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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6화)
제9장 파이로니아 공국(3)
감당할 수도 없는 놈이 여기저기서 깽판이라도 치고 다닌다면 아마 상당히 골치가 아프겠지. 물론 같은 소드 킹을 보유한 나라라면 그나마 대처라도 가능하겠지만 파이로니아처럼 작은 나라에 소드 킹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 알았다. 그 말 명심해 두지.”
거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지 떠듬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어쨌든 파이로니아가 묘인족을 노예로 삼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로군. 그러면 주로 묘인족을 노예로 삼고 있는 나라는 어디지?”
“그야 당연히 세틴 제국이지. 사실 묘인족은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작은 나라의 귀족이 가질 만한 게 못 되거든. 물론 국가에서 다른 이종족을 노예로 데리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태반은 세틴 제국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으음! 역시 그렇군.”
뭐! 그건 나도 어느 정도는 대강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원래 큰 나라가 이래저래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법이다.
게다가 그런 치사한 방법으로 작은 나라를 괴롭히는 나라라면 안 봐도 뻔하지. 어쨌든 대강 내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나는 다시 거스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좋아. 원한다면 내가 파이로니아 공국을 도와주지. 뭐! 될지 안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드래곤의 보물이라는 걸 내가 손에 넣게 되면 그때는 광산 개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차관이란 것 자체를 내가 직접 갚아 주도록 하겠어. 하지만 그 대가로 파이로니아 공국은 앞으로 내가 묘인족 노예를 전부 해방시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해 줬으면 한다. 어때! 내 제안이?”
내 말에 거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물론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야 더 바랄 것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원래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훗! 혹시 또 모르지. 알고 보니 내가 잡으러 가는 드래곤이 드물게 알거지 드래곤이었다, 이럴지도……. 크크!”
내가 농담 삼아 웃으며 말했지만 거스는 웃기는커녕 도리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묘인족의 해방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거지? 혹시 내가 그 이유를 좀 알아도 될까?”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거참…… 궁금한 것도 많다. 아까도 말했지? 쓸데없는 호기심이 가끔 사람 목숨을 잡아먹기도 한다고 말이야. 어쨌든 내가 묘인족에게 신세 진 일이 있어서 그냥 은혜 갚기 차원이라고 생각해 두면 될 거야.”
그러나 거스는 고작 은혜 갚기로 묘인족 노예 전체를 해방시켜 버리겠다는 내 말이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제10장 드래곤과 싸우다(1)
트롤 시체 두 구를 처분하는 대가로 거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게다가 새끼 트롤들을 신전에 맡기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게 사례비조로 몇 푼 더 건질 수도 있었다(사실 나는 도리어 돈을 주고 새끼 트롤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거스는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거스는 그 돈을 거리낌 없이 전부 다 공국으로 보내 버렸다.
“카이렌! 당신 덕에 이번 일은 꽤 소득이 좋았어. 아마 이걸로 광산도 어느 정도는 숨통이 트이게 될 거야.”
물론 그렇게 말하는 거스의 표정은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거스의 말로는 파이로니아 공국의 미스릴 광산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틴 제국에서 차관으로 들여 온 돈은 모두 국민을 먹일 식량을 구입하는 데 지출해 버렸고 이미 텅 비어 버린 국고로는 제대로 기술을 갖춘 인부를 고용할 돈도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하긴! 광산 개발 사업 같은 곳에 아무나 투입한다고 되는 건 아니겠지. 파이로니아 같은 작은 나라에 제대로 된 기술자가 있을 리 만무하고 말이야.’
어쨌든 실력이 있는 광산 개발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자국에 필요한 인력이 없다면 부득불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이라도 해 와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단순 노동 임무 같은 경우에는 철저하게 자국의 국민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미스릴 광산이 제대로 개발되어서 조금이라도 미스릴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일단 거기까지 가는 게 힘들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웃 나라와의 공동 개발이나 투자 협정 등을 맺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세틴의 방해 공작으로 이미 모두 다 물 건너간 상태였다.
한마디로 세틴의 힘이 무서워서 다들 쉬쉬할 뿐, 단 한 군데도 같이 손잡고 광산을 개발하자며 나서는 나라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스 말로는 세틴 제국과 약속한 날짜가 채 2년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파이로니아 공국 입장에서는 정말 똥줄이 타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거스는 어느 정도는 낙관적인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이 일이 아마 우리나라에게는 크게 전화위복이 될 거야. 이제까지는 이름도 없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이번에 미스릴 광산만 잘 개발되면 아마 동 대륙에서도 꽤 부유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을 테지.”
그 말에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나 역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청년을 보는 것이 크게 싫은 일은 아니었다.
마치 일제 강점기의 독립 열사라도 보는 기분이랄까? 어쨌든 대강 일이 마무리되고 이제 내가 거스와 함께 드래곤만 때려잡으면 만사 해결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일부러 거스를 떼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거스! 당신은 이 길로 바로 공국으로 돌아가 있어라.”
“응?”
물론 거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날 떼어 놓으려는 거지?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한 건가? 안 돼. 무조건 나도 따라가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마음이 변한 건 아니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귀찮다. 당신은 내 일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그러니까 이 길로 그냥 얌전히 공국으로 돌아가서 날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그곳으로 찾아가겠다.”
“…….”
사실 거스를 데리고 다니는 건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 블루 드래곤 카르서스와 싸울 때 아마 나도 본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스에게 내가 묘인족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껄끄럽고 그 와중에 거스까지 싸움에 휘말리지는 않을까 신경을 쓰는 것도 솔직히 귀찮았다.
