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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1화)
제6장 노예사냥꾼(3)


“천?”
나는 그 숫자에 잠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인족의 숫자가 대강 일만 정도 된다. 그런데 그중 10%가 넘는 숫자가 인간이나 다른 종족의 노예로 전락해 있다고? 게다가 그것도 정확한 숫자는 아니란 말인가?
“끄응! 그 정도나 된단 말인가? 정말 한심하군. 그럼 혹시 노예로 잡혀간 녀석들 중에 위치가 파악된 놈들은 몇이나 되지?”
하지만 칸은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종족을 노예로 삼는 것은 인간들 중에서도 말종으로 분류되는 놈들만 하는 짓이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굳이 묘인족 노예를 데리고 있다고 떠벌리고 다닐 이유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버지! 혹시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는데 여력이 안 돼서 구출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뭐 그런 녀석은 없는 거야?”
내 말에 칸은 미간을 어루만지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말한 사례가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있으면 얼른 말해. 내가 지금 당장 구해 올 테니까…….”
하지만 칸은 이번에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포기해라. 그 녀석들은 구하고 싶어도 절대 구할 수 없다.”
“뭐?”
그 말에 내 눈빛이 순간 살벌하게 변해 버렸다.
‘한번 포기를 하더니 그 맛에 들려 버린 건가? 응? 그런 거야? 아버지?’
콰당.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칸의 목줄기를 움켜잡고 근처 아름드리나무에 밀어붙이고는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부탁이니까 내 신경을 너무 건드리지는 말아 줘. 응?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일단 말부터 하시지.”
“크…… 쿨럭…… 후레자식 같으니…… 마…… 말해 줄 테니까 일단 이 손부터 놔.”
어쨌든 내가 다시 손을 놓자 칸이 거칠게 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넌 힘만 세지 제대로 생각이란 걸 할 줄도 모르는 놈이다. 내가 말하는 놈은 바로 이곳 칸타네 산맥의 블루 드래곤 카르서스란 말이다. 이건 너라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호오! 드래곤이란 말이지? 말로만 듣던 그 비만 도마뱀?
“하지만 아버지! 당신 입으로 직접 소드 카이저는 드래곤과도 맞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었나?”
“빌어먹을 놈, 쓸데없는 건 정말 잘도 기억해 내는군. 하지만 내가 말했지. 그건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이번 일은 그냥 네가 포기해. 괜히 카르서스의 신경을 잘못 건드려 놓았다가는 우리 일족이 더 이상 칸타네 산맥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단 말이다.”
하지만 나는 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놈이 데리고 있는 일족의 숫자는?”
“젠장! 미치겠군. 정말 할 생각이냐?”
“걱정 마. 되도록이면 나도 일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테니까. 그래서 놈이 데리고 있는 묘인족의 숫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지?”
내 말에 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대강 스물? 아니면 그보다 좀 더 많은 정도일 거다. 카르서스는 우리 묘인족에게 관심이 많기로 유명하지. 그래서 다른 드래곤들처럼 몬스터를 부리지 않고 묘인족들을 데려다 자기 레어의 경비를 맡기고 있다고 하더군.”
“흐음! 그래? 꽤 많은 숫자로군. 젠장! 이거 몰래 데리고 나오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는데…….”
“제발 부탁이니까 이번만큼은 그냥 네가 포기를 해라, 카이렌! 응? 이런 일로 널 잃을 수는 없단 말이다.”
칸의 말에 나는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그래도 지 자식이라고 내 생각을 조금은 해 주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일족의 책임자로서 내가 가진 전력을 잃는 게 아깝기 때문? 물론 그게 뭐가 됐든 난 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위치는?”
간략한 내 말 한마디에 칸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칸도 내 무대포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 것이다.
“역시 피바람을 막기 위해서 홍안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홍안이 피바람을 몰고 오는 거였어. 젠장! 빌어먹을 자식. 넌 절대 편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어쨌든 카르서스의 레어가 있는 곳이 표시된 지도가 있으니 그걸 건네주마. 따라와라.”
