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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15화)
4. 반야(般若)(3)
내공을 통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긴 했으나, 아마 검술과 내공의 흐름을 일체시킬 수만 있다면 단숨에 이류급 무인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반야……라고요?”
채은 장로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반야!
보통 불교의 고승들이 말하는 반야와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무도의 초고수들이 생사를 초탈해서 정기신(精氣身)이 완벽한 감응을 이루는 순간이 수련 중에 찾아오는데, 이때는 깨달음이 마치 비처럼 쏟아진다고들 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오로지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만인일귀(萬人一鬼)의 과정을 거치는 고수들에게는 필수적인 영역이었다. 어차피 한 가지에 미친다면 반야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못 빠져나오고 진짜 광인(狂人)이 되거나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태월하가 말했다.
“그럼 그 아이, 태오도 하나의 미친 달인(達人)으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있겠군. 그런데 어째서 형님께선 확신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겪은 과정과 달랐기 때문이다.”
“다르다고요?”
성구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야의 경계가 풀리려고 할 때는 깨달음이 하나로 뭉쳐져서 머릿속에서 빛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지. 그래서 우리는 예외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련을 마무리했다. 허나 태오 녀석은 내가 깨울 때까지, 계속해서 허무(虛無)에 도달하고 있더구나.”
“……!!”
두 장로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달인들이라서 성구몽 장로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었다. 태월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말은…… 놈은 무의식과 의식이 합쳐지는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겁니까? 깨달음을 녹일 필요도 없이 그대로 흡수시키고 있었다는 소리가 됩니다만.”
“아마 그렇게 되겠지.”
태월하는 경악했다. 당금 강호에서 이들의 문답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은 백여 명이 채 안 되겠지만, 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오가 보여 준 모습은 차라리 이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그건 재능의 영역이 아닙니다.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요.”
“노제. 그러니까 내가 고민하는 거라네.”
이어지는 성구몽의 말에 두 사람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 아이를 내쳐야 할지 돌봐야 할지…….”
스윽.
성구몽 장로의 신형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독문신법인 혈마영(血魔影)이었다. 그 또한 심경이 복잡해서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의형제라고 해도 저 상태의 성구몽에게 억지로 말을 걸면 후환이 두렵다. 태월하는 한숨을 쉬고는 채은에게 말했다.
“이 일은 문주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문주는 천휘문과의 대결을 코앞에 두고 충분히 머리가 아플 거야. 괜히 신경 쓰이게 하면 안 돼.”
채은 장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떨 거 같으신가요?”
“뭐가 어떤데?”
“큰오라버니께서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요?”
“…….”
태월하는 침묵했다. 그리고는 방립을 꾹 눌러쓴 채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장내에는 그가 남긴 한마디가 맴돌았다.
“……난 말할 수 없다.”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성구몽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은 유극문에 들어왔지만 한 번도 제자를 받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절학의 전수가 아니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은 제자를 만들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다. 태오의 존재는 어쩌면 성구몽과 태월하가 가장 두려워하던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 * *
내가 기운을 찾은 건 이틀만이다. 성구몽 장로는 침상에서 일어난 나를 데리고 인근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건물 내에서도 수련할 수 있지만, 숲의 기(氣)가 회복을 빠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지금 네 내공은 충분히 검법(劍法)을 전개할 만한 수위가 된다. 짧은 수련 동안 집중한 덕분에 충분히 기본을 쌓아 놓은 것이다.”
“내공?”
“소주천을 돌리면서 단전을 두 번 더 경유해 보아라. 그게 사룡광마혈의 대주천(大周天)이다.”
나는 의심없이 성구몽 장로의 말대로 호흡과 함께 심법을 전개해 보았다. 그러자 단전에서부터 시뻘건 공 같은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수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콩알처럼 작았던 게 지금은 마치 주먹처럼 커져 있었다. 꿀렁거리며 혈맥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한 번 대주천을 마치고 나자 전신이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따뜻해졌고 눈에서 저절로 맑은 빛이 흘러나왔다. 겨우 운기 한 번으로 이런 효과가 나올 줄은 몰라서 나는 가슴이 떨렸다. 마치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자유로웠다.
