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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19화)
제11장 블루 드래곤 카르서스(2)
“우씨.”
어쨌든 예상치 못한 내 주먹질에 카르서스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눈치였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대강 자기 의자에 떠밀어 앉히고는 다시 퉁명스레 말문을 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묘인족 여자는 내 취향 아니다.”
그리고는 나도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 와중에 이미 식어 버린 차를 다시 들어 홀짝거렸다. 하지만 카르서스는 욱신거리는 정수리를 감싸 쥐고는 한껏 원망스런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고맙다. 너에게 신세만 지고 가는군.”
결국 그렇게 나는 카르서스에게 적당한 보물을 갈취한 후 다시 길을 나서려고 했다.
물론 카르서스는 여전히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뭐! 그래 봤자 지가 뭘 어쩌겠는가! 불만이면 한번 덤벼 보시든지……. 쿡쿡!
어쨌든 카르서스에게 건네받은 보물의 양도 상당했지만 그녀가 준 마법의 백팩 때문에 엄청난 보물의 양도 내게 그리 큰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솔직히 보물을 얻은 것보다 이 마법 백팩을 얻은 게 훨씬 더 기쁘단 말이야.’
그러면서 나는 내 허리에 찬 백팩을 잠시 손으로 툭툭 하고 두들겨 보았다.
그냥 허리에 차는 평범한 백팩 같은데 이 백팩은 신기하게도 물건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정말 끝이 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일단 가방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유통업의 신기원을 이룩할 물건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내가 카르서스에게서 파이로니아의 차관을 몽땅 갚고도 배 이상은 남을 듯한 막대한 양의 보물을 뜯어낸 후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카르서스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다는 듯이 떠나려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카이렌…… 잠깐만!”
“응?”
그리고는 허둥지둥 다시 자기 레어 안으로 뛰어 들어가 뭔가를 들고는 다시 헐레벌떡 레어 밖으로 나왔다.
“끄응! 생각해 보니까 이걸 준다는 걸 깜박했어. 자! 받아.”
“응? 이건 뭐냐?”
내가 카르서스가 내민 걸 얼떨결에 받고 보니 그건 화려하지는 않지만 꽤나 잘 제련된 명검이었다. 카르서스가 말했다.
“너 정도 되는 녀석이 그런 낡은 검을 가지고 있으면 제대로 폼이 안 나잖아?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괜찮은 걸로 하나 골라 봤어. 물론 어느 정도 네 취향에 맞을 것 같은 걸로 말이야.”
쿡! 카르서스도 의외로 눈치가 빠른데? 어느새 내 취향까지 파악해 둔 거냐? 크큭!
아무튼 그녀는 내가 요란한 장식을 싫어한다는 걸 깨닫고는 수수하면서도 내실이 있는 물건을 애써 골라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호의에 도리어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가 웬일이냐? 나한테 이런 성의를 다 보이고?”
하지만 내 말에 카르서스는 도리어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버렸다.
“흥! 나랑 사귀기만 하면 그것보다 더한 것도 줄 수 있었어. 내 이빨을 몇 개나 뽑아서 만든 드래곤 본 재질의 검이나 갑옷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뭐가 잘났다고 너한테 그런 보물을 주겠냐? 그래서 대강 아무거나 집어 온 거야.”
“큭! 그러냐? 어쨌든 고맙다. 잘 쓰마.”
그러면서 나는 내가 쓰던 검을 풀고는 다시 카르서스가 건넨 검을 내 허리에 찼다. 그리고 내가 낡은 검을 대강 어딘가 던져 버리려고 하자 카르서스가 얼른 두 손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아 참! 그건 나 줘.”
“응? 이 낡은 걸로 뭘 하려고?”
물론 어차피 버릴 거라 굳이 그녀에게 건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도리어 눈을 밝히고 달려드니 조금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정색을 하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냥…… 널 만난 기념품 정도로 생각할 거야.”
“흐으음.”
내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카르서스가 이내 뚱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설마 나한테 그만큼 갈취를 해 가면서 고작 낡은 검 하나가 아깝다는 건 아니겠지?”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작 낡은 검 하나로 어쩌랴 싶어 나는 그냥 카르서스에게 내 검을 내밀며 말했다.