나는 칸의 말에 싱긋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제7장 거스를 만나다(1)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노예사냥꾼들 앞에서 연극을 한답시고 내 스스로 만든 상처도 대강 회복되었을 즈음해서 나는 칸이 건넨 지도를 손에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물론 날 적극 만류하던 시안나도 결국 칸처럼 내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든 연후에 못내 이것저것 짐을 챙겨 주며 제발 몸조심하라고 내게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었다.
‘역시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어쨌든 나는 시안나가 건넨 짐 중에 식량으로 챙겨 준 육포를 한 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흐음! 칸타네 산맥이란 곳도 꽤나 구석진 곳이로군.”
내가 이 세계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레바돈 대륙의 지도는 지구의 그것에 비하면 한참 조잡한 수준이었다. 고작해야 펜으로 대강 산과 바다만 그려 둔 정도랄까?
어쨌든 레바돈 대륙은 크게 두 대륙으로 나뉘는데 템페르 산맥을 중심으로 왼쪽이 서 대륙, 그리고 오른쪽이 동 대륙이었다.
물론 남쪽으로 내려가면 페른 해협을 지나 남 대륙이라는 곳도 있지만 거긴 레바돈과는 거의 교류가 없어서 그런지 레바돈 대륙이 아닌 아예 별개의 대륙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칸타네 산맥은 그 레바돈 대륙 중에서도 극동 지역에 위치한 산맥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그 동 대륙에서 가장 큰 인간 국가가 세틴 제국이라는 거군.”
나는 다시 지도상에서 동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제국의 표식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동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인만큼 그곳에 잡혀 있는 묘인족들의 수도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을 것이다.
“언젠가 이곳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군.”
하지만 지금 당장은 카르서스인지 티셔츠인지 뭔가 하는 놈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나도 드래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물론 드래곤이 무서운 건 아니다. 하지만 용기와 객기는 분명 다른 법이다. 어쨌든 나도 바보는 아니라서 먼저 그 드래곤이라는 놈의 실체부터 파악해 둘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그놈의 모습이나 크기, 그리고 싸우는 법 등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어떻게 대처를 해도 할 것 아닌가!
“크기는 분명 인간보다 월등히 크겠지? 그럼 역시 검을 사용하는 게 좋으려나? 그렇다면 일단 적당한 검부터 구해야겠군.”
어디까지나 타고난 요행에 불과하지만 나 역시 소드 카이저라는 사실에는 분명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소드 카이저란 검 없이도 검술을 펼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효율이라는 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허공에다 대고 마나만으로 검을 만들어 내는 건 낭비가 심해도 너무 심했던 것이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단기 승부를 펼치려고 한다면 또 모르되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소드 카이저라도 검을 손에 들고 싸우는 게 훨씬 더 이득인 셈이다.
“결국 마을부터 먼저 찾아봐야 하는 건가? 하긴! 며칠 더 시간이 지체된다고 해서 그사이에 드래곤의 레어가 어디로 이사를 가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그 생각에 다시 지도를 살펴보니 근처 마을이란 게 칸타네 산맥을 내려가서 산기슭에나 있는 게 아닌가!
“쳇! 생각보다 며칠은 더 걸리겠군.”
하지만 기왕 마음을 먹은 거면 행동도 빠르게 하는 게 좋겠지. 나는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는 얼른 붉은 구슬을 꺼내 내 모습을 다시 예전의 강찬우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물론 이곳 레바돈에서 동양인의 모습도 꽤 눈에 띄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주변에 맞춰 굳이 다른 모습으로 바꿀 생각도 없었다(사실은 양놈 모습을 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을 뿐이다).
어쨌든 그 후로는 계속되는 산행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시안나가 선견지명을 발휘한 덕분에 준비한 식량은 넉넉했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달려 나는 이 부근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그러니까 지도에는 칸타네 산맥의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 결성된 헌터 마을이라는 기다란 부연 설명이 달려 있는 크란트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휘유! 그러고 보니 돈이 한 푼도 없군.”
그냥 검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줄기차게 마을을 찾아왔는데 잘 생각해 보니 내 수중에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생각보다 나도 좀 멍청하단 말이야. 크크큭!