성구몽 장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참고로 누구나 한 달 만에 그 정도 공력을 쌓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네 공력은 보통 사람이 삼 년은 용맹정진(勇猛精盡)해야 이룰 수 있는 수준. 육합천멸진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니, 앞으로도 급속도로 공력을 쌓지는 못한다.”
“네?”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그럼 한번 더 육합천멸진 안에서 내공을 수련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없지만…… 네 코에는 얼마 전부터 기묘한 냄새가 감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콧등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성구몽 장로의 말대로 의식을 찾았을 때부터 코끝에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캐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잠잘 때나 쉴 때나 떨어지지 않아서 후각에 문제가 생겼나 여기고 있는 참이었다.
“천멸진을 구성할 때 쓰이는 멸향(滅香)의 성분은 강도가 약한 마약(痲藥)이다. 중독성은 보통 마약보다 낮은 편이지만 네 녀석은 이십오 일이나 들이킨 상태. 내 내공으로 탁한 중독 성분을 몰아냈지만, 한 번 더 멸향을 맡으면 어떤 금단증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마약이 무엇입니까?”
“이런 거지.”
성구몽 장로가 품속에서 조그마한 향을 꺼냈다. 틀림없이 내가 수련할 때 육합의 방위로 놓여져 있던 향이다. 이상한 건 향을 태우지도 않았는데, 보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관자놀이가 아파졌다. 그리고 묘한 쾌감과 함께 내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맡고 싶다…….
이해되지 않는 현상 때문에 비틀거리자 성구몽 장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멸향을 손으로 쥐어서 부숴 버렸다.
나는 멍하니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았다.
“육합천멸진은 지금은 멸문(滅門)한 모산파(茅山派)에서 전해지던 고대 도가(道家)의 비술이다. 육합의 방위에 따라 멸향을 놓고 안에서 수련하면 정신력이 빠르게 고갈되지만, 전신에 잠재되어 있는 기가 깨어나서 내공이 엄청나게 빠르게 쌓인다.
문제는 지금 너처럼 금단증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머리가 아플 뿐이겠지만, 한 번 더 사용하면 도저히 네 의지로는 어쩔 수 없다. 모산파의 도사들은 멸향을 이용해서 대단한 공력을 쌓아서 한때 강소성의 패왕으로 군림했지만, 멸향 중독 때문에 멸망해 버렸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래. 고수의 정신력이라도 한계는 있다. 멸향은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축적되면 인격을 한순간에 날릴 수도 있다. 고매한 도사들이 타락해서 인육에서 멸향을 채취하려 했을 정도니, 짐작이 가느냐?”
“…….”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모산파의 멸망은 구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모산파는 큰 성세를 누리다가, 멸향이 공급되지 않자 도사들이 광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모산파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을과 무림문파를 습격해서 살육을 저질렀다.
그들은 인육을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걸 깨닫고는 거리낌없이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때 죽은 인간이 무려 수천 명이나 된다고 한다. 결국 타 지역의 무림문파들까지 와서 모산파 도사들을 토벌했으나 이후 강소무림은 크게 쇠퇴했다.
순간 나는 섬뜩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그렇게 위험한 비술(秘術)을 내게 시험하다니, 내가 살육에 미친 인간이 되어도 좋다는 소리인 건가? 내가 말은 하지 않고 성구몽을 노려보자, 그가 훗하고 웃었다.
“걱정 마라. 너는 한 번 들이마신 것뿐이니 한 달 정도 지나면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것도 원본을 희석시킨 물건이니 망가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유극문을 나가겠습니다.”
성구몽 장로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갑자기 내가 무림에 품고 있던 몽환적인 감정이 무너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단전을 폐쇄하든 근맥을 끊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더 이상 당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약이 뭔지는 바로 짐작이 간다. 그리고 중독될 경우에 일어날 파멸도 눈에 뻔히 보였다. 하나뿐인 제자에게 그런 수법을 시험했다니, 눈앞의 성구몽 장로 밑에 있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흐흐…… 크흐흐흐!!”
성구몽은 흉소를 흘렸다. 그의 눈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어리석은 놈. 내가 어째서 일부러 멸향의 정체를 가르쳐 줬겠느냐? 입 다물고 있으면 네놈이 반발하지도 않을 텐데.”
“…….”
“내가 너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내 이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다. 재능으로 한계를 돌파하는 자와 광기 어린 노력으로 달인에 도달하는 자.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극(武極)에 접근하는 존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