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검성전 1권(14화)
4. 반야(般若)(2)


결국 임무를 마친 태월하 장로와 채은 장로가 유극문에 돌아왔을 때 즈음엔 천휘문은 이를 갈면서 항쟁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구몽 장로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있었으면 보다 기한을 늦출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오, 문주.”
“아니에요. 이 정도가 최대의 성과였죠. 어차피 쭉정이들을 아무리 청소해도 중요한 건 천휘문 뒤에 있는 존재니까요.”
“귀검(鬼劍) 장문영(長汶泳)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문주 사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천휘문에 귀검 외에 사람이 있던가요?”
“없죠.”
세 장로들은 문주 사호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세 장로들의 무위(武威)는 시골 문파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천휘문 따위를 두려워할 자들이 아니었다. 특히 성구몽 장로의 진짜 정체를 천휘문주가 알게 되면 벌벌 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로들에게도 껄끄러운 존재가 단 하나 있었다.
귀검 장문영!
십 년 전의 이십회(二十會) 검성전(劍聖戰)에서 화산파(華山派)의 대장로(大長老)를 꺾고 천룡전(天龍戰) 십육강(十六强)을 달성한 검사. 그때까지 장문영은 강호에 나온 적이 없어서 딱히 별호가 없었으나, 이후에는 귀검(鬼劍)이라는 별호를 받고 정주 일대에서 최고의 검호(劍豪)로 군림하고 있었다.
심지어 구파일방 소림사의 사대금강마저도 귀검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주는 상태였다.
물론 귀검 장문영이라고 해도 전대 유극문주에 비하면 실력이 부족하다. 전대 문주가 살아 있었다면 걱정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지금 귀검이라는 이름은 유극문에 큰 부담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아무리 세 장로라고 해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는 고수이기 때문이다.
태월하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휘문을 습격할 때 귀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문주. 소문대로 그가 숭산(崇山)에서 폐관수련을 한다는 말은 사실인 듯하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리 쉽게 돌아올 수는 없었을 테니.”
“귀검 장문영은 천휘문주의 친동생이죠.”
쪼르륵.
차주전자에서 다시금 용정차를 장로들의 차에 따라 준 사호가 맑은 햇빛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맴돌았다.
“천성적으로 수련광(修練狂)에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제가 죽인 소문주는 귀검의 조카. 귀검이 조카의 목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
“귀검 하나만이라면 장로분들께서 어떻게든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남는 천휘문의 전력을 본문의 제자들이 감당키 힘들겠군요.”
칠십여 명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어도, 이백 명이 넘게 남아 있다.
그것도 하루이틀 배운 게 아니라 오 년 이상 무공을 수련한 장정들이 이백 명! 무림문파의 대결에서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유극문의 제자들도 실력이 뛰어나지만 이 정도로 숫자 차이가 나면 크게 힘을 못 쓴다.
세 장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귀검이 천휘문에 없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천휘문의 세(勢)가 대단하지만 세 장로가 부족한 머릿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쟁이 시작되면 귀검 장문영을 상대하기 위해서 적어도 장로 두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이제 와서 재차 기습 공격을 할 수도 없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천휘문을 건드리는 짓은 구파일방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무림의 호사가들은 벌써부터 천휘문과 유극문의 승부는 결판이 났다고들 떠들고 다니는 상태였다.
사호가 훗하고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직은 승률이 반반이지만, 계책을 잘 세우면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천휘문에는 큰 약점이 있으니까.”
“그게 무엇이오?”
“아직은 얘기할 수 없어요. 귀검의 움직임을 좀 더 지켜봐야 하니까요.”
“으음.”
성구몽 장로는 침음성을 흘렸지만, 곧 납득했다.
“문주를 믿겠소.”
사실 성구몽이나 태월하, 채은도 머리가 나쁘지 않다. 도리어 계책을 짜는데 있어서는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주의 재량을 함부로 침범하거나 앞서 나가는 건 역효과다. 조직은 결론이 최선이든 아니든, 망설임 없이 행동할 수 있어야 최고의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문주는 선제 공격을 통해서 천휘문에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어렸을 적부터 병서(兵書)와 기서(奇書)에 통달한 재녀(才女)다운 행동이었다. 전대 문주로부터 사호의 보위를 명령받은 이상, 세 장로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사람은 문도들의 훈련 상황과 나무 방책의 설치, 기관(機關) 수리 비용을 얘기하며 한 식경 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사호가 성구몽 장로에게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장로님. 태오는 어떤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사호가 싱긋 웃었다.
