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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16화)
4. 반야(般若)(4)
전신에 한기가 몰아쳤다. 지금 성구몽 장로는 내가 실험체라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다. 나를 어르거나 달랠 생각은 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기 속셈을 밝힌다.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성구몽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네가 유극문을 떠나고자 한다면 나는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아직 본격적인 수법(手法)은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네가 익힌 사룡광마혈의 공력은 유출되면 안 된다. 솜씨 좋은 자라면 호흡을 훔치는 것만으로도 내 수법을 대부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단전을 폐쇄하십시오.”
“크크. 그래 농부로 사는 데 내공 따윈 필요 없을 것이다.”
소름 끼치게 웃던 성구몽 장로가 달래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너는 극한의 집중력으로 한번에 정신력의 한계를 돌파했다. 내공을 폐쇄해도 이미 멸향의 효과로 육신통(六神通)의 일부가 눈을 뜬 상태. 통제할 수 있는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초감각만 높아지면 네놈은 언젠가 미쳐 버릴 것이다.”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읽히면서 심정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묘한 안구의 이동, 근육의 움직임, 바람의 흔적이 피부에서 느껴졌다. 이게 아마 성구몽 장로가 말한 초감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나는 성구몽 장로나 유극문을 벗어날 힘이 생길 때까지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는 셈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 자리에서 섣불리 결정하는 걸 포기하고 질문했다.
“그럼…… 내게 진실을 가르쳐 준 이유는 뭡니까?”
“네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중독 증세 때문에 멸향을 찾아헤매다가 폐인(廢人)이 되면 곤란하니까! 기왕 너를 [제자]로 가르치는 김에, 최대한 숨기는 것 없이 지내고 싶다.”
“…….”
“앞으로는 네게 함부로 위험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지낼 리가 없다. 나는 촌무지렁이 농부의 자식이지만, 무협소설을 자주 봐 왔기 때문에 소면호리(笑面狐狸) 같은 인간이 세상에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눈앞의 성구몽이 하는 말도 절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표정없이 성구몽 장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성구몽 장로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빠르게 체념한 건 아니다. 이럴 때는 언제나 단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협소설에서 읽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을 키워서 강해진다!
무림에서 하나뿐인 절대명제다. 나머지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성구몽 장로는 그날 하루 동안 내게 유극문의 기초 검법인 소영검법(消影劍法)의 기본형을 가르쳐 주었다. 소영검법은 총 십육 식(十六式)으로 이루어져 있는 검법인데, 특이하게도 검법 자체에 쾌(快), 환(幻), 강(强), 변(變)이라고 할 만한 특징이 매우 드물었다. 초식 하나하나가 밋밋했고 이어서 펼쳐 봐도 그리 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한 번 소영검법을 본 적이 있어서 기본형을 다 따라하는 건 두 시진이 지나자 가능했다. 전부 외웠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이틀만 연습하면 왠만큼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구몽 장로는 내게 간식으로 가져온 고기만두를 건네 주며 말했다.
“네가 무공을 전수받는 순서가 다른 문도들과 다르다는 걸 명심해라. 보통은 유극신공의 기초를 익힌 후, 몽환권(夢幻拳)을 수련한다. 몽환권의 성취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면 그때서야 소영검법을 습득하는데 여기까지 보통 이 년이 걸린다.”
“어째서 권법부터 수련해야 합니까?”
“권법(拳法)은 검법보다 더 쉽고 재능을 살펴보기 쉬우니까! 자신의 몸으로 투로(鬪路)를 익히는 재능은 그대로 검술에 적용되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진도를 설정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세 입으로 고기만두를 먹어 치운 성구몽 장로가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그는 식탐이 별로 없는지, 조막만한 만두를 하나 먹고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네 육체는 매우 허약하다. 어려서 근골(筋骨)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을뿐더러 영양실조와 장기간의 밀실 생활로 체력이 떨어져 있다. 이 상태에서 섣불리 내공을 돋우어서 검을 수련하면, 네 녀석은 탈진할 게 뻔하다.”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러니, 남는 시간에는 식사를 많이 먹고 내공 없이 검만 휘두르도록 한다. 일단은 근육과 체력을 키워라. 어차피 제대로 된 상중하단세를 훈련하지 않으면 검술의 형(形)을 수련해 봤자니까.”
식사를 많이 하라는 말은 반갑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는 일도 많았는데, 유극문은 돈을 많이 버는지 식사가 매우 맛있고 푸짐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땀을 잔뜩 흘린 후에 저녁때가 되어서 미친듯이 밥과 고기를 목구멍으로 삼켰는데 맛있어서 미칠 것 같았다.