하지만 나는 ‘이리저리 뒹굴다 보면 뭔가 수가 나겠지.’ 하는 생각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방법을 찾으려면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결국 나는 중심가의 주점을 찾아 돈 한 푼 없는 주제에 어슬렁거리며 기어 들어가 바텐더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흐음! 처음 보는 손님이로군. 호이친 사람인가?”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대뜸 바텐더에게 말했다.
“이 마을에서 돈 되는 일이 뭐가 있지?”
내 말에 이 주점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바텐더가 잠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샐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떠돌이인가? 혹시 술값은 있나?”
“흥! 그거야 돈만 벌면 넉넉하게 쥐어 줄 수 있지.”
하지만 바텐더는 내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원 재수가 없으려니…… 호안! 여기 버러지 떴다. 나와서 이 자식 좀 치워 버려.”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바텐더의 말에 이 주점의 전속 해결사인 듯 보이는 거칠게 생긴 거한이 자기 덩치에 비해 상당히 비좁아 보이는 문을 낑낑거리며 빠져나왔다.
“마스터, 대낮부터 사람 부려 먹는 건 이제 좀 그만 두면 안 되겠수?”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 사내는 목과 손마디를 뿌드득 꺾으며 한탕 해 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소란이 일자 주점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물론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적어서 그리 큰 소동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손님들 면상을 하나하나 뜯어보니 간만에 싸움 구경을 하게 되어서 상당히 기쁘다는 눈치였다. 내가 말했다.
“여기서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지? 내가 원하는 정보만 주면 그냥 얌전히 물러나 줄 테니까…… 아니! 돈이 손에 들어오면 보답으로 한턱 크게 쏠 테니까. 당신한테도 그리 나쁜 소리는 아닐 텐데.”
하지만 내 말에 바텐더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너 같은 놈은 나도 소싯적부터 정말 많이 봐 왔다. 애송이! 하지만 자기 말을 제대로 지키는 애송이는 별로 없더군. 너야말로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술값이 없으면 그냥 얌전히 문 열고 밖으로 나가.”
“정말 야박하군.”
어쨌든 바텐더는 더 이상 내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자기 해결사에게 눈짓을 했고 호안이라고 하는 그 덩치 큰 사내도 이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쿠어어어어어.”
근데 니가 곰이냐? 괴성을 지르게?
난 그놈 하는 꼴이 너무 한심해서 굳이 제대로 상대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옆에 있는 의자를 집어 들고는 냅다 후려갈겨 버렸다.
퍼어억!
콰당탕탕!
물론 나무로 만든 의자는 마치 각목 격파 시범을 보는 것처럼 시원하게 박살이 나 버렸고 호안이라는 녀석도 그 충격에 이기지 못하고 이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 와중에 팔과 머리의 피부가 찢어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 건 두말할 것도 없다.
“크으으윽.”
“뭐야? 그나마 덩치라도 좀 있어서 뭐라도 한가락 하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히 약골이잖아? 야! 이 꼴통아. 아무리 그래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냐?”
나는 그놈 하는 꼴이 너무 한심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호안이라는 녀석의 배를 한번 툭 걷어차고는 다시 싱긋 웃는 표정으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이봐! 마스터. 해결사를 두려면 좀 더 제대로 된 놈으로 구해 두라고. 이딴 놈을 데리고 있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기나 하겠어?”
“크으으윽.”
그 말에 바텐더도 침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호안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저 호안이라는 녀석도 결코 약한 건 아니다. 아니, 보통 기준으로 보자면 녀석도 힘깨나 쓰는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내가 힘 조절도 제대로 안 하고 그대로 후려갈긴 통에 평소 실력보다 더 형편없이 보인 것뿐이었다. 사실 묘인족의 힘을 그대로 버텨 낼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바텐더가 말했다.
“실력이 좋군. 어쨌든 저 녀석도 이 근처에서는 한가락 하는 녀석인데 말이야. 좋다! 사죄도 겸해서 오늘은 내가 한 턱 쏘지.”
그리고는 주석으로 만든 잔에 맥주를 그득 담아서는 내게 들이밀었다.
“흐흐! 당신도 꽤 간담이 있는 사람이로군. 대처 능력이 꽤 좋아.”
내가 바텐더가 내민 맥주를 꿀꺽 마시자 바텐더 역시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