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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18화)
4. 반야(般若)(6)


한편 성구몽 장로는 밤의 어둠을 뚫고 태월하 장로에게 가 있었다. 태월하 장로는 늘 새벽녘까지 운공(運功)을 하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깨어 있었다. 난데없는 방문에 태월하는 당황했지만, 차를 내 와서 성구몽 앞에 놓았다.
달각하는 소리와 함께 성구몽 장로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큰일났네 태월하.”
“뭐가 말씀이십니까?”
성구몽 장로는 뚫어져라 찻잔의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자네 무심검(無心劍)에 도달한 검사(劍士)를 본 적이 있나?”
“음…… 많지는 않습니다. 강호행을 하던 시절에 많아 봤자 다섯 번을 보았던가? 개중 제일 빨랐던 건 종남파(終南派)의 현천검수(玄天劍獸)였습니다.”
태월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무심검이란 쾌검(快劍)을 목적으로 연마하는 검사들이 도달하는 경지로서, 정(情)과 마음(心)을 버리고 최선의 쾌검을 떨쳐 내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무심검은 특정한 무공이 아니라서 강호에서 웬만큼 한다는 검객들은 익히고 있었다.
“그자들의 나이는 어땠지?”
“나이가 어땠다뇨? 대개 젊어도 삼십대였고, 사오십대도 많았습니다. 딱히 강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쾌검을 연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태월하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보통 쾌검이 아니라 만검(慢劍)의 연성이 느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였다. 만검은 자신의 기세를 확실히 담을 수 있다면 그 순간 대부분의 수련이 끝나지만, 선후(先後)를 가리는 게 전부인 쾌검술은 오랜 세월의 수련이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조차도 깎아 내는 괴로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
“형님?”
“만일…… 십대의 소년 시절에 무심검의 검기(劍氣)를 터득한 자가 있다면 어떨 것 같나?”
태월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째서 성구몽 장로가 야밤에 찾아와서 뜬금없는 질문을 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불신감 때문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전 그런 일을 들은 적이 없지만, 십 년 후에는 자기 또래 중에 적수를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지……? 무심검을 터득했다는 건 모든 동작이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고, 내공과 검술이 높아질수록 쾌검(快劍)은 한계 없이 빨라질 테니.”
“형님, 설마……?”
“나는 오늘 불완전하긴 했지만 태오 녀석에게서 무심(無心)의 정화(精華)를 보았네.”
성구몽 장로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순수한 무인으로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는 기쁨이 감돌고 있었다. 열기를 띈 채 성구몽 장로가 말을 이었다.
“노제. 나는 오늘 진심이 되고 말았다네. 미운 꼬마놈을 괴롭혀 주고 싶었지만…… 포기했어. 예순이 다 된 나이에 후계자를 만들라고 하늘에서 내려 준 인연인 듯해.”
“형님…… 형님.”
태월하는 넋을 놓은 듯 성구몽 장로를 불렀다. 그러더니 등 뒤의 탁장에서 화주(火酒) 한 병을 꺼내 와서 탁자 위에 놓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화주를 자신의 잔에 따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그건 재능이 아닙니다. 천인일재 같은 게 아니라고요.”
“알고 있네.”
“마도(魔道) 중의 마도(魔道)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성취에 현혹되면…… 형님까지 함께 파멸하게 될 겁니다. 불꽃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파멸? 멋진 단어로군. 썩 괜찮아.”
“형님!”
쾅!
순간 태월하의 술잔이 거대한 파괴음을 내면서 탁자를 부숴 버렸다. 화주 병이 내동댕이쳐지면서 깨지고, 공력이 일으킨 파장이 공기 중에 퍼져 나갔다. 화주 잔을 들고 있던 태월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업(業)’을 해결하기 전에는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전대 유극문주조차도 해결해 주지 못했던 업……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에 방법을 찾아야 생존(生存)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어차피 내공이 조화경(造化境)에 도달해 앞으로도 오십 년간 거의 늙지 않는 상태. 성급히 후계자를 만들려 하실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태월하가 성구몽 앞에서 이토록 격한 감정을 보인 일은 거의 없었다. 십 년 전에 유극문주가 패했다는 소식에 원통한 눈물을 흘린 때 외에는, 언제나 얼음처럼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이었다. 그만큼 태월하가 진심으로 성구몽을 만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성구몽이 말했다.
“천휘문과의 일이 해결되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모든 절학을 태오에게 전하는 데 집중할 걸세. 대가는 나 스스로 책임질 테니 자네들에게 불똥이 튀진 않을 걸세.”
“불똥이라니…… 제길! 대가가 두려워서 이 장강사신(長江死神) 태월하가 언성을 높이는 줄 아십니까!”
태월하가 답답한 듯 이를 악물었지만 성구몽은 쓰게 웃었다.
“노제. 전에 자네와 술을 함께하면서 말했을 걸세.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하늘이 정해 주는 것이기에,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에 모든 몸과 마음을 다 한다고. 나는 유극문주와 훌륭한 의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모든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네.”
“…….”
“자네까지 죽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꼭 내가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웃기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태월하가 격렬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비웃었다. 심장에서는 부글거리는 분노와 슬픔이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의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냉정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천하인들이 입을 모아 백귀일성(百鬼一聖)이라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이길 수 없는 괴물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십 년 전에 깨달았지 않습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덤벼드는 건 자살(自殺)이라고 합니다!”
“자네는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네?”
성구몽 장로가 편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젊었을 적의 패기와 열정이 다시 살아나 있었다. 문주가 죽고 나서 십여 년, 그냥저냥 살아온 노인네의 냄새가 싹 가신 상태였다.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일세.”
이어진 말에 태월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히…… 십년 후에…… 태오 그놈은 신룡전(神龍戰)에 나갈 수 있을 게야.”
신룡전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세상에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하나의 검성전(劍聖戰). 신룡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는 강호에서도 매우 극소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강호에서 절세고수로 군림하던 그들은 거기에 얽매여서 평생을 보내고 있었다.
두 의형제는 달이 기울어, 차가운 이슬이 풀 끝에 맺힐 때까지 말없이 화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납득하든 납득하지 못하든 결국 술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랠 수밖에 없는 게 사내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