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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21화)
5. 귀검(鬼劍)(3)
귀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형님. 천무검왕의 문파라고. 우리 혼자 집어삼키기엔 너무 부담이 커. 차라리 일단 처리를 해 놓고 나중에 경쟁을 해도 되잖아.”
“……어쩔 수 없겠군.”
이윽고 사절로 온 마환곡주의 제자, 환사문주의 제자가 정식 동맹을 맺었다. 그들이 혈서로 인증을 하자 모든 절차가 끝났다.
이로써 유극문은 천휘문, 마환곡, 환사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나같이 구파일방 다음가는 성세를 떨치는 대문파들이었다.
* * *
나는 검술 수련의 피로가 가시자마자 다시 뒷산으로 향했다. 성구몽 장로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장로가 피식 웃었다.
“어지간한 피로가 아니었을 텐데 하루만에 회복되는군. 사룡광마혈의 공력이 궤도에 올랐다는 뜻이다.”
“오늘도 소영검법과 소영보를 익히는 겁니까?”
“그건 오늘 한 시진만 수련해라. 오늘은 조금 다른 걸 가르쳐 주마.”
뜻밖의 말이었다. 당연히 검술과 보법을 수련할 줄 알았는데 이상한 전개가 되어 가고 있다.
“네?”
“그건 기본형만 알면 된다. 앞으로도 왠만하면 하지 않을 거다.”
나는 속으로 불안해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거? 단기 특훈이라지만 너무 대충대충 넘어가는데.’
강호의 검객이나 도객들은 무기 하나를 잡고 수십 년씩이나 열성적으로 연마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연습해도 경지를 뛰어넘지 못해서 좌절하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런데 고작 일주일 바싹 연습하고는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다니.
내 궁금증은 이윽고 소영검법 수련이 끝나자 밝혀졌다.
“자. 이게 소영검법 칠성(七成)의 위력이다.”
탁! 탁!
성구몽 장로는 일부러 가져온 듯한 단단한 목검을 들어서 채찍처럼 나무를 후려쳤다. 아름드리나무였지만 두 번의 타격에 껍질이 쩍쩍 갈라졌고, 세 번째 타격에 윗동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쿠쿵하는 소리와 함께 참나무가 무너지자 나는 깜짝 놀랐다. 속도와 힘을 담은 것도 아니고, 그저 나무를 목검으로 두들겼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태풍에라도 맞은 것처럼 나무가 찢어발겨진 것이다.
성구몽 장로가 설명했다.
“뛰어난 검객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검끝에 기를 응축시켜서 내부에서 터뜨리면 강철로 된 인간도 죽일 수 있지. 네 녀석이 도달한 게 이 경지니까, 더 이상은 시간이 아까워서 수련할 필요가 없다.”
“네?”
“너도 이걸 할 수 있단 말이다.”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성구몽 장로가 내게 목검을 휙 던졌다. 내가 반사적으로 붙잡자 그는 방금보다 두꺼워 보이는 참나무를 지목했다.
“너는 무심결에 가장 자연스러운 검세를 잡았다. 그때의 느낌을 살리되, 네 경락에서 뿜어지는 기가 검끝에 모인다고 생각해라. 곧 나무의 기(氣)도 느껴질 것이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의심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일단 해 보기로 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니까, 계집애처럼 자잘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검끝에 정신이 모이더니 이윽고 내가 수련했던 내공이 썰물처럼 몰리는 게 느껴졌다.
따악!
목검으로 한 번 두들기자 나무의 기가 오그라들면서 나의 내기(內氣)가 침투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순식간에 성구몽 장로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모아서 터뜨리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파삭!
쿠구궁!
네 번째의 타격에 나무가 안쪽에서부터 수액(樹液)을 터뜨리며 무너졌다. 나는 한 달만에 어쩐지 괴물이 된 것 같아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성구몽 장로가 헛기침을 했다.
“흠, 좋아. 이 정도면 네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된다. 오늘 가르칠 것은 적을 죽이는 방법이다.”
“죽이는 방법이라뇨?”
“몸을 지키기만 해서는 결국 강호에서 죽고 만다. 너를 거역하는 적을 죽일 수단이 없으면 답답해지는 상황이 많지.”
어째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침묵했다. 정파의 무림인들은 수신(守身)을 최우선 가치로 놓고 수련한다는데, 이 양반은 대놓고 살법(殺法)을 전수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내게.
“뭐, 일단 배우고 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옳은지 아닌지 따지고 싶진 않다. 인간이 만났을 때 결국 의지가 부딪히는 법이고,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일도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성구몽 장로가 그딴 철학적인 주제를 논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힘을 얻어야 하고, 성구몽 장로는 힘을 줄 수 있다. 애초에 현실적인 거래가 끝난 이상 인간 목숨을 논하는 데 의미가 있을 리가 없지.
“오늘부터 전수할 게 사룡광마혈의 정수(精髓)인 광혈인(光血印)이다. 조금 전에 네가 시전했던 폭기(爆氣) 수법을 더욱 심화시킨 물건이지.”