문득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내 모습이 잔에 비쳐졌다. 그 순간 영문 모르게 집에 있는 부모님이 떠올라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부모님한테도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여드리고 싶었다.
“……이제 됐어.”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물 흘리는 건 짜증 나는 기분이 들어서 싫다. 기왕 힘든 일을 겪는 바에는 늘 웃으면서 지내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덥다.
이따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뱃속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늘로 사흘째, 소영검법의 기본형과 중단세 내려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팔이 끊어질 것처럼 아플 때는 앉아서 운기(運氣)를 했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근육통이 가라앉으면서 몸에 새로운 힘이 차올랐다.
지금은 중단세 내려치기를 막 삼천 번째 끝내고 나무 밑에 앉아서 쉬는 중이다. 내 자세를 봐주던 성구몽 장로는 이따금 호통을 치기도 했다. 자세가 잘못되면 길을 돌아간다는 소리를 하면서 죽어라 휘두르게 시켰다. 사흘 동안 벌써 오천 번도 넘게 휘두른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원래 논일을 하면서 고된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고, 근육이 비명을 지른 후에는 한결 버티기가 수월해졌다. 정상적이라면 열흘은 갈 근육통이지만 내공의 힘이 근육통을 단축시켜 주는 모양이었다.
성구몽 장로가 쉬고 있는 내 앞에 다가왔다.
“하체가 나쁘지 않아서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군. 이제 소영검법은 다 외운 것 같으니 제대로 된 진기의 흐름을 가르쳐 주겠다.”
“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바로 반응했다. 성구몽 장로의 말에 따르면 이제 내가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열서너 살의 어린놈이 살아남으려면 자는 시간도 아끼면서 필사적으로 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우선 중단세를 잡아 봐라.”
시키는 대로 올바른 중단세를 잡았다. 꿈에도 나올 만큼 지겹게 연습한 자세라서 몸에 밴 것 같았다. 성구몽 장로는 자신의 검을 잡고 똑같은 자세를 잡은 후 내 맞은편에 섰다.
“지금 너와 나의 간격은 정확히 일 장 반. 실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간합(間合)이다. 그럼 어째서 일 장 반이라는 거리가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지 알고 있느냐?”
“검을 휘둘렀을 때 막을 수 있는 최대의 간격일 것 같습니다.”
나는 망설임없이 무협소설에서 봤던 이야기를 말했다. 분명히 주인공이 검술 수련을 하는 장면에서 설명이 나왔다. 그러자 성구몽 장로는 약간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황했는지 약간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맞다. 좀 더 정확히는 인간의 반응 속도가 침처럼 가늘어져서 상대방의 경계선에 맞닿는 거리다. 일 장 반에서 더 가까우면 사투(死鬪)가 빈번해지고, 더 멀어지면 상대방이 다른 수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스윽.
그 순간이었다. 성구몽 장로의 몸이 매우 미묘하지만 움직였다. 초감각이 눈뜨지 않았다면 시각과 나뭇잎 소리 때문에 놓칠 뻔했지만, 분명히 느꼈다. 성구몽 장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알아챘군. 이게 바로 실전에서 쓰이는 보법(步法)이다. 경공을 쓰면 말보다 빠르게 뛰어다닐 수 있지만, 결국 적과 싸울 때는 땅에 정확히 발을 붙여야 한다. 보다 정확하게 ‘땅(地)’에 균형을 잡고 자신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자가 뛰어난 검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파앗!
나는 깜짝 놀랐다. 눈동자에 미미하게 비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구몽 장로의 몸이 움직이더니, 공간에 잔영(殘影)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희끄무레한 정도였지만 만일에 숲이 조금만 더 어두웠다면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놀라서 질문했다.
“그건 무엇입니까?”
“일류급 고수들의 속도를 보여준 것이다. 아까 네가 포착했던 미약한 움직임에 기(氣)를 싣고, 근육의 탄성을 올리면 순간적으로 발에 날개가 달린다. 족력(足力)이 정확한 보법에 따라서 강해지면 분신(分身)도 가능해진다. 실전에선 계속해서 이 정도 속력으로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성구몽 장로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분명히 철검인데도 넣을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물론 너는 충분한 내공을 지니고 있으니 보법과 경신술을 십 주야 정도 수련하면 웬만한 강호의 도둑놈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강호의 이류 도적들은 몸이 날래지만, 정면 대결에서 놈들을 두려워하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왜 그런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