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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2화)
제7장 거스를 만나다(2)
“좋게 봐 줘서 고맙다. 그런데 일거리를 찾고 있다고 했나? 혹시 괜찮다면 저 녀석 대신 우리 집에서 해결사 일을 해 보지 않겠어?”
하지만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 필요해.”
“그렇다면 몬스터를 잡는 일이 최고지.”
그러나 내 말에 대답을 한 건 바텐더가 아니었다. 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니 내 등 뒤에 아무래도 아직 소드 나이트도 안 되는 수준으로 보이는 금발의 애송이 하나가 피식 웃으면서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반갑다. 나는 첸이라고 한다.”
물론 그런 애송이가 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나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그 애송이를 무시한 채 계속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냉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첸이라는 인간은 마치 오지랖 넓은 사람처럼 내 옆 자리에 의자를 가져와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첸이 말했다.
“나는 샤이플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어. 이번에 트롤을 사냥해 달라는 마법사 길드의 의뢰를 받아서 동료들과 함께 칸타네 산맥을 찾은 길이야. 근데 의뢰가 의뢰이다 보니 아무래도 실력 좋은 동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더라고……. 혹시 우리 일에 같이 참여해 볼 생각 없나?”
근데 일단 듣고 보니 조금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뭐! 트롤 잡는 것 정도야 껌이고 아쉬운 만큼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는 아니지 않은가. 내가 말했다.
“검과 장비, 그리고 적당한 식량.”
“응?”
첸은 잠시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내 말뜻을 이해한 듯 이내 아하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다.
“후후후! 의외로 욕심이 없는 친구로군. 그 정도는 우리 동료가 되면 기본적으로 딸려 오는 거야. 만일 일만 제대로 해결된다면 그것 말고도 꽤 짭짤한 돈을 만질 수 있게 될 거다.”
“…….”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첸은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쨌든 생각이 있다니 잘됐군. 따라와! 내 동료들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리고는 한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나도 따라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바텐더가 슬쩍 내게 말을 건넸다.
“조심하게.”
내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쳇! 싱거운 사람 같으니…….”
어쨌든 내가 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첸이 테이블에 있는 세 사람을 내게 하나씩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해. 이쪽은 같은 샤이플 용병단의 케드로, 나와 마찬가지로 이급 용병이야.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친구는 마법사로 실리언이라고 하는데…… 아직 3클래스 정도지만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친구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스, 자네처럼 이번에 합류하게 된 자유 용병이야. 실력은 나도 아직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친구야. 자! 그럼 이번에는 자네 소개를 한번 들어 보기로 할까?”
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카이렌.”
하지만 내가 이름만 말하고 퉁명스레 고개를 돌려 버리자 그도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어…… 흠! 꽤나 과묵한 친구로군. 그런데 직업은?”
“일단 떠돌이 검사라고 해 두지.”
“검사라는 녀석이 검은 또 어디다 팔아먹은 거지? 혹시 배고파서 대장간에 떠넘기기라도 한 건가?”
내 대답에 문뜩 거스라는 친구가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 친구의 본심이라기보다는 은근슬쩍 나를 떠보려는 기색이 더 강해 보였다. 물론 나 역시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갈 만큼 한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했다.
“검이 없어도 너 같은 놈 정도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거든? 그래서 평소에는 잘 안 들고 다녀.”
그런데 이 거스라는 친구도 만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은근슬쩍 맞받아친 도발에 도리어 피식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거스 파이른이라고 한다. 물론 성이 있다고 해서 뭐 귀족 집의 자제 같은 건 아니야. 이미 망해 버려서 흔적도 남지 않은 집안의 잔해 같은 거지.”
하지만 그 인사에 나보다 첸이나 다른 인간들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어라? 거스! 당신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어?”
어쨌든 거스는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이 친구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거스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카이렌 강이다. 나 역시 귀족은 아니고…… 솔직히 ‘강’이라는 성도 당신 말 듣고 방금 그냥 재미 삼아 한번 붙여 본 거야. 평소에는 카이렌이라고 불러 주면 돼.”
“그래? 훗! 생각보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일단 앉아라.”
