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검성전 1권(19화)
5. 귀검(鬼劍)(1)


태오가 무심검을 펼쳐 내던 시점, 천휘문의 밀실(密室). 혹은 천휘문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방에서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이가 죽었다고…….”
귀검(鬼劍)이라 불리는 장문영(長汶泳), 혹은 정주제일검(鄭州第一劍)이라 불리는 검호(劍豪)는 흐릿한 눈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나이 든 기생오라비처럼 느긋한 모습이라서, 처음 그를 보는 사람은 누구도 그를 천휘문에서 제일가는 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숭산에서 소림사의 허락을 받고 폐관수련(廢關修練)을 하던 중에 천휘문도들의 손에 강제로 끌려나온 상태였다. 귀검 장문영 앞에 서 있는 그의 형, 장문산(長汶汕)은 버럭 소리를 쳤다.
“그래!! 천휘십검은 살해당하고 익이의 목이…… 소금에 절여져서 보내졌다!!”
장문산은 동생인 귀검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고수였다. 비록 지룡전(地龍戰)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충분히 일대를 주름잡을 만한 절정고수. 그가 분노를 뚝뚝 실어서 내공을 뿜어내자 방이 흔들리면서 가구가 요동쳤다.
장문산의 눈에서 분노의 안광이 일렁였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유극문 놈들의 사지를 모조리 뽑아 버리고, 목으로 익이의 제사를 지내겠다!”
달그락, 달그락!
“형님 그만하지 그래. 비싼 가구야.”
타악!
하지만 이내 방의 진동이 멈췄다. 귀검 장문영이 가볍게 칼자루로 탁자를 친 것뿐이었는데, 천휘문주(天輝門主) 장문산의 무형지기(無形之氣)가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다. 그것도 반발로 장문산에게 내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기(氣)를 차단한 솜씨라서 장문산은 깜짝 놀랐다.
‘이 녀석이 그새 또 진경(進境)이 있었단 말인가? 놀랍다!’
아들의 죽음을 잠시 잊을 정도로, 장문산은 무인으로서 거대한 경이(驚異)를 느꼈다.
자신의 동생이 처음으로 검(劍)을 손에 잡은 건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여덟 살 때부터 열심히 후계자가 되기 위해 천휘문의 절학(絶學)을 익혀 온 장문산과 다르게 장문영은 하는 둥 마는 둥 검술을 수련했다.
검을 잡기 전에는 천하제일숙수가 되겠답시고 요리 수련을 했었던지라 천휘문은 대부분이 장문영을 비웃고 무시했다.
그러나 무술을 수련한 지 고작 이 년만에 장문영은 장문산을 백초지적으로 깔아보았고, 오 년 후에는 천휘문 제일고수가 되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성취인지라 장문산은 질투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 걸음 나갈 때 동생은 스무 걸음씩 뛰어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천인일재(千人一才)!
천재 중의 천재를 칭송하는 유일한 단어.
그중에서도 장문영은 특출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후에도 거의 막힘없이 쑥쑥 무공이 늘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열린 이십 회 검성전(劍聖戰)에서 천룡전 십육강에 출전했을 때, 중원에서는 천휘문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화산파에서 한 자루 검으로 고아한 검선(劍仙)의 경지에 올랐다는 대장로가 출전했는데도 오백 초의 접전 끝에 이십대 중반의 장문영에게 꺾인 것이다!
화산파 대장로의 검기(劍技)는 천휘문의 기본 검법인 천휘삼절검(天輝三絶劍)에 속절없이 박살 나 버렸지만, 장문영 이전에 누구도 천휘삼절검으로 천류매화신검(天流梅花神劍)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중원의 호사가들은 가히 귀신의 검(鬼劍)과 같다고 두려워했으며, 황제 또한 관객의 여론을 수용해서 귀검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한마디로 귀검 장문영은 현 강호에서 십육 위 안에 들어가는 초고수(超高手)이다!
“흠.”
달칵.
장문산의 기세가 진정되자 귀검 장문영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염습되어서 썩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조카, 장현익의 목이 상자 안에 있었다.
장문영은 숭산에서 올 때만 해도 거대한 분노가 치솟을 거라 여겼지만, 막상 조카의 목을 봐도 무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얘 어쩌다 죽은 거야 형님?”
“……애들에게 못 들었나?”
귀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유극문 문주한테 죽었다는 얘기는 들었어. 여자애라며? 근데 내가 폐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쪽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잖아. 사돈이 뜬금없이 우리 애를 죽인 이유가 뭔지 짐작이 안 가는데.”
“너, 이놈! 혈육이 죽고 천휘문의 명예가 모욕당했다! 이 상황에서 그걸 따지게 생겼느냐!!”
마치 남의 일처럼, 너무나 무덤덤하고 냉정한 귀검의 말에 천휘문주는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카가 죽었는데 마치 옆집 사람이 죽은 것처럼 표정 변화나 기복이 하나도 없었다. 도저히 인간의 신경줄 같지 않았다.