“혹시라도 엉뚱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변태 짓도 정도껏 해라.”
하지만 내 말에 카르서스는 울컥해서는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내…… 내가 이 검으로 뭘 어쩌기라도 한다는 거야? 날 그런 몰상식한 드래곤으로 보지 말라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아무래도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로군. 큭큭큭! 난 또 그걸 엉뚱한(?) 데라도 쓰려는 줄 알았지!
하지만 내 오해에도 불구하고 카르서스는 내 검을 낚아채는 것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이 일이 훗날 내 발목을 잡는 사태로까지 발전해 버릴 줄은…….
“그럼 잘 있어라. 그리고 약속은 꼭 지켜.”
어쨌든 내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없으므로 나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카르서스의 레어를 떠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 다시 카르서스를 만날 일은 없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물론 그것은 나만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제12장 환락의 도시(1)
어쨌든 카르서스의 일도 대강 그렇게 마무리되고 나자 아무래도 나 역시 앞으로의 행적에 대해 슬슬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일단은 묘인족 마을로 돌아가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하지만 마을로 돌아가게 되면 이래저래 상당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고(사실 세이란을 포함한 마을 여자들을 상대하는 게 제일 귀찮았다) 또 카르서스의 레어에서 구해 낸 묘인족들이 나 대신 칸에게 상황 설명도 잘해 줄 것이다.
때문에 나는 굳이 마을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뭐! 정 급하면 묘인족의 삼신기 중 하나인 푸른 구슬을 이용해 연락을 취하면 그만일 테고 말이다.
“흐음! 그럼 역시 이 길로 바로 거스를 찾아가 봐야 하나?”
하지만 나는 그것 역시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원래 강한 힘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말썽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아마 거스도 내 금전적인 도움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터. 결국 나 역시 파이로니아에서 이래저래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게 될 게 너무나 분명했다.
어쨌든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나는 선뜻 발걸음을 파이로니아로 돌릴 마음도 들지가 않았다.
물론 이미 거스와 약속을 해 둔 게 있어서 언젠가 파이로니아를 한번 찾기는 해야겠지만 어쨌든 거스 말로는 차관을 갚기까지 아직 2년이나 시간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급할 것 없이 그 시간 동안 잠시 이리저리 여행이나 다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기왕 마을 밖으로 나온 김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세계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지,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군.”
어쨌든 이곳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보통은 한국을 벗어나 고작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신선한 경험이 된다. 하물며 전혀 다른 차원이면 얼마나 구경할 게 많겠는가!
하지만 이제껏 내가 둘러본 곳은 고작해야 묘인족 마을과 칸타네 산맥 부근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느긋하게 세상 구경을 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결국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근처 인간 마을을 찾아가 마침 파이로니아 공국을 지나쳐 가는 상인들 편으로 거스에게 대강 사정이 적힌 간단한 편지를 붙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서쪽으로 돌렸다.
“자!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나?”
나는 칸에게서 얻은 지도 대신 인간 마을에서 구해 온 안내 책자를 펼쳐 들고는 일단 레바돈에서 유명한 관광 명소(?)부터 먼저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물론 머나먼 남 대륙이나 현재 전쟁으로 가로막혀 있는 서 대륙으로 발길을 돌리기는 다소 힘이 들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가 있는 동 대륙만 해도 볼 것은 정말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일종의 지도책이라고 볼 수 있는 ‘레바돈의 관광 명소’란 제목의 안내 책자에는 주로 동 대륙의 남단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켄트 산맥 인근에 볼거리가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다.
“흐으음!”
지도에는 동 대륙의 3대 산맥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동 대륙과 서 대륙을 나누는 거대한 템페르 산맥이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칸타네 산맥 역시 레바돈 대륙의 극동을 종으로 가로지르며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가 3대 산맥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경치 하나는 수려하기로 유명한 켄트 산맥이었다.
특히 대륙에서도 가장 높기로 소문난 그랜드 마운틴(Grand Mountain) 역시 켄트 산맥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신비의 호수로 유명한 요정의 호수(The Lake of the Fairy), 엘프의 고향으로 알려진 올드 포레스트(Old Forest)까지 대륙의 명물이란 명물은 죄다 켄트 산맥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중 태반이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구경거리로는 그만한 것도 없을 터였다.
