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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7화)
제10장 드래곤과 싸우다(2)
뭐? 날 밤새 어째? 그 말에 결국 내 신경 줄이 뚝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뭔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불쾌함은 결국 극에 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구질구질한 변태 자식이…….”
결국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검으로 오러 소드를 내뿜으며 카르서스에게 달려들었다.
“허어? 소드 킹인가? 묘인족 주제에 꽤나 독특한 놈이로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게 어림도 없다.”
그리고는 곧 주변의 마나를 끌어 모아 내게 마법을 사용했다.
“나의 의지로 적을 혼란에 빠트릴지어다. 파워 워드 스턴(Power Word Stun:적을 기절시키거나 또는 혼란에 빠트리는 절대 언령 주문).”
“응?”
어쨌든 카르서스가 마법을 쓰자 잠시 묵직한 마나가 마치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거기에 온몸으로 마나를 내뿜으며 저항을 했고, 다행히 그 저항이 주효했던지 나를 짓누르고 있던 마나는 곧 유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 주위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
물론 카르서스는 그 일이 어지간히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마…… 말도…… 9클래스의 파워 워드를 주문 하나 없이 파훼하다니……. 설마 네놈은 온몸에 9클래스 수준의 대마법 방어진이라도 새기고 온 거냐?”
물론 대마법 방어진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굳이 거기에 대답해 줄 이유는 없었다.
대신 나는 내 검에 있는 힘껏 마나를 불어넣어서 오러 소드를 완성하고는 그대로 카르서스의 앞발을 베고 지나갔다.
“크와아아아앙.”
원래라면 놈에게 내 검으로 입힐 수 있는 상처래 봤자 고작해야 생채기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을 것이다.
내 검도 카르서스의 덩치와 비교하면 고작 이쑤시개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검에 맺힌 완성형의 오러 소드는 놈의 두터운 발목을 절반이나 베고 지나가 버렸다.
“리커버리(Recovery:절대 회복 주문).”
그러나 카르서스는 언제 비명을 질렀냐는 듯이 마법으로 금세 상처를 회복해 버렸다.
“호오라? 그런 재주도 있으셨어?”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이놈을 단번에 죽이지 않고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게다가 덩치가 덩치인만큼 내가 베고 지나갈 곳도 정말 넘치고 넘쳤다.
“젠장! 네 녀석 설마 소드 엠페러였나? 그 족속은 황금시대에 이미 멸족해 버린 줄 알았는데……. 그럼 내 마법을 파훼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군.”
하지만 굳이 내 정체를 알아냈다고 해서 카르서스가 달리 날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방도가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원래 사자 입장에서는 같은 사자보다 들러붙는 날파리가 훨씬 더 귀찮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날파리가 사실은 자기만큼이나 힘이 장사라고 하면 그건 정말 악몽일 게다.
“크아아아앙.”
결국 내가 카르서스의 큰 덩치를 타고 오르면서 이리저리 상처를 내기 시작하자 카르서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카르서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큰 덩치가 도리어 대결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큰 덩치를 감당할 동굴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 이 레어도 카르서스의 덩치에 비하면 정말 비좁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놈이 마법이라도 쓸라 치면 바로 공격을 가해 정신을 흩뜨려 놓았으므로 카르서스는 지금 제대로 마법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파파파파파팟.
참다못한 카르서스가 자기가 피해를 입을 것도 감수를 하면서 이마의 뿔로 내게 전격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 먼저 몸을 날려 카르서스에게서 떨어져 버렸다.
“크아아아앙.”
결국 카르서스가 내뿜은 브레스는 빠지직 스파크를 그리며 카르서스의 온몸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스파크가 잦아들자 나는 다시 카르서스에게 달려들었다.
“제…… 젠장! 여기가 레어 밖이었으면 고작 네놈 따위에게…….”
드래곤 주제에 내게 너무 형편없이 당하다 보니 카르서스도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듯이 그렇게 한탄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레어 밖이라면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역사는 결코 가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곳은 동굴 안이고 카르서스가 내게 지금 초주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 잠깐…….”
어쨌든 내 검에 피투성이가 된 놈의 정수리에 반 뼘쯤 내 검을 박아 넣고 있을 때 카르서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 젠장! 알았다. 네가 나보다 강한 걸 인정하겠다. 제길! 황금시대의 소드 엠페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내가 죽는 이유라도 알고 죽자.”
내가 말했다.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묘인족을 노예로 삼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넌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까 그냥 이 참에 얌전히 죽어.”
그리고는 다시 내가 검을 더 깊숙이 쑤셔 박아 놈의 골통을 깨부수려 하는데 카르서스가 또 한 번 다급하게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다.
“그…… 그런 이유라면 날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내…… 내가 묘인족들에게 건 마법은 오직 나만이 풀 수 있다. 너는 내가 데리고 있는 묘인족이 모두 폐인으로 남기를 바라는가?”
그 말에 내가 흠칫 다시 검을 멈췄다. 하지만 카르서스가 그 말로 내게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비웃음뿐이었다.
“호오! 그려서? 그럼 결정해라. 묘인족에게 걸어 둔 마법을 풀고 편히 죽을래? 아니면 차마 죽지도 못할 정도로 내게 괴롭힘을 당하며 구차하게 뒤질래!”
“…….”
하지만 카르서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다 쉽게 선택을 할 수 없었을 테지.
‘그렇다면 결국 후자겠군.’
나는 다시 검을 뽑아 들고는 오러 소드를 길게 늘어뜨려서는 마치 채찍처럼 만들어 그대로 카르서스의 한쪽 날개를 잘라 버렸다.
“크와아아아앙.”