안 물어봐도 알 수 있다. 끝까지 익히면 사람을 일격에 폭사(爆死)시킬 수 있을 것이다. 흉악스러운 무공이었지만 나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저기, 인(印)이 들어갔다면 그건 장법(掌法)에 속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익힌 검법과 충돌하지 않을까요?”
내 이유 있는 질문에 성구몽 장로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정말 이상하구나. 어떨 땐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안 하다가, 지금은 경륜 있는 무림인 같은 이야기를 하니…….”
“그냥 그렇다고요.”
나는 괜히 캐물을까 봐 얼버무렸다. 무협소설을 보고 생각했던 거라고 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내가 둘러대자 성구몽 장로가 설명해 주었다.
“물론 광혈인은 장법으로 펼치는 게 가장 위력과 응용력이 좋다. 허나 검법(劍法), 도법(刀法)으로도 전개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폭기수법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경지라서, 요체만 이해하면 얼마든지 다른 무공에 적용할 수 있지.”
스윽.
성구몽 장로가 자신의 왼손을 들어서 바닥에 갖다대었다. 꿇어앉은 자세가 되자 마치 잠이라도 자려는 것처럼 보였다.
성구몽 장로는 힐끔 나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십 장 밖으로 피해라.”
“네.”
나는 군말 없이 멀리로 도망갔다. 이건 무협소설의 단골 유형이다. 새로운 절세무공이 등장하면 묘사를 극대화시키면서 위력을 강조해 준다. 이 근처에 뻗대고 있어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내가 달려서 십 장 바깥으로 왔을 때였다.
쿠콰콰쾅!
마치 폭약이라도 터진 것처럼, 내 등 뒤에서 자갈과 흙바람이 마구 몰아쳤다. 나는 새 옷이 더러워지는 걸 신경 쓰기도 전에, 돌풍 사이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뻗어 오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맹렬하고 강한 힘이라서 나는 기겁하면서 뒤로 굴렀다.
말이 십 장이지, 화살을 쏘아도 바로 맞추기 힘든 거리다. 나는 야산에 흙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토괴(土塊)가 허공에 날아다니는 걸 보았다. 말 그대로 작은 구릉 하나가 망치에 맞은 것처럼 그대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무협소설에서 글로는 보았지만 육안으로 볼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지금껏 보았던 무협소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파괴력이다. 무협의 관용구인 ‘저게 사람인가’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쿠구구구…….
돌바람이 가라앉자, 그사이에서 시꺼먼 신형이 날아왔다. 신기하게도 성구몽 장로는 이 돌풍 속에서도 옷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손을 부들 떨더니 평정을 찾고는 말했다.
“이게 광혈인(光血印) 십 성(十成) 경지의 위력이다. 이 정도 위력을 보이고자 하면 내 내공의 삼 할을 소모해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지.”
나는 마치 터진 만두처럼 내려앉은 구릉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걸 사람한테 쓴다고요?”
“조금 전에는 준비 동작이 커서 실전용이 아니다. 실제로는 지금의 절반 정도 위력으로 상대방에게 광혈인을 쏟아붓는 편이지.”
“…….”
절반 위력이라지만, 이딴 걸 사람이 맞으면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강철로 된 인간도 죽인다는 게 절대 허언(噓言)이 아니다. 파괴력 하나로는 그야말로 화약고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화력(火力)을 보유하고 있었다.
“검법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을 알겠느냐? 검기(劍氣)에 광혈인의 수법을 응용하면 상대방은 예고없이 상반신이 터져 나간다. 익히기만 하면 낮은 수준에서는 무적(無敵)에 가깝다.”
“그, 그렇네요.”
검날을 부딪히다가, 뜬금없이 기운이 터지면 방어하기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나는 광혈인의 사기성을 깨닫고 전율했다.
성구몽 장로는 꽤 힘을 쏟아서 피곤한지 바위에 걸터앉았다.
“넌 폭기의 요령을 터득했으니 사흘이면 광혈인 일 성(一成)의 성취를 보일 거다.”
그리고 준비해 온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광혈인은 사실 사룡광마혈의 내공수법을 발전시키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수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사문(師門)은 사천(四川)을 오십 년간 제패했다. 이 정도면 네놈이라고 해도 천휘문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아직 부족한데요.”
“뭐?”
성구몽 장로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성구몽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그냥 마주치는 놈을 다 죽일 수 있는 공격수법이잖습니까?”
“그래. 뭐가 부족하단 거냐?”
“화살이 날아오거나, 다(多) 대 일로 싸우거나, 독을 뿌리면 어쨌든 몸뚱이가 약하니까 죽겠죠. 기를 둘러서 막아낼 수법이 필요한데요.”
내가 따지고 드는 말에 성구몽 장로가 어이없어 했다.
“뭐라? 네놈은 지금 내게 호신강기(護身|氣)까지 요구하고 드는 게냐?”
“호신강기란 게 진짜 있다면 말이죠.”
나는 무림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아니라서 뒷말을 흐렸다. 이렇게 말을 해 놨는데 무림에 호신강기가 없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분노한 성구몽 장로에게 오늘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