“평제자나 사범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인물이니까요. 여태껏 장로님의 제자로 들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
“으음.”
“그런데 아무리 특별 수련을 한다고 해도, 전혀 모습이 안 보여서 다들 궁금해하는 것 같더군요.”
성구몽 장로는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밀실에서 내공 수련을 시켰는데, 정도가 과해서 지금은 요양시키고 있소이다. 내일 저녁쯤이면 기력을 회복할 듯싶소.”
“요양이라…….”
사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설마 입문한 후 근 한 달 동안, 계속해서 내공 단련만 했다는 건가요?”
“……음, 그렇소.”
“그럴 수가…….”
옆에서 듣고 있던 태월하와 채은도 놀랐다. 자신들은 태오가 지하 밀실에 들어간 것만 보고 바로 천휘문 습격을 위해 떠났기에 상황을 몰랐다. 그런데 설마 그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밀실에 있었을 줄이야!
성구몽 장로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그 아이의 재능은 뭐라 판단할 수 없소. 허나 확실한 건, 대기만성(大器滿成)일지도 모르오.”
“흥미롭군요.”
실제로 인내심과 의지력은 무공을 익힐 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검술의 자질은 어떨지 모르지만, 확실히 태오의 의지력은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구몽 장로가 사호에게 부탁했다.
“문주, 태오는 항쟁에서 잠시 물려 두면 안 되겠소? 내공의 기초가 급속하게 쌓여서 지금이 수련의 적기(適期)요. 이 기회를 놓치기가 아깝구려.”
순간 태월하와 채은 장로의 눈이 의혹으로 번득였다. 설마 성구몽이 저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곤란하군요…….”
사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시다시피 천휘문과의 싸움은 여유를 둘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에요. 이번에 크게 이기지 못하면 앞으로 유극문은 틀림없이 멸문합니다. 비기거나 막아 내는 정도로는 계속 비슷한 일이 벌어질 테고, 세력이 계속 줄어들기 때문이죠.”
“…….”
“한 명의 힘이라도 아쉬운 상황입니다. 전투의 일선에 내보내진 못해도 뒤에서 사람들을 도와야겠죠.”
“물론 그 정도는 상관없소. 마땅히 해야지.”
성구몽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문주는 은연중에 전투 일선에서는 빼 준다고 허락한 것이다. 곧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그들은 밖에 나가서 가볍게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일과로 돌아갔다.
함께 걷던 중에 태월하가 성구몽에게 물었다.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뭐가 말인가?”
“재질이 뛰어난 아이인 겁니까?”
“음, 그건…….”
태월하의 곁에는 채은 장로도 함께 있었다. 그녀도 태오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채은 장로는 나이가 오십대가 훨씬 넘었는데도 겉으로는 이, 삼십대의 처녀에 못지않았다. 그녀가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간으로는 이십오 일. 숙련된 무인이라도 벽곡단만 가지고는 그토록 오래 좌선명상으로 버틸 수가 없어요. 정말로 그런 꼬마아이가 버텨 낸 건가요?”
“그렇다네.”
“혹시…… 타 문파의 간자(間子)가 아닐까요?”
어린아이를 훈련시켜서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치게 할 셈으로 보내는 경우는 강호에 많았다. 채은 장로의 말에 성구몽 장로가 확실히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 예전에 나는 그 아이의 완맥을 잡아서 모든 가능성을 검사해 보았다. 무공 따위 익힌 적이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가요…….”
“단지…… 좀 놀랍긴 했지.”
채은과 태월하의 시선이 성구몽 장로에게 닿였다. 성구몽 장로는 전에 없이 망설이고 고뇌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짧은 탄식을 흘리더니 자신의 의형제들에게 말을 꺼냈다.
“태오는 반야(般若)의 경지에서 좌선명상을 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평생에 거의 느낀 적이 없는 완벽한 몰아(沒我)였다. 육합천멸진 속에서 해낼 수 있는 수련으로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다.”
실제로 성구몽은 직접 수련을 마친 태오의 기혈을 잡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작 한 달의 시간이었지만 태오의 몸 속에는 활화산 같은 사룡광마혈의 공력이 무려 삼 년(三年)치나 쌓여 있었다. 아마 좌선명상의 효과와 육합천멸진의 효과가 증폭된 덕분에, 단숨에 사룡광마혈 일 성(一成)의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