천휘문주가 길길이 날뛰건 말건 귀검은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뭐시냐, 강호에서 남의 목을 벨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잖아? 기왕 복수할 거면 저쪽에서 내세우는 명분을 알고 싶은 거야. 그래야 제대로 칼을 맞대는 검사(劍士)다운 거라고.”
“크으으. 네 녀석은 정말로 평생 달라지질 않는구나.”
천휘문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설명해 주었다. 동생 앞이므로 감춰두었던 꿍꿍이도 솔직히 까발렸다.
“……환령은 먼저 손에 넣는 자가 임자인 지역이다. 영향력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소림사에 먼저 줄을 대든 무당파를 견제하든 맘대로 할 수 있지. 그곳을 지배하는 터줏대감이 유극문이다.”
“아하!”
“새로운 유극문주가 어린 계집애라길래, 현익이의 배필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코딱지만 한 문파를 쳐 봤자 망신이라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다시 천휘문주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기운이 일렁이자, 귀검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일이 기운을 제압하기도 귀찮을뿐더러, 다혈질 형님과 얘기하다 보면 자기까지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귀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현익이가 그쪽까지 찾아가서 처녀한테 몸 바치라고 깝죽대는 바람에 열받은 유극문주가 싹 다 죽여 버렸단 말이잖아? 말을 빙빙 돌리지 말라고 형님.”
지나치게 정곡을 날카롭게 찔러 버리자 천휘문주는 순간 굳어져 버렸다. 남의 일이라면 이런 독설(毒舌)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혈육인 조카가 죽은 일이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귀검의 정신머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이 미친 놈!! 현익이는 그런 애가 아니다!”
귀검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알게 뭐야. 이미 죽은 조카한테는 관심 없어.”
“…….”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리는 천휘문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도저히 이해 불가의 존재였지만 이제 와서는 상대 불가의 수준이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문파에서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불통(不通)이라는 별명까지 있겠는가? 귀검의 괴짜성은 정도를 지나쳐 있었다.
도리어 귀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님. 그건 그렇고 유극문을 쓸데없이 건드리다니…… 머리가 왜 그렇게 나빠?”
“뭐라고?! 우리 천휘문이 그깟 시골 문파 하나 어찌 못한단 말이냐? 네 힘이 없어도 충분히 유극문 따위는 짓누를 수 있어!”
아마 귀검에 대한 의존도 때문에 문주인 자신을 얕보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천휘문주는 열받아서 외쳤다.
재능의 격차가 너무 커서 질투조차 못했지만, 아직도 약간은 동생을 시기하는 열등감이 상존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폐관한 나까지 부를 필요가 어딨냐고?”
“흥! 좋든 싫든 네놈은 우리 천휘문의 간판이니 말이다. 네가 나타나는 것만으로, 유극문 떨거지들은 감히 내 아들을 참살한 대가에 공포를 느낄 거다.”
“…….”
그 순간 귀검 장문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 보게?’
그는 자기 형이 유극문의 진짜 실력을 알아채고서 자기를 불렀지만, 자존심 때문에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하는 양을 보자면 진짜로 유극문을 잡스러운 이류 시골 문파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형님. 며칠 전에 본진을 습격당했다며? 그 때문에 출진이 늦어지고 있잖아. 사상자 정리하고 금전회계 다시 짠다고.”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의문의 괴한들에 의한 습격이었다.”
“놈들이 유극문 문도라면 만만치 않은 놈들일 거 같지 않아? 순식간에 사십 명이 죽고 삼십 명이 중태잖아.”
달래듯이 귀검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자, 천휘문주는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그…… 그래. 그자들은 상당한 고수로 추정된다. 무공이나 별호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룡전(地龍戰)에서 활약할 수준 같더군. 사실 네가 그 괴한들을 상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몇 명인지 알아?”
“뭐라고?”
“놈들이 몇 명이라고 추측하냐구.”
천휘문주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행적과 위력으로 보아 최소 칠 인조 이상의 단체다. 사실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지만 네가 우리 문파의 기를 살려 줘야…….”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귀검은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러움을 느꼈다.
‘아, 아버지…… 저 힘들어요.’
결코 형을 바보 취급하지 말고, 형을 도와서 문파를 잘 이끌어 가라는 유언이었다. 그러나 형은 무공 재질은 둘째치고 두뇌도, 준비성도 부족했다. 형이 더 바보 소리를 하기 전에 귀검이 말을 끊었다.
“두 명이야.”
“뭐?”
“오기 전에 습격 장소를 보고 왔어. 그럴듯하게 흔적을 위장했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딱 두 명이서 무영지경(無影之境)으로 휘저으면서 여러 명인 척한 거야.”
“…….”
천휘문주는 입을 닫았다. 나름대로 자신과 천휘문의 사범들은 강호에서 명망 있는 고수라서 안목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 귀검 장문영의 안목을 의심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