물론 그 일로 카르서스가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결국 내가 남은 한쪽 날개도 마저 잘라내고 바닥에 널브러진 놈의 커다란 안구에 검을 쑤셔 박으려고 할 때 카르서스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날 살려 줄 거냐.”
“그냥 얌전히 뒤지지? 덩치도 큰 놈이 왜 그렇게 구차하게 살려는 건데?”
“제…… 젠장! 묘인족에게 걸어 둔 마법을 지금 당장 풀겠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묘인족에게 손대지 않으마.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하지만 나는 약속이란 걸 별로 신뢰하는 놈이 아니거든? 내가 카르서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 눈에 검을 쑤셔 박으려고 할 때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끄으으응…… 여기가 도대체…….”
“…….”
언제 마법을 풀렸는지 묘인족들이 하나 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봐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물론 내가 상대한 여섯 놈 말고도 동굴 깊숙한 곳에서 나머지 열댓 명이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카르서스의 대치 상황을 보고는 하나같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너는 묘인족인가?”
내가 대답했다.
“칸의 아들 카이렌이다. 그리고 현재 묘인족의 족장이기도 하다. 너희를 구출하러 왔으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일단 이놈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
하지만 카르서스가 버럭 괴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젠장!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아님 이대로 한 번 더 묘인족에게 마법을 걸어 줄까?”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그냥 비릿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시든지…… 그럼 네놈을 죽여 놓고 다른 드래곤들까지 죄다 황천길로 보내 버리겠다. 그리고 네 이름을 드래곤 일족을 멸족케 만든 멍청한 드래곤으로 길이길이 기록해 주지.”
“나는 드래곤의 이름까지 걸고 약속했다. 도대체 그 이상 뭘 어쩌라는 거냐.”
“미안하지만 난 약속은 별로 안 믿는 주의라서 말이야.”
그리고는 다시 반쯤 감겨 있는 놈의 눈꺼풀을 찢어발기려는데 그보다 먼저 카르서스에게 잡혀 있던 묘인족 하나가 나서서 얼른 소리쳤다.
“어……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이지 마라. 드래곤의 약속은 절대 어길 수 없는 거다. 그는 분명 약속을 지킬 거다.”
그 말에 내가 잠시 그 묘인족을 돌아보니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묘인족이 흠칫하며 내게 말문을 열었다.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라고 한다. 따라서 약속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종족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우리를 가둬 두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게 대하지만은 않았다. 가끔 마법을 풀어서 우리를 제정신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물론 몇몇은 그의 밤 시중을 좀 들어주기도 해야 했지만…….”
하지만 밤 시중이란 말에 내가 도리어 으르렁거리며 카르서스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내 살심이 쉽게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묘인족도 얼른 말을 바꿔서 말했다.
“물론 지금 네가 그 드래곤을 죽이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드래곤이 또 이런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카르서스를 설득해서 다른 드래곤에게 협조를 구하는 게 우리 묘인족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일 게다.”
그 말에 카르서스도 얼른 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무…… 물론 나를 살려만 준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다른 드래곤을 설득하겠다. 더 이상 묘인족을 노예로 삼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묘인족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드래곤들 전체가 말이야. 그 약속은 묘인족이 우리를 적대시 하지 않는 이상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 진심이냐?”
카르서스는 내 검 때문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하고 그 큰 눈동자만 끔뻑거리며 그것을 대신했다.
“물론이다.”
뭐! 이 덩치 큰 놈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쨌든 나도 살심을 접고 검을 뒤로 물리자 카르서스도 그제야 안심을 했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끄응! 빌어먹을…… 날개를 제대로 붙이려면 앞으로 꽤나 고생을 해야겠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카르서스는 마법으로 날개를 띄워서는 자기 등짝에 붙이고 잘도 상처를 치유해 버렸다.
“허어! 이거 왠지 억울해지는데? 기껏 반죽음을 만들어 놓았더니 바로 회복해 버리는군. 드래곤이란 놈들도 꽤나 사기성이 농후한 종족이로구만.”
“젠장! 그 드래곤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놈은 레바돈 역사를 통틀어도 아마 네놈이 유일할 거다. 어쨌든 목숨을 살려 줘서 고맙다.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하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드래곤이라는 놈 자체를 이 땅에서 멸족시켜 버릴 거니까…….”
하지만 카르서스는 그나마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내 말에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녀석! 자존심 하고는…… 하지만 우리 드래곤을 너무 얕보지는 마라. 아무리 너라도 이 땅에 있는 드래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아니! 이곳이 이런 비좁은 동굴만 아니었더라도 나 역시 너에게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호오라? 그러셔? 그럼 밖으로 나가서 한판 더 붙어 볼까?”
내가 다시 검을 스르릉 반쯤 뽑아 들자 카르서스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끄으응! 관두지. 어쨌든 나는 블루 일족의 카르서스라고 한다. 너는?”
그리고는 은근히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흥! 제멋대로 지 소개를 하고서는 나도 지금 그걸 따라 하라는 거냐?”
하지만 카르서스는 태연하게 내 말을 맞받아쳤다.
“네 이름이 카이렌이고 칸의 아들이며 묘인족 일족의 족장이라는 사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 거기서 뭐가 더 궁금하다는 건데?”
“뭐! 여러 가지…… 끄응! 그러고 보니 나도 뭐가 궁금한지 잘 모르겠군. 그럼 넌 이대로 묘인족 마을로 돌아갈 작정이냐?”
“그야 당연…….”
하지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거스 생각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끄응! 그리고 보니 그 일을 완전히 잊어 먹고 있었군. 역시 그때 이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나?’
어쨌든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나서 다시 보물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도 정말 구차한 짓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도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자 의외로 카르서스가 선선하게 내게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나랑 잠시 느긋하게 대화나 나누는 건 또 어떻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