거스의 말대로 난 적당히 빈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초면이다 보니 나머지 놈들은 머쓱한 분위기를 피해 보려는 듯 연신 헛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 파티에 합류한 걸 축하한다.”
하지만 이럴 때는 그룹의 리더인 바로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주장이라도 하려는 듯이 첸이 손뼉을 짝짝 치며 주위를 환기시킨 연후에 그렇게 말했다.
“카이렌! 뭐…… 이번에 새로 합류한 만큼 간단하게 일정부터 말해 주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한 번 더 되새긴다고 생각하고 들어 줘.”
그 말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인간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걸 확인한 다음에 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이번에 정보 길드에 비싼 돈을 주고 이 근처에 트롤이 사는 동굴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그곳에 둥지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은 부락이 아니라 그냥 가족 정도의 수준이라더군. 정보에 따르면 대략 대여섯 마리 정도로 이루어진 무리라고 하던데 그중에 서너 마리는 아직 새끼인 것 같아. 결국 두 마리만 제대로 된 어른인 셈이지. 어쨌든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 인원으로도 충분할 거야. 그래서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생각이야. 아! 물론 카이렌에게 장비를 모두 챙겨 주고 난 다음에…….”
물론 나도 서둘러 출발하는 데는 찬성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 굳이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별말이 없자 첸이 다시 말문을 이어 나갔다.
“대강 작전은 이래. 일단 어른 트롤이 두 마리 정도일 거라고 예상하고 한 마리는 나와 케드로가,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거스와 카이렌이 담당한다. 물론 마법사인 실리언은 뒤에서 우리 네 사람을 적절히 보조해 주는 형식이고 말이야. 일단 먼저 트롤을 처리하는 쪽이 바로 다른 그룹에 합류해서 나머지 트롤을 처치한다. 그리고 새끼는 두 마리 트롤을 모두 처리하고 난 다음에 천천히 생포할 생각이야.”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럴 경우 원래라면 모두 뭉쳐서 한 마리 한 마리 차근차근 사냥해 나가는 게 훨씬 더 안전하지 않나(쉽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있다)? 내가 소싯적에 훈련이랍시고 다른 묘인족들 데리고 마을 근처에서 트롤을 여러 번 사냥해 봐서 잘 안다.
물론 그때야 거의 기분 전환 삼아 한 짓이지만 어쨌든 지금 파티 수준을 보니 트롤 두 마리도 상당히 빠듯할 듯 보였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다시 또 인원을 나누다니…….
이 경우에는 차라리 계책을 써서 트롤을 따로따로 떼어 놓은 다음에 각개격파를 하는 게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파티의 리더는 첸인 모양이니 내가 거기다 대고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나는 원하는 장비만 얻으면 되니까.
“대강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나는 지금 바로 장비를 챙기도록 하지.”
그리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케드로라는 친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같이 갔다 오지. 술값은 여기 있다.”
아무래도 첸이 리더라면 케드로는 이 파티의 총무쯤 되는 모양이다. 케드로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내게 같이 가자는 듯이 고개를 문밖으로 휙휙 저어 보였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장비는 의외로 소박했다.
아무래도 검이란 게 그리 싼 물건은 아닌 듯 대장간에서 내가 구할 수 있었던 물건은 마치 누가 쓰다가 버린 것 같은 후줄근한 바스타드 소드가 전부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는 데다가 녹이 슬어서 색깔까지 얼룩덜룩 바래 있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날로 벨 것도 아니고…… 검의 강도야 마나로 대충 보강하면 되겠지.’
사실 나에게는 천하의 명검이든 누가 쓰다 버린 쓰레기이든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도리어 나는 이 검이 내가 주로 쓰던 죽도와 크기나 모양이 어느 정도 비슷해서 상당히 마음에 든 상태였다. 게다가 전 주인이 꽤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손잡이 가죽도 손에 착 들러붙을 만치 꽤나 잘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케드로는 고작 이런 검밖에 못 구해 준다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지금 우리 예산으로는 그 정도밖에 구해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이 해결되면 괜찮은 검으로 하나 장만할 수 있을 거다.”
“아! 신경 쓰지 마. 나야 어차피 그냥 공짜로 얻는 검인데 불평을 늘어놓을 입장은 아니지.”
