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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21화)
제12장 환락의 도시(3)


훗! 설마 이 자그마한 주머니에 그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사실 이 주머니에는 금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비싼 백금화와 금화 100개에 해당하는 제국 수표가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틴에서는 발행 수표조차 코인(Coin)으로 만드는 게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 자네 의외로 엄청난 부자였군.”
그 말에 내가 도리어 피식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소? 이번에 크게 한탕 벌었다고.”
그제야 크레이안도 흥분을 가라앉힌 듯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말했다.
“……으음! 자네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력이 좋은 무사인 모양이군. 어쨌든 그 정도 돈이면 굳이 코퍼 클래스에서 놀 것도 없이 바로 실버 클래스로 건너뛰어도 될 걸세. 하지만 그곳은 여기나 코퍼 클래스하고는 달라서 그 정도 되는 돈도 단 며칠 만에 모두 탕진해 버릴 수도 있네. 그래도 괜찮겠는가?”
물론 괜찮지. 뭐! 기왕이면 골드 클래스란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지만 그건 너무 욕심인 것 같고…….
“나는 사실 돈에는 별로 관심 없소. 이 돈도 여기서 다 쓸 요량으로 가지고 온 거지.”
어쨌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렇게 대답하자 크레이안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게.”
어쨌든 이제야 일이 좀 풀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부랴부랴 자리를 떠나서 이곳 도박장의 운영자 중 한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크레이안의 모습을 보고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레이안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실버 클래스의 도박장은 확실히 언뜻 봐도 고급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일반 등급의 도박장이 한량이나 소시민들로 북적북적거리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귀족이나 고급 상인, 또는 부자들만이 한껏 폼은 다 잡으며 여유롭게 도박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 남자로 채워져 있던 일반 등급 도박장과는 달리 이곳은 반 수 가까이가 여자로 채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돈 많고 시간 많은 유한마담들이 이곳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하릴없는 골통들이겠지만…….
“어머? 이번에 그 얘기 들었어요? 이번에 라첸 백작 부인이 꽤 괜찮은 엘프 노예를 하나 구했다던데.”
“그래요? 백작 부인은 저번에 호비트 소년도 하나 구입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이곳에는 내가 원하던 정보도 차고 넘칠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고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만 이런 도박장으로 모여 들기 마련이다. 그렇단 소리는 여기 있는 골 빈 인간들 태반이 노예를 데리고 있다는 소리가 되겠지.
물론 그중에는 묘인족을 노예로 데리고 있는 인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괜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여기서 엎어 버려?’
하지만 일단 애초 목적대로 정보는 듣고 봐야 했기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오오! 카르시에 남작님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다 뵙게 되는군요.”
“하하! 크레이안, 오랜만이네.”
물론 그 와중에도 크레이안은 괜찮은 판을 골라 나를 끼워 넣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크레이안도 이미 이곳에서 어느 정도 인맥을 다져 놓은 듯 그리 오래지 않아 적당한 판을 찾을 수가 있었다. 크레이안이 한쪽 구석에서 상대도 없이 소일거리를 하던 놈팡이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 인간은 이곳 카랴안 플레이스 실버 클래스 도박장의 딜러일 게 뻔했다. 그게 아니면 도박장에서도 인정하는 준 딜러 급의 회원이거나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쨌든 그 카르시에 남작이라는 인간도 상대가 나타나 적잖이 반기는 눈치였지만 낯선 얼굴인 내가 다가가자 조금은 꺼리는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다보았다. 하지만 크레이안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능숙하게 말문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하!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검사인데 이번에 운 좋게 큰돈을 벌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이곳에 한번 데리고 와 봤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실버 클래스에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로군. 그런데 웬만한 돈으로는 이곳 판에 끼어들기는 힘들 텐데…….”
하지만 카르시에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크레이안도 얼른 카르시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카르시에님! 잠시 귀 좀.”
그리고는 크레이안은 이내 카르시에 남작 옆에 바짝 붙어서는 뭔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작은 소리로 쑥덕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이미 그때 귀에 마나를 잔뜩 집중시켜 놓고 있었기 때문에 크레이안이 쑥덕거리는 소리도 똑똑히 엿들을 수 있었다.
크레이안이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니 도박 실력은 정말 형편없는 친구인데 가진 돈은 많습니다. 대략 일만 골드 정도 자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일만 골드? 허! 젊은 친구가 꽤나 갑부로군.”
일만 골드란 말에 카르시에도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실력은 정말 형편없습니다. 아마 카르시에 남작님 정도면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런가? 그럼 이거 완전 봉이로군. 후후! 어쨌든 고맙네. 이런 괜찮은 친구를 소개시켜 줘서 말이야. 오늘 보답은 내 다음에 톡톡히 해 줌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물론 나야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엿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그냥 모른 척 싱긋하고 웃어 주었다.
딸그락.
카르시에 역시 긴말할 필요 없다는 듯 마치 주사위처럼 생긴 패를 컵 속에 집어넣고는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 자네 이름은?”
“미첼이라고 하오. 그런데 육각으로 할 거요?”
내 말에 카르시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육각이란 주사위처럼 생긴 육면체에 각기 그림을 새겨 놓은 간단한 도박 기구를 말한다. 이걸로는 주로 주사위처럼 생긴 육면체에 새겨진 그림을 맞추는 아주 단순한 방식의 도박을 즐길 수 있었다. 카르시에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 둘이서 하는 거면 이게 가장 간단하겠지. 아니면 이것 말고 카드를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내게는 카드같이 속임수가 난무하는 내기보다는 이런 단순한 도박이 훨씬 더 어울렸던 것이다.
“그런데 판돈은?”
