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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5화)
제9장 파이로니아 공국(2)


거스는 거기까지 설명을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보였다.
“당신이 목표로 삼은 게 블루 드래곤이라고 했던가? 그럼 아마 전격계 브레스를 내뿜겠군. 어쨌든 드래곤이 내뿜는 브레스는 정령왕이 이곳 레바돈에서 쓸 수 있는 힘과도 비등하다고 들었다. 물론 드래곤의 나이에 따라 다소 위력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전기의 정령왕이란 건 없으니까 블루 드래곤이 내뿜는 전격계 브레스는 아마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기의 힘이라고 보면 될 거다. 결국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소드 킹은 절대 드래곤의 상대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소드 킹이 아닌데?
물론 내가 소드 카이저란 사실을 굳이 거스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거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어쨌든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그 드래곤이라는 놈도 그리 만만한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거스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드래곤이란 놈은 적어도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보다 기본적으로 한 단계 더 위에 있는 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영역에 이미 한 발을 들여놓고 있는 놈이라고……. 따지고 보면 나나 드래곤이나 똑같이 하늘의 특혜를 받고 태어난 거 아닌가? 후훗! 그렇다면 한번 해 볼 만하지.’
어쨌든 누가 강한지는 한번 재 봐야 아는 법이다. 물론 재 봐서 짧으면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결국 거스의 적극적인 설득도 칸이나 시안나의 설득처럼 내 귀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갈 생각인 모양이군.”
대신 거스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응?”
하지만 그 말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같이 가겠다고? 나와? 거스가 말했다.
“만일 죽어도 드래곤을 찾아가겠다면 기왕이면 그 길에 나도 동참하고 싶다.”
하지만 그 말에 내가 눈살을 잔뜩 찌푸려 보이며 말했다.
“거스! 도대체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이 없다. 설마 나랑 같이 죽고 싶은 건가?”
내 말에 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내 목숨 따윈 이미 내놓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당신 같은 사람의 최후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겠지. 큭! 아니…… 어쩌면 인간 최초로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말이야. 그런 행운을 내가 굳이 마다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
내가 말했다.
“말은 그럴듯하군. 그런데 정말 그런 이유뿐인가?”
솔직히 몹쓸 병에 걸려 당장 내일 죽을 사람이라도 오늘 죽어 보라고 하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겠다니.
그건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거스도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할 수 없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거스 파이른이라는 이름은 내 본명이 아니다. 내 정확한 풀 네임은 거란테스 파이로니아, 파이로니아 공국 대공의 셋째 아들이 내 정확한 신분이지.”
“그런가? 어쨌든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한 신분이었군.”
물론 내가 그리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한 어투로 그렇게 대꾸하자 거스도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어쨌든 그도 자신의 말에 내가 조금은 놀라 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거스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문을 이어 나갔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어. 멋들어지게 공국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흔하디흔한 영지 수준에 불과한 나라니까. 국민도 다 합쳐 봐야 채 5만이 안 될 정도다.”
“음! 확실히 작은 나라긴 하군. 하지만 높은 신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는 거잖아?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하필 이런 곳에서 한심하게 트롤이나 잡으면서 나뒹굴고 있는 거지?”
내 말에 거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꽤 길다.”
“말해 봐. 어차피 시간도 많은 것 같은데 소일거리 삼아 내가 들어 주지.”
자신의 일생이 걸린 일을 내가 그냥 소일거리로 치부해 버리자 거스도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쿡 하고 웃어 버렸다.
“사실 내 나라는 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살기 나쁜 나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누구 하나 굶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걸 시기라도 한 모양이더군.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작정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진이 일어나서 우리나라 땅의 태반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거든.”
“…….”
거스가 말했다.
“어쨌든 평화롭던 나라는 그 일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국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여기저기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지. 게다가 마치 누가 의도적으로 퍼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이 파이로니아를 버렸다는 괴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어. 결국 아버지는 그 사실에 견디다 못해 공국의 영토를 담보로 세틴 제국에게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 쓰고 말았지. 하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었다. 처음에는 지원 형식이라고 했던 세틴 제국의 인간들이 나중에는 이자까지 쳐서 돈을 갚으라고 닦달하더군. 그게 싫으면 차관을 빌릴 때 약속했던 영토를 내놓으라던가? 물론 그 영토는 파이로니아 공국 전체를 말하는 거다. 결국 녀석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뭔가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 돈을 빌려 준 거였어.”
“아무래도 꽤나 지독한 놈들한테 걸려든 모양이군.”
원래 그런 건 고리대금업자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기도 하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난 잘 이해가 안 되는군. 세틴 제국 정도나 되는 나라가 굳이 그런 피곤한 방법을 쓸 이유가 있나? 그렇게 그 땅이 탐이 났다면 그냥 전쟁을 벌이면 그만일 텐데…….”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사실 세틴 제국은 이미 서 대륙의 크렌티아 제국과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현재 레바돈 대륙은 동 대륙과 서 대륙이 서로 패를 나눠 크게 대륙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호오? 세상이 평화로운 줄 알았더니 다른 곳에서는 이미 한판 크게 벌이고 있던 모양이지? 거스가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세틴 제국이라도 동 대륙의 다른 왕국 연합하고까지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세틴 제국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기로 계략을 꾸민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거스의 설명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세틴 제국은 이미 거대한 전쟁을 펼치고 있고 거기에 전 국력을 매진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시선을 돌려서 등 뒤에 있는 소국에 관심을 쏟는다? 그것도 대국답지 않게 그런 치사한 계략까지 써 가면서?
