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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9화)
제5장 묘인족을 훈련시키다(3)
콰카카카카카카카.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순수하게 마나로만 이루어진 검이 홀연히 생겨났다.
“서…… 설마?”
그리고 그것을 보는 칸의 눈동자는 격정으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검강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즉 검이나 손톱 같은 매개 없이 바로 허공에다 대고 마나를 뿜어 댈 수 있는 기술, 그리고 오직 소드 킹의 경지를 넘어선 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바로 그 기술이었다.
“허리.”
하지만 나는 대결 상대를 눈앞에 두고 군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내 주특기 중 하나인 검도 기술을 사용해서 섬광같이 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퍽.
물론 한 번도 이 같은 기술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칸이 내 일격을 제대로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크으으으윽.”
결국 칸은 내 일격에 벌겋게 부어오른 옆구리를 부여잡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물론 내가 만든 궁극의 오러 소드는 분명 살상용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마나라지만 이번에 나는 그것을 꽉꽉 뭉쳐서 마치 몽둥이처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도를 연상해서 만든 게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오러 소드였다. 어쨌든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었기에 칸도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하하하. 이거 너무 허무해지는데? 사기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더니…….”
하지만 칸은 여기서 포기할 마음은 없는지 내게서 배운 기술을 사용하여 나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칸의 양손에 맺혀 있는 열 줄기의 검강 때문에 맨손이라기보다는 호조(虎爪)를 양손에 찬 상대와 대결을 한다고 보는 게 훨씬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무인이라면 긴 무기를 들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유리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하물며 칸은 싸우는 기술 자체를 내게서 배우지 않았던가?
“머리.”
어쨌든 칸은 채 내게 달려들기도 전에 한 번 더 내 오러 소드에 호되게 머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크으윽.”
그나마 칸도 그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는지 자신의 검강으로 내 오러 소드를 살짝 빗겨 내기는 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일격으로 바로 혼절을 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내가 말했다.
“어쨌든 한 번에 보내 주지는 않을 거니까 각오하라고…… 아버지!”
그 후로는 대결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었다.
같은 묘인족끼리의 싸움이라면 또 모르되 검을 든 상대와 마주칠 때라면 분명 알아 둬야 하는 것들, 즉 검술의 대처법 등을 말이다.
결국 칸은 그리 오래지 않아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바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나는 다시 오러 소드를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굳이 내가 검술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대륙에 널리고 널린 게 검술일 테니 말이야. 어쨌든 내가 오늘 일부러 검술로 상대를 한 것은 우리 묘인족만의 싸움이 싸움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야. 아버지! 다른 종족으로부터 묘인족을 지키고 싶다면 지금보다 시선을 훨씬 더 넓게 가질 필요가 있어.”
“…….”
칸은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 뜻을 십분 이해했거나, 아니면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소리겠지. 어쨌든 나는 할 건 다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칸에게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뒤돌아 가려고 하자 칸이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미친 사람처럼 쿡쿡 웃어 대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크. 설마 소드 카이저(Sword Kaiser)라니…… 전설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줄은…….”
“응?”
소드 카이저란 말에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칸을 돌아보았다. 칸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안의 묘인족이라는 건 말이야. 정말 사기다. 태어나면서부터 소드 카이저라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
칸이 말했다.
“어차피 인간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낸 기준이긴 하지만…… 보통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자를 소드 나이트라고 부르지. 한마디로 오직 검 하나만으로 기사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검강을 다룰 줄 알게 되면 소드 킹이라고 불러 준다. 다시 말해 일국의 왕과도 비등한 힘을 가졌다는 뜻이지.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소드 킹까지라고 하더군. 물론 그 이상의 경지는 기록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가 아는 한 그 이상의 경지에 올라간 무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호사가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존재가 바로 소드 카이저다.”
“…….”
“물론 정확하게는 소드 엠페러(Sword Emperor)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호사가들이 인간 황제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봐 일부러 지금은 쓰지 않는 카이저(Kaiser)라는 단어를 썼다고 하더군. 어쨌든 검의 끝을 이룬 자, 인간을 능가한 자, 검 하나로 능히 드래곤과도 맞설 수 있는 자…… 그런 자를 상상하며 호사가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이 바로 소드 카이저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녀석이 현실에 존재해도 되는 건가? 응? 카이렌! 말해 봐라.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느냔 말이다.”
“불만이면 내가 아니라 신에게 말해라. 날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카이젤이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마나 없이 한번 대결해 볼까?”
하지만 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칸의 그 태도가 도리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칸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면상을 정면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아까 인간의 한계가 소드 킹까지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한계는 도대체 누가 정한 거지?”
“…….”
“이해할 수 없군. 왜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거지? 그리고 왜 남이 타고난 걸 부러워하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묘인족은 태어날 때부터 소드 나이트다. 그럼 다른 종족에 비해 엄청 유리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수십 명이나 되는 소드 킹이 우리 묘인족에는 너 하나뿐이로군. 물론 나같이 타고난 녀석을 제외하면 말이야. 어쨌든 내가 소드 카이저인 게 불만이면 왜 스스로 노력해서 소드 카이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내가 내 살을 깎아서라도 너와 같은 경지로 내려앉길 원하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얻은 불공평한 힘이기 때문에?”
하지만 내 말에 칸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지고 말았다.
