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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22화)
제13장 드러나는 어둠(1)
“응?”
내가 그 소란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젊은 귀족 아가씨 하나가 로브를 잔뜩 뒤집어써서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놈팡이 둘을 데리고 실버 클래스 도박장을 유유히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음! 세르니아 카람스 공작 영애께서 요즘 이곳을 자주 찾으시는군.”
하지만 카르시에는 아무래도 이곳 죽돌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 크게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잠시 다녀오겠네. 그리고 크레이안! 이 일은…… 끄응! 조금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지.”
대신 오늘은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식의 결의만 얼굴에 가득할 뿐이다. 결국 카르시에는 내게 잃은 5,000골드는 이제 더 이상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 귀족 영애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물론 크레이안은 상당히 낭패를 본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귀족 아가씨에게 발길을 돌리는 건 유독 카르시에만이 아니었다. 마치 그 귀족 아가씨와 눈길 한 번 마주치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도 되는 냥 실버 클래스 도박장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우르르 그 여자 주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귀족 여자와 같이 온 로브를 뒤집어쓴 두 놈팡이가 마치 보디가드라도 되는 듯 사람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문뜩 보고야 말았다.
두 놈 중 하나가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내뻗은 손에 황금색의 털이 수북이 돋아나 있었다는 사실을……. 물론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묘인족의 특징 중 하나였다.
그 사실에 내가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 여자는 실버 클래스 도박장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바로 계단을 타고 어디론가 올라가 버렸다.
“아무래도 골드 클래스 회원이신 모양이군. 아! 그것보다 일단 자네 잠시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세나.”
물론 크레이안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나는 대강 도박판을 정리하고는 크레이안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그 여자가 올라간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 어이! 미첼.”
당황한 크레이안이 얼른 내 발길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나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사람들 틈 사이를 슬며시 파고들어 그 귀족 여자가 올라간 계단으로 다가갔다.
“잠깐! 여기는 더 이상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물론 계단을 담당하고 있던 경비병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귀족도 통과시키지 않는데 나 같은 정체불명의 한량은 오죽하랴.
하지만 나는 볼 것도 없이 손등으로 그 경비병의 턱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크어어어억.”
콰당.
결국 그 경비병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턱뼈가 빠진 채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이냐.”
그 모습에 맞은편에 있던 경비병도 허둥지둥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이 경비병들 역시 아무래도 소드 나이트 정도의 실력은 되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한창 못 미치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퍽.
나는 볼 것도 없이 그 녀석의 명치에 주먹을 내질러 버리고는 차마 비명도 못 지르고 컥컥거리는 놈의 뒷덜미를 수도로 내리쳐 바로 기절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카르시에를 비롯한 실버 클래스 도박장에 있던 귀족 놈들이 그런 날 기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 잠깐! 네놈, 무슨 짓을 하려고…….”
퍼어억.
물론 그중에 간담이 큰 놈이 내 뒤를 쫓아오려고 했지만 귀찮았던 나는 그놈을 가볍게 걷어차 계단 아래로 나뒹굴게 만들었다. 물론 계단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받아 줘서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놈도 잔뜩 분개한 표정으로 다시 나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크으으윽.”
하지만 나는 그놈이 다시 내게 달려들기 전에 발뒤꿈치로 계단 중앙 부분을 있는 힘껏 내리찍어 버렸다.
콰르르르르르.
결국 내 발길질에 견디지 못한 계단이 중간 부분에서 와르르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고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가볍게 다음 층으로 건너뛰어 버렸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골드 클래스 도박장 안으로 들어서니 아래층의 소동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경비 무사들이 내가 골드 클래스 도박장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검을 뽑아 들고는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세르니아 카람스 공작 영애께서 자리해 계시다. 그런데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물론 그들 모두가 소드 나이트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은 물론이고 세르니아인지 뭔지 하는 여자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대신 그 여자 뒤에 서 있는 로브의 사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거기 묘인족 녀석, 이리 나와.”
그 사내는 설마 내가 자신을 가리킬 줄은 몰랐던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르니아에게 잠시 뭔가 허락을 구하는가 싶더니 곧 후드를 뒤집고 젖히고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확실히 놈은 내 예상대로 묘인족이었다.
“…….”
그런데 그놈은 왠지 느낌이 께름칙한 게 보통 묘인족에게서 나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저 녀석의 몸에서 풍겨나는 이 역겨운 냄새는…….
내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했다.
“정말 모를 일이로군. 아무래도 노예 신분은 아닌 것 같은데……. 너, 묘인족 주제에 왜 이렇게 사는 거지?”
하지만 내 말에 그 묘인족이 큭큭 웃어 대기 시작했다. 묘인족이 말했다.
“뭔가 했더니…… 혹시 너도 날 노예에서 해방시키느니 어쩌니 하는 반 노예주의자인가? 간혹 인간들 중에 이종족 노예를 반대한단 핑계로 감히 귀족들에게 무례를 범하고 다니는 쓰레기가 몇 있다고 들었다만…….”
“…….”
“어쨌든 실제로 이렇게 만나고 보니 정말 어이가 없군.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한참 잘못 짚었다. 나는 비록 묘인족으로 태어났지만 실제로 묘인족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몸이다. 물론 노예도 아니지. 사실 나는 여기 계신 세르니아 아가씨를 모시는 충실한 수하에 더 가깝다.”
그 말에 내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르니아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고 있었고 그 묘인족 역시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카람스 공작가에 태어나 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게린트 바르시에라고 한다. 이래 봬도 기사 신분을 가진 카람스 공작 가문의 충실한 가신이지.”
“그런가?”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묘인족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 길들여진 묘인족이라는 거군. 더 이상 묘인족 취급도 못 받으면서 일족에게 있어서는 묘인족의 수치라고까지 여겨지는 바로 그 녀석 말이다.
원래 묘인족은 같은 묘인족 무리가 아닌 인간의 손에 나고 자라게 되면 스스로의 본성은 잃고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마치 집에서 키우는 집 고양이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충실한 가신이라고? 흥! 이건 거의 개냥이 수준이로군.’
개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고양이라……. 하지만 나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불쾌했다.
묘인족들이 왜 이런 길들여진 동족을 굳이 일족의 수치라고 하는지 이제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스스로는 자기가 인간의 편에 선 독특한 묘인족 정도로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가씨 앞에서 소란을 피운 죄는 분명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내 착잡한 기분은 아랑곳하지도 않겠다는 듯 주위의 경비병에게 손짓을 해서 날 공격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 역시 지금 기분이 상당히 꿀꿀한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손속이 훨씬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퍽.
콰당.
파파팍.
쿵.
결국 네 명이나 되는 소드 나이트 급의 경비병을 맨주먹으로 쓰러뜨리는 데 채 10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끄으으으응.”
물론 쓰러진 경비병들은 태반이 정신을 잃고 어딘가 부러져 사경을 헤매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게린트라는 이름의 개냥이 묘인족이었다.
“으음…… 이거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놈이었군. 설마 상급의 소드 나이트인가?”
하지만 내가 굳이 거기에 대답해 줄 의무는 없겠지. 물론 내 