인간이 그런 걸 버틸 리가 없죠.”
“하지만 대신에 내력은 열 배나 빠르고 정심(精深)하게 쌓이지. 어쨌거나 도가(道家)에서 실전된 고대의 비법이니까.”
성구몽의 예리한 눈이 건물의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무협소설처럼 되려면, 그만한 자격은 보여야겠지.”
사룡광마혈의 수련.
내가 호흡을 도중에 중단한 것은 여덟 번 정도의 소주천(小周天)을 끝냈을 때였다. 대주천과 달리 소주천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운기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서서히 몸에 기운이랄 만한 게 차오르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숨이 막히고 머리가 혼미해졌다. 갑자기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머릿속에 잡생각이 튕겨 나왔다.
시간으로 치면 한 시진이 지났다. 그런데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내장이 아파 왔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서 급히 가부좌를 풀고 내 몸을 점검해 보았다. 가부좌를 오래 틀고 있어서 다리가 약간 아픈 걸 제외하고는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뭐지?’
갑작스러운 이변에 정신이 멍해졌지만, 귀로 가느다란 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히 사부인 성구몽 장로의 목소리였다.
“사룡광마혈의 혈기(血氣)가 장문혈에 가득 쌓여서 좌신(左身)에 통증이 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방금까지 행하던 과정에서, 백유혈(百留穴) 쪽으로 운기의 흐름을 돌려라.”
이게 바로 무협소설에서 보던 전음(傳音)이란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움직이자마자 알아채다니, 분명히 이곳은 밀실이라서 벽이 몇 겹이나 쌓여 있는데도 내 기척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성구몽이 굉장히 무서워져서, 나는 약간 몸을 떨면서 다시 한 번 진기(眞氣)를 몸의 혈도로 천천히 보냈다. 나는 도중에 이상함을 깨닫고 외쳤다.
“백유혈이 어딥니까?!”
“멍청한 놈! 단전에서 한 치 위에 세 개의 요혈(要穴)이 있다. 그중에서 심장에 가까운 쪽이다. 지금은 내가 기혈의 움직임을 쉽게 느끼게끔 해 뒀으니 빨리 위치를 찾아서 외워 둬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계신 겁니까?”
“바깥의 현관문 밖에 있다. 더 이상 말 걸지 마라.”
“…….”
바깥의 현관문이라면 거리만 팔 장이 훨씬 넘는다. 게다가 높낮이와 석벽, 계단, 문의 존재까지 합치면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도저히 인간의 감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고수의 초감각만은 무협소설이 과장이 아니다. 도리어 환룡 작가가 현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백유혈을 찾아서 다시금 소주천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움직임이 안정되면서 몸이 따끔거리던 현상이 없어졌다. 내가 몸을 안정시키며 소주천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성구몽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진기를 돌리다 보면 이번에는 우신(右身)에 통증이 올 것이다. 너는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가며 계속 소주천을 반복해라. 고통의 간격이 없어질 정도로 호흡에 익숙해진다면 사룡광마혈의 기본에 입문하는 것이다.”
즉, 인간 몸의 좌측과 우측을 차례대로 자극함으로써 몸에 숨겨져 있는 신경을 일깨우고 혈도의 흐름을 활발하게 하는 원리였다. 나는 그럭저럭 이론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어느새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간간이 조언을 해 주던 성구몽 장로의 전음도 사라지고, 나는 침묵 속에서 말없이 수련만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벌써 호흡을 수십 번도 넘게 돌려 댄 느낌이다. 느릿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한 번에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으니 머리가 흐릿해졌다.
‘으으.’
문제는 나중에 찾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지만, 깜깜한 공간에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만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서 공포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생각이 자꾸만 복잡해져 갔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가? 얼마나 나는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면서 머리를 붕붕 흔들었지만 내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어쩔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나 자신과 싸워 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나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도중에 내 품속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읽던 무협소설, <탈혼경>이다. 나는 사호 문주가 뺏어서 읽고 다니길래, 영락없이 뺏긴 줄만 알았다. 그런데 문주는 어느새 귀신같이 내 품속에 책을 넣어 둔 것이다. 갑자기 책의 표지의 까끌한 느낌이 손에 닿자 용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평생 가도 겪을 수 없는 진짜 무림 체험이다. 수련한 지 하루만에 그만둔다면 너무 꼴이 우습다. 하다못해 사흘이라도 버텨야 조연이라도 맡을 거 아닌가?’
나는 내 안에 근성(根性)이 잠들어 있다는 걸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머리가 아프고 당장에라도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바로 눈이 번쩍 떠지면서 다시 집중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 여기서 열흘 동안 수련해서 괜찮은 성과를 못 내면 천휘문과의 항쟁 때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 힘들다고 해서 엎어져서 쉬는 건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죽는 장소는 여기가 아니다.
‘죽는다면…… 나는 적어도 환룡을 만나고 죽겠다.’
그냥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아무것도 없던 그냥 농촌 무지렁이인 나도, 글이란 게 재밌게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에 약간의 행복을 느꼈다. 무림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렇게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었던 작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