하지만 거스는 마치 내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이 긴 한숨과 함께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물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거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솔직히 우리나라는 대륙에서도 오지로 분류되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렇다 할 특산물이나, 흔히 말하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나지 않는다. 결국 세틴 같은 대국이 탐낼 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우리나라 영토에서 막대한 양의 미스릴이 잠들어 있는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우리가 우연히 입수하게 되고나서부터는 말이 달라지기 시작하더군. 일단 미스릴 광산을 변수로 넣고 나니까 세틴 제국의 이상한 행동도 점점 하나씩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기 시작한 거야.”
“미스릴?”
내 말에 거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미스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알려진 금속이지. 결국 세틴 제국 놈들은 우리보다 먼저 그 광산의 존재를 눈치 채고는 그걸 탐내기 시작한 거였어. 우리나라의 영토가 아니라 말이야. 하긴! 지금 한창 대륙전을 펼치고 있는 놈들이니만큼 미스릴 광산 하나에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겠지. 미스릴 광산 하나가 제국의 군사력을 엄청나게 강화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야. 어쨌든 우리나라도 거기에 집중해서 파고들었더니 아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드러나더군. 알고 보니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그 지진이 사실은 평범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세틴 제국 대마법사들의 혼이 담긴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말이야.”
“…….”
거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뭐!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나라는 국방력이나 외교력, 경제력…… 그 어느 것 하나 세틴 제국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결국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물론 그 사실을 공표해 보기도 했지만 세틴 놈들은 증거가 어디 있냐며 그저 발뺌만 할 뿐이었지. 결국 우리 파이로니아 공국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서둘러 미스릴 광산을 개발해서 세틴 제국으로부터 빌린 차관을 갚는 방법뿐이었어.”
“물론 놈들은 이런저런 빌미로 잔뜩 훼방을 놓고 있겠지?”
내 말에 거스도 긴 한숨으로 긍정을 표했다.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아버지와 함께 첫째 형님과 둘째 형님은 전력을 다해 이 일을 매달리셨다. 하지만 난 셋째 아들이라 태어나면서부터 나라 일은 배울 생각도 않고 오직 검만 손에 달고 살았지. 그런데 그 일이 터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솔직히 난 검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군. 그래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가출 아닌 가출을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푼돈이라도 끌어 모으고 있는 거다. 그래 봤자 도움은 쥐꼬리만큼도 안 되겠지만 말이야.”
거스의 말에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거스의 답답한 심정은 나도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국가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고작 트롤 몇 마리 잡아서 번 돈으로 도대체 뭔 도움이 되겠다는 건지…….
“그럼 굳이 목숨 걸고 나를 따라 드래곤을 찾아가겠다고 하는 이유는?”
“…….”
내 말에 거스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내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굳이 거스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 역시 대강 짐작은 갔다. 그래서 거스보다 먼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물론 나도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 사실 드래곤이란 놈들은 자기 집에 보물을 가득 쌓아 놓고 산다며? 혹시라도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면 넌 내 등 뒤에서 그 보물을 노리기라도 할 작정이었나?”
그러자 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떠듬떠듬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무……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다. 만일 미스릴 광산이 개발되면 배로 쳐서 갚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일이 성공하고 나면 아주 조금만…… 미스릴 광산을 개발할 수 있는 자금 정도만이라도 내게 빌려 달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거스는 그걸 거절의 뜻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순간 낯빛이 새파래지기는 했지만…… 내가 말했다.
“거스! 당신 정말 너무 앞서 가는군. 아직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있는 보장도 없고 그 보물이 내 손에 들어온다는 확신도 없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 생각인가?”
“끄응! 지금은 단 1%의 확률만 있으면 어디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그게 지옥 구덩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당신도 무턱대고 목숨을 버릴 멍청이는 아니겠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게 당당한 거고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같이 목숨을 걸어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 짧은 시간에 제법 머리를 많이 굴렸군.”
“……어쨌든 우리나라는 지금 별로 시간이 없다. 세틴 제국이 이미 수작을 부려 놓아서 다른 곳에서는 이미 돈을 융통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만일 당신만 도움을 준다면 이 은혜는 정말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그러면서 거스는 거의 직각에 가깝게 내게 허리를 굽히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얼른 고개 들어.”
하지만 거스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부탁한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제발 우리나라를 좀 도와다오.”
끄으응! 이거 아무래도 내가 귀찮은 일에 된통 걸려 버린 모양이다. 에라! 역시 귀찮은데 그냥 모른 척 여기서 튀어 버릴까? 하지만 나는 문뜩 좋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혹시 파이로니아에 묘인족 노예가 있나?”
“응?”
물론 뜬금없는 내 질문에 거스도 조금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묘인족 노예를 요구하는 거라고 잘못 알아들었는지 거스가 얼른 표정을 바꿔서는 말했다.
“무…… 물론 지금은 없다. 우리나라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걸 원한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해 오겠다.”
“끄응!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묘인족 노예를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노예로 잡혀 있는 묘인족을 다시 해방시키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이건 혹시나 싶어서 해 두는 말인데…… 만일 이후에 파이로니아 공국이 묘인족을 노예로 삼는다면, 아마 그때는 나라는 사람을 적으로 두게 될 거다.”
그 말에 거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물론 일개 개인이 한 나라를 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게 뭐가 있으랴마는…… 하지만 내가 소드 킹(사실은 소드 카이저지만……)이라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