“오케이! 목표 설정.”
결국 나는 먼저 켄트 산맥을 한번 죽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조금 아쉬운 건 켄트 산맥의 태반이 세틴 제국의 영토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세틴 제국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 못했던 나는 적어도 내가 한가하게 세상을 둘러보는 여행 동안만이라도 부디 불쾌한 경험으로 내 기분이 팍 상해 버리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발길을 켄트 산맥 쪽으로 돌렸다.
일단 행선지를 정한 나는 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이 지도에서 내가 현재 있는 곳과 켄트 산맥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관광 도시 에렌토스까지 일직선으로 죽 긋고는 그 길대로 거침없이 숲과 산, 그리고 들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내가 숲을 달리는 게 훨씬 더 빠르다.
결국 내 경우에는 굳이 ‘길’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산과 숲을 뚫고 그냥 정면 돌파를 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자동차나 기차 같은 게 있었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근 한 달을 넘게 달려서 무사히 에렌토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그럼 한번 돌아다녀 볼까나?”
그 후의 내 일상은 에렌토스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흔히 켄트 산맥의 3대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요정의 호수는 사시사철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고 말 그대로 요정이라도 나올 법한 그런 호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올 법한’이다. 그리고 올드 포레스트 역시 지금은 더 이상 엘프가 살지 않는, 그냥 오래된 숲에 불과했다.
그나마 옛 엘프들이 남긴 흔적들이 볼거리가 되었지만 어쨌든 올드 포레스트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역사적 가치 이외에는 그다지 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유적지에 불과했다.
“쳇! 기대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데?”
나는 요정의 호수라기에 요정이라도 뛰어놀고, 올드 포레스트라기에 나무라도 걸어 다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그 반대급부로 너무 큰 실망을 안게 되었고 이 세상도 지구와 별반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나마 흥미를 잃고 말았다.
켄트 산맥 3대 관광 명소라고 하더니…… 알고 보니 진짜로 ‘관광지였다.’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나마 그랜드 마운틴은 그럭저럭 볼만했다. 어쨌든 이름 그대로 크기라도 하니까.
***
처음의 기대는 빗나갔지만 그래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켄트 산맥의 초입인 에렌토스를 떠나 천천히 산맥을 서진(西進)하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기를 벌써 수개월.
관광이란 명목 하에 나는 참 지긋지긋한 시간 동안 무수히도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마치 역마살이 낀 모험가들처럼 말이다.
흔히 말하는 관광지도 대강 둘러봤고 이름 모를 어느 시골 술집에서 역시 이름 모를 한량들과 함께 진탕 술을 마셔 보기도 했다.
“흐흐! 확실히 케락이란 술은 맛있었지. 켄트 지방 전통주랬던가?”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찾게 되는 곳은 역시나 사람이 잔뜩 모여 있는 도시였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네 어쩌네 하는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건 사람이고 그 세계를 제대로 알려면 역시 그곳에 사는 사람부터 만나 봐야 하는 법이다.
“흐으음! 그런데 세틴이란 나라도 대국답네. 정말 별게 다 있군.”
확실히 안내 책자에는 내가 찾은 ‘카랴안’이라는 이름의 도시 밑에 ‘도박과 환락의 도시’라는 간략한 설명이 또렷하게 붙어 있었다.
마치 지구의 마카오나 라스베가스처럼 말이다.
물론 도박이라고는 고작해야 고스톱이나 포커 정도밖에 모르는 나였기에 굳이 새로이 도박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정보는 투전판에 몰리기 마련이다.
어쨌든 여행을 핑계 삼아 시간이나 죽이는 것도 슬슬 질려 가고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하는 찰나에 내 앞에 딱 나타나 준 카랴안은 의외로 그냥 지나치기 힘든 곳임은 분명했다.
도박과 노예.
확실히 묘하게 어울리는 단어 아니던가? 후훗! 어쩌면 이곳이라면 노예로 잡혀간 묘인족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소식만 듣는다 해도 내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