“물론 나도 불공평한 건 알아, 아버지. 하지만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말이야. 세상이란 원래 그리 평등한 곳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이 엿 같은 세상에 불평이라도 늘어놓고 싶거든 그 정도 노력은 하고 나서 하라고. 죽을 만치 노력을 했는데도 안 되면 그때는 나도 당신의 불평을 들어 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내가 다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칸이 그런 나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딱 한 마디만 내뱉고는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다.
“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 칸과 대결을 펼칠 일은 내 일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낙오자에게 인정을 보일 정도로 나는 마음이 넓지 못하다.
‘보다 높은 목표가 있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백기를 들다니…… 당신도 결국 거기까지란 소리로군.’
불가능에 도전해서 실패를 맛보는 것과 도전해 보지도 않고 좌절하는 건 분명 큰 차이다. 아니! 그게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 먹은 거다. 그 정도 각오로 도전할 용기도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도 말란 말이야.
제6장 노예사냥꾼(1)
소문은 순식간에 묘인족 전체로 퍼져 나가 버렸다.
내가 레바돈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소드 카이저라는 사실과 새롭게 소드 킹의 경지에 오른 칸조차 내게 변변한 대응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철저하게 박살이 나 버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칸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 변한 건 아니고…… 마치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남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족장 대리의 일과 나에게서 배운 기술로 앞으로 묘인족을 단련시킬 계획에만 몰두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최강이라는 욕심을 버렸군. 뭐! 묘인족으로서는 힘든 결정을 내린 건가? 하긴…… 목적을 가진 삶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지.’
물론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의 삶마저 모두 매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쉽게 말해 나같이 목적 없이 어영부영 사는 놈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 모든 놈들이 최강만 부르짖으며 살면 그것 또한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결국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최선이겠지. 세상이란 건 결국 다 마음먹기 나름인 거야.’
그런 의미에서 칸은 별로 후회를 남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아들의 입장에서 그런 아버지의 선택을 굳이 나쁘게 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성격상 말로 표현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에게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그 후로 내게 도전하는 묘인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게 훈련을 받은 묘인족들은 칸처럼 하나같이 나에게 도전을 해 왔는데 그들 역시 승리에 대한 갈망보다는 내게서 뭔가 하나라도 더 배워 보겠다는 열정이 훨씬 더 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내게 도전을 하지 않는 묘인족이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케린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2년 동안이나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다니던 조교 생활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 사실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는 않고 있었다.
어쨌든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이제 일족의 족장으로서 삼신기를 이용해 주변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할 나였지만…….
“귀찮아.”
결국 나는 그런 이유로 여전히 집에서 뒹굴거리는 신세였다. 아! 위대한 귀차니즘이여. 내 인생을 좀먹고 내 체력을 좀먹는 너를 떨쳐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어쨌든 나는 간만의 달콤한 휴식에 취해 쉽사리 길을 떠날 결심을 하지도 못하고 미적미적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집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묘인족 여자들의 등살에 못 이겨서라도 한창 길을 떠날까 고민 중이었다.
사실 내게 와이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껏 묘인족 여자를 상대로 자식이 생길 만한 짓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족의 여인네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족 최강의 남자에게 첫 여자이자 그 남자가 가질 많은 자식들 중에 첫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는 영광이 그녀들의 가슴에 불을 댕겨 버린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건 역시 세이란이었다.
“카이렌…… 응? 날도 이렇게 좋은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같이 밖으로 놀러 나가자. 어차피 너나 나나 성인식도 마쳤고 이제 마을 밖으로 나가도 되잖아. 응?”
게다가 세이란은 지난 2년간의 인연을 이용해서 재주도 좋게 내 집으로 쳐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 계집애가…… 내가 귀찮다고 했지. 너 그만 안 나가?”
하지만 세이란은 내 협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꿋꿋했다.
내가 집 밖으로 쫓아내면 어떻게든 다시 기어 들어왔고 내가 시안나에게 절대 집 안에 들여놓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놓아도 용케 그녀를 구워삶아서는 시안나조차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여자고 나발이고 한번 혼줄을 내 주겠다고 결심을 하던 찰나에 의외의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카이렌.”
“여어! 오랜만이네, 아버지! 요즘 뭐 하고 지냈어? 뜸한 걸 보니 요즘 꽤나 바쁜 모양이지?”
칸은 내가 도대체 누구 때문에 바쁜 건 줄 아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내게 신세한탄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닌 듯 얼른 말문을 열었다.
“어제부터 일족의 아이 둘이 행방불명이다. 게다가 근처에서 인간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 또 묘인족을 노리는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한 모양이야.”
그 말에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원래 묘인족은 그 흉포함만 빼놓고 본다면 외형적으로는 꽤나 봐 줄 만한 종족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잘만 길들이면 배신도 하지 않고 인간을 잘 따르게 된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묘인족에게 있어 수치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묘인족은 대륙에서도 꽤나 인기가 있는 종족이었던 것이다. 물론 노예로서 말이다.
어쨌든 나도 예전에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이곳 인간들을 적대시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노예사냥꾼만큼은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울컥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흔적이 발견된 곳이 도대체 어디지?”
칸도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동쪽 산등성이에 있는 흔들바위 뒤편이다.”
그 말에 나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물론 다리에 마나를 집중하자 내 몸은 한결 가벼워졌고 마치 나는 듯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