‘뭐! 거스가 죽는 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세틴 제국에 잡혀 있는 묘인족을 구출해 내려면 아무래도 파이로니아 공국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더 편할 것 같단 말이야.’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거스를 떼어 놓고 다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칸타네 산맥으로 뛰어들었다.
어찌 됐든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면서 결국 일정을 너무 지체하고 말았다. 물론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은 어떻게든 서둘러 처리해 놓고 그 뒤에 푹 쉬는 게 바로 평소 내 성미였던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예 길게 뒤로 미뤄 버리거나 말이다(뭐! 그 경우에는 태반은 잊어버리지만……).
하지만 애석하게도 카르서스의 레어를 찾아가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이놈도 꽤나 구석진 곳에 사는군. 혹시 이놈도 골방지기가 취미인가?”
사실 칸타네 산맥은 대륙에서 오지 중에서도 가장 깊은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 칸타네 산맥을 넘어서 동쪽으로 내려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인간이 전혀 살지 않는 죽음의 사막이 이어진다.
물론 산맥은 북쪽의 빙하지대까지 뻗어 있어서 산줄기를 타고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봐야 보이는 건 얼음 땅뿐이었고 남쪽 역시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한마디로 칸타네 산맥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칸타네 산맥의 서쪽, 동 대륙뿐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카르서스란 놈은 그 칸타네 산맥에서도 극동의 오지에 레어를 틀고 있었다.
“뭐! 이딴 곳에 둥지를 튼 걸 보니 아무래도 이 녀석도 꼭 한성질 할 것 같긴 한데 말이야.”
하긴! 나도 서로 합의(?)를 볼 생각은 없으니 어차피 대결을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사실 나도 우리 묘인족을 노예로 삼는 놈과 구차하게 입 섞어서 긴말 나누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칸타네 산맥 구석탱이에 있는 그놈의 레어를 찾는답시고 구시렁구시렁거리며 산속을 헤매던 나는 내 발로도 장장 보름이나 걸려서야 겨우 놈의 레어에 당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제길! 카르서스인지 칼빵인지 이 새끼…… 감히 이런 골짜기에 레어를 틀어서 날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어쨌든 나는 그간의 고생 때문에 엄한 카르서스에게 화풀이를 하며 씩씩거리며 레어를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마치 사자후를 내뱉듯이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 댔다.
“야! 비만 도마뱀, 얼른 튀어나와. 그 재수 없는 면상 좀 보자.”
하지만 내 말에 어이가 없었던지 오라는 드래곤은 안 나오고 도리어 반쯤 눈이 돌아간 대여섯 명의 묘인족이 튀어나왔다.
“호오라? 이거 손님 대접이 영 엉망인걸!”
다가오는 묘인족을 보고 나도 심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묘인족들은 아무래도 마법으로 심지가 제압당한 듯, 마치 누군가에게 조정되는 로보트처럼 딱딱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쿠에에에엑.
하지만 정작 내게 달려들 때는 다른 묘인족과 다를 바가 없는 민첩한 몸놀림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여섯이나 되는 묘인족이 마치 밤새 훈련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포지션을 맞춰서 내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쳇!”
물론 그건 자존심 강한 묘인족에게 있어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사방으로 달려드는 묘인족들을 피해 동굴 천장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크르르륵.
그렇게 내가 단번에 동굴 천장까지 뛰어올라 한 손으로 천장 곳곳에 마치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종유석에 매달리자 묘인족들도 설마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어리둥절하게 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묘인족들은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이성이 남아 있지는 않은 듯싶었다. 다시 말해 곧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풀쩍풀쩍 뛰어올라 나를 잡으려고 했다. 물론 그런 서글픈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 발치도 부여잡지 못했다.
사실 평범한 묘인족이 내 점프력을 따라잡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 도리어 분노를 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놈. 도대체 우리 묘인족을 뭐로 보는 거냐?”
어쨌든 이놈들부터 먼저 처리해야 했기에 나는 변신을 풀고 묘인족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양손에 손톱을 뽑아 들고 그대로 묘인족들을 향해 뛰어내렸다.
쿠당탕!
콰당!
퍼퍼퍽!
사실 내가 묘인족들을 처리하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솔직히 정상적인 묘인족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내 상대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손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묘인족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죽은 놈은 없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묘인족을 상대하게 만들다니.
“크르르륵……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 너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결국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까지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마 지금 내 붉은 눈동자는 다른 때보다 한층 더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꼬마로군. 처음에는 그냥 정신 나간 인간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묘인족으로 변하더니, 이젠 여섯이나 되는 내 부하를 단 일격에 쓰러트리는가?”
그제야 카르서스도 그 재수 없는 덩치를 이끌고 쿵쾅쿵쾅 거리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확실히 처음 대면하는 카르서스는 기가 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드래곤이라고 하기에 끽해야 티라노사우루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건 거의 사이스모사우르스(크기가 39∼52m 정도 되는 용각류 공룡)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덩치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겁을 집어 먹은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나는 손톱을 다시 집어넣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고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백 번 사죄하면 그나마 용서를 해 주마. 그게 아니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하지만 카르서스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냥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흥! 정말 어이가 없는 놈이로군. 묘인족 주제에 검을 뽑아 들지 않나…… 대뜸 찾아와서는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지 않나. 응? 게다가 홍안인가? 확실히 나도 처음 보는 놈이로군.”
카르서스가 말했다.
“그러는 네 녀석이야말로 내게 살려 달라고 빌지 그러려무나. 그럼 내가 널 밤새 귀여워해 주마. 크르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