그 말에 카르시에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냥 가볍게 50골드부터 시작하지. 일단 나는 드래곤에 걸겠네.”
육면체 세 곳에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크기의 드래곤이 새겨져 있고 흔히 말하는 높은 수였다. 반면에 나머지 세 곳에는 역시 각기 다른 크기의 몬스터 세 종이 그려져 있는데 이건 낮은 수에 해당한다.
일단 카르시에가 먼저 드래곤(높은 수)에 걸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낮은 수에 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오크에 걸겠소. 대신 판돈은 500골드로.”
내 말에 카르시에는 잠시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판돈을 500골드나 거는 것도 그렇지만 몬스터(낮은 수)나 드래곤(높은 수)이 아니고 하나의 수, 즉 몬스터 중에 오크를(주사위로 따지면 이 경우에는 대강 2에 해당한다) 콕 집어서 내기를 걸자 그 역시 깜짝 놀라고 만 것이다.
“정말 괜찮겠는가?”
물론 이 경우 여섯 가지 수 중에 내가 지정한 수가 나오면 내가 건 판돈의 두 배를 딸 수 있었다. 반대로 나머지 다섯 가지 수 중에 하나가 나올 경우 나는 고스란히 판돈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이 콜을 한다면…….”
“나야 당연히 콜이네만…….”
물론 이 경우에는 당연히 상대의 승낙이 필요했고 내 예상대로 카르시에도 역시 콜을 외쳤다.
쾅.
그리고는 육각이 든 컵을 탁자 위에 호쾌하게 내려치고는 다시 컵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말하는 것이다.
“어라! 고블린이로군. 이거 정말 아깝게 됐네.”
어쨌든 컵 안의 육각이 내가 지정한 수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나가 빗겨 나가자(물론 이 경우 고블린은 주사위의 1에 해당한다) 카르시에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흔쾌하게 내 판돈을 쓸어 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카르시에가 원하기만 하면 제멋대로 패를 조절할 수 있는 육각 놀이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즉! 이 경우에는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 봤자 카르시에가 패를 들고 있는 이상 절대 승산이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서쪽에선 지금 한창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던데.”
단! 애당초 나는 돈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다음 판돈을 걸면서 은근슬쩍 그렇게 카르시에를 떠 보았다.
“후후! 자네도 검사이다 보니 전쟁 소식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그러나 대답은 카르시에가 아니라 옆에서 그냥 우리 판을 지켜보고 있던 크레이안이 대신 해 주었다.
“현재는 우리 세틴 제국이 승승장구 밀고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라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가 않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서 대륙의 크렌티아 제국도 그리 만만하게 볼 나라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다시 카르시에가 그 말을 이어 받았다.
“흥! 하지만 그래 봤자 아니겠는가? 말이야 바른말이지 레바돈 대륙 전체를 통틀어 봐도 우리 세틴 제국을 상대할 나라는 하나도 없지! 물론 지금은 전쟁이 소강상태라고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국방성에서 아직 꺼내 놓지 않은 카드가 몇 개나 더 된다고 하더군. 지금도 그걸 꺼낼 시기만 견주고 있다는 소문이야.”
“호오! 그렇습니까? 그럼 승리는 거의 확정적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크레이안의 말에 카르시에도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 세틴 제국이 괜히 군사 대국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네.”
어쨌든 그 와중에도 판은 돌아 대략 세 판 중 두 판을 카르시에가 따고 나머지 한 판을 내가 체면치레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이것도 다 카르시에의 수작이겠지만…….
크레이안이 말했다.
“근데 자네 혹시 그 전쟁에 참가할 생각인가? 쯔쯔! 참게나. 사실 전쟁에 뛰어들어 봤자 절대 큰돈은 못 만져. 만일 자네가 전쟁으로 출세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전쟁보다는 나를 따라서 상단의 호위를 맡는 게 훨씬 더 이득일 걸세. 물론 자네 같은 낭인 무사가 전쟁으로 출세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하늘에 별 따기란 사실을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 전쟁으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은 애송이나 하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싱긋하고 웃어 주었다.
어쨌든 순식간에 오고 간 돈이 5,000골드를 넘어가고 내가 잃은 돈도 거의 3,000골드에 달할 때 즈음해서 나는 한번 판을 뒤엎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아무래도 감질 맛이 나서 안 되겠군. 이번엔 판을 좀 크게 벌여 봅시다. 고블린에 2,500골드 걸겠소.”
한 판에 거는 판돈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긴 하지만 카르시에는 그저 안면에 그득 미소를 담고는 컵을 흔들어 보였다. 당연히 콜이라는 소리였다.
‘훗! 내가 어지간히 호구로 보였나 보군. 하긴! 이제껏 제 맘대로 판이 돌았으니 내가 가소롭게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카르시에가 컵을 탁자 위에 내려치는 순간에 탁자에 마나를 살짝 내뿜어 육각을 한 번 더 톡 튀기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카르시에는 당연히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고는 호쾌하게 컵을 들어 올렸다.
“정말 통이 큰 친구로구먼. 하지만 나도 어제 간만에 좋은 꿈을…….”
물론 컵을 들어 올린 순간 카르시에의 얼굴이 마치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당연히 육각은 고블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막판에 내가 운이 트이는 모양이군요. 어쨌든 한 방에 본전 회복, 그리고 역전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내가 판돈으로 걸린 7,500골드를 전부 휩쓸어 가자 카르시에는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엄한 크레이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 남작님! 저…… 전 아무것도…….”
물론 크레이안도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후후! 크레이안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사람에게 잘못 엮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하지만 카르시에는 자신이 5,000골드나 되는 돈을 한 번에 잃어버린 사실이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사기다. 분명 네놈이 수작을…….”
그러나 카르시에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실버 클래스의 도박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