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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13화)
3. 수련(修鍊)(5)
사실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은, 내가 지금 진짜로 죽음의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문주나 무림고수들의 살기는 위협적이지만 내게 직접 향하는 게 아니었기에 대충 흘릴 수가 있었다. 빠르게 마모되는 정신력의 편린 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건져 낸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멍하니 몰두했다. 무아라기 보다는 몰아(沒我)였다.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정신세계 넘어서 존재하는 무언가에 손을 뻗고 있는 듯한 상태였다.
머릿속에 무협소설 <탈혼경>의 네 글자가 떠올랐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빛이 보인다. 빛이 사라진다. 날개가 보인다. 날개가 맺힌다. 강철이 일그러진다. 강철이 맺힌다. 나는 풀이 되고, 내 마음은 어둠 속에 잠든다. 탈혼경의 주인공은 자기 마음을 본떠서 다시 만들어 내곤 했다.
의미 없는 생각과 망상이 교차되면서도 내 몸과 마음은 확실하게 [호흡을 한다]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생리 현상이 찾아올 때는 기계적으로 오물통을 찾아서 해결했다. 배가 고프면 기계적으로 벽곡단을 한 움큼 집어 먹었다. 맛없는 벽곡단의 곡기 냄새가 오물 냄새와 섞여서 약간 인상이 찌푸려졌다.
신체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잠이 들 것 같으면 잠시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불현듯 깨어나면 내 몸은 다시금 기를 움직이는 행위 하나에만 몰두했다. 그 외의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듯, 나는 표정없이 숨쉬기만 반복했다.
사라진다.
내가 사라진다.
의식이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동안에 뇌 속에 육합(六合)의 형상이 맺혔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어쩐지 모르게 도가(道家)의 경전 같은 읊조림이 간간이 귓가에 들려오기도 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
“……차려라!”
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소리다. 나는 오감(五感)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뇌가 굳어서 손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 이성이 점차 효력을 회복하는 동안에 다시금 벼락 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갈(喝)!!”
번뜩!
그 순간이었다. 나는 갑자기 세상이 확 넓어지면서 내 눈 앞에 대춧빛 얼굴의 장년인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인식 속도가 느려서인지 상황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윽고 기억을 되찾았다.
“성구몽…… 사부?”
“정신을 차렸군.”
횃불을 들고 있는 성구몽 장로는 질렸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완전히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와 버렸구먼.”
“네?”
“일단 일어나라. 네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오물통은 가득 차 있었고 내 몸에는 기름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엄청난 배고픔과 목마름이 내 머리를 때렸다. 당장에라도 뭔가를 먹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갈증과 공복감!
“헉, 헉!!”
“참아라!”
나는 그 말에 신경쓸 틈도 없이 전신을 파르르 떨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전신이 강철에 억눌린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근육이 몽땅 굳어 버려서 비명을 질렀다. 이 상황에서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지금 너는 반야(般若)의 상태에서 막 벗어났다. 육식(六識)을 넘어선 상태에서 오감과 본능이 인지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진정하고 숨을 들이켜라!”
잠시 후 내가 제정신이 돌아오자 성구몽 장로가 내 팔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나와라. 이제 다음 수련으로 들어갈 테니.”
“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 말은 약간 기쁘게 느껴졌다. 이 정신 나간 짓을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후들거리면서 내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성구몽 장로가 팔을 놓자,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어보았다.
“며칠이…… 지났습니까?”
“이십오 일(二十五日).”
이어지는 성구몽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네게 주어진 벽곡단은 십오 일째에 모두 떨어졌다. 네가 죽을 것 같아서 그만두게 한 것이다.”
나는 내 꼴을 살펴보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신에 역한 냄새가 나고 팔다리가 앙상하게 말라 있다. 물도 못 마시고 가만히 호흡만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리라.
성구몽 장로가 앞서서 걸어가다가 말했다.
“너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마치 해탈하는 승려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싶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랬습니까?”
“…….”
성구몽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의 얼굴에는 약간 노한 기색이 맺혀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이틀 동안 침상에 누워서 쉬었다. 전신을 따뜻한 물에 씻고 나서 밥을 먹었다. 뱃속에 거지가 들은 양 게걸스럽게 먹는데도 전혀 배가 차지 않았다.
곧 밤이 되어서 드러눕자, 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뜻밖에도 내가 괴상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4. 반야(般若)(1)
유극문의 본전(本殿)의 심처에는 한 방이 있다. 방의 이름은 따로 붙여지지 않았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주와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 그냥 회의실이라고 부르면 되겠지만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이유는 시비에게도 알리지 않고 문주 본인이 비밀스럽게 관리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네 사람이 앉아서 따사로운 햇빛을 창가에서 보고 있었다. 현 유극문주 사호와 삼 인의 장로들이었다. 사호는 용정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먼저 말을 꺼냈다.
“개전(開戰)은 예정된 대로 한 달 후가 될 겁니다. 천휘문은 총력을 다해서 공격해 오겠죠.”
“훌륭하오, 문주.”
태월하가 그녀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당초 예상으로는 바로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 계책이 먹혔구려, 문주.”
“장로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호위무사인 천휘십검과 천휘문 소문주를 죽였다면 즉시 쳐들어오는 게 당연하다. 천휘문주 장문산은 피가 끓어서 그렇게 하려 했으나, 유극문에서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책이란 바로 선제공격!
성구몽 장로가 제자 육성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태월하 장로와 채은 장로가 움직였다. 태월하와 채은은 문주에게서 작전을 지시받은 즉시 정주 지방으로 갔고, 약 나흘이 지나자 천휘문에 소문주의 목이 도착하기도 전에 불이 타오르고 천휘문 제자들이 습격당해서 사망했다.
절묘한 시간 차였다.
표국을 통해서 소문주와 호위들의 목이 도착하기 바로 하루 전, 말(馬)보다 빠른 경공으로 쉬지 않고 달려간 두 명의 장로들이 천휘문에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다. 무려 사십여 명이 장로들에게 도살당하고 서른 명이 중태에 빠지자 천휘문은 발칵 뒤집어졌고, 바로 다음 날 소문주의 목까지 도착하자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완벽한 기선 제압!
천휘문에게 있어서 최선의 계책은 총력을 모아서 바로 공격해 오는 것이었지만, 사망자와 부상자가 많아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문주라고 해도 사망자의 가족에게 변명 한두 마디는 해야 했고, 심지어는 습격한 괴한들의 정체도 심증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서 속이 터지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