어쨌든 다시 로브와 적당한 장비를 챙겨 들고 술집으로 돌아오니 일행은 벌써 2층의 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다음이었다.
음! 그리고 보니 여긴 술집과 여관을 겸업으로 하는 곳이었군. 물론 한국에서는 술집 겸 여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이 조금 생소하기도 했다. 케드로가 말했다.
“첸이 방을 3인실과 2인실, 그렇게 두 개를 빌려 뒀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너는 거스와 같이 한방을 쓰면 될 거다.”
“…….”
아무래도 리더인 첸은 원래부터 익숙한 세 사람과 이번에 새로 영입한 외부 인사를 따로 나눠 놓을 셈인 모양이었다.
그 말은 우리에게 크게 정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이들과 오랫동안 함께할 생각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느긋하게 거스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왔나? 그래…… 장비는 좋은 걸로 구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거스는 자신의 검을 꺼내 정성껏 손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꽤 좋은 검이로군. 예전에 귀족 집안이었다고 하더니 그게 영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내 말에 거스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 그렇지. 하지만 그래 봤자 지금은 고작해야 트롤을 잡는 데 쓰일 뿐이야. 그런데 네 검은?”
내 허리에 채워 놓은 낡은 검을 보고는 거스가 살짝 눈살을 찡그려 보였다.
비록 검집에 담겨 있어서 내 검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검집이나 손잡이의 손질 상태만 봐도 형편없는 검임을 대번에 눈치 챈 것이다.
스르르릉.
결국 거스는 자신의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고는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보여 줘 봐.”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검을 뽑아서 거스에게 건넸다. 하지만 내 검을 받아 드는 거스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져 버렸다.
“쓰레기로군.”
“어차피 공짜로 얻은 검인데 이 정도도 감지덕지지. 난 크게 개의치 않으니까 너도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내 말에 거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런 검을 트롤의 생살에 쑤셔 박았다가는 뼈를 베기도 전에 부러져 버린다. 이런 건 검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호오? 그 정도냐?”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마나를 다룰 줄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그 사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내 태도에 거스는 도리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내게 검을 건넸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는군. 너도 유념해 둬라. 녀석들은 너나 나나 그냥 소모품 정도로 쓸 작정일 거다.”
“소모품?”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거스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마 위험한 일에는 계속 우리를 내몰 거다. 우리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여 보겠다는 속셈이겠지.”
나는 거스에게서 내 검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
“그런가? 뭐! 솔직히 나도 대강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번 사냥에 뛰어든 네 저의가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
거스는 잠시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물론 나도 대답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기에(사실 듣든 말든 내겐 아무 상관도 없었기에……) 그냥 거스의 맞은편 침대에 몸을 날려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의외로 거스의 침묵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나는 거스가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가 보다, 생각하고는 이내 거기에 관심을 끊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내가 팔베개를 하고 슬쩍 선잠에 빠져 들려고 할 때 문뜩 거스가 말문을 열었다.
“돈이 필요해.”
“응?”
거스가 말했다.
“이런 일에서도 살아남으면 그 후엔 꽤 많은 돈을 얻을 수 있게 되지. 게다가 운이 좋아서 그 와중에 누가 몇 명 죽어 나가기라도 하면 내가 받을 수 있는 배당도 더 늘어날 테고 말이야. 물론 그래 봤자 내가 필요로 하는 돈에는 턱없이 모자랄 테지만…… 어쨌든 내게는 상황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더 이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와중에 내가 그 녀석들을 지켜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알아서 죽어 주면 도리어 감사할 따름이지.”
내가 말했다.
“그래도 그건 조금 너무하지 않나?”
하지만 거스는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나를 사지에 내몰려고 작정을 한 놈들이니 굳이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겠지. 결국 그놈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거야. 그렇다고 날 비난할 생각은 하지 마라. 따지고 보면 너도 비슷한 이유로 이 파티에 참여한 것 아닌가?”
나는 거스의 말에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그리고는 거스를 향해 등져 누우며 대답했다.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이미 목적은 다 이루었다.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건 그냥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야.”
“…….”
내가 말했다.
“아! 혹시 돈이 궁하면 이번에 나오는 내 몫도 다 네가 가져. 어차피 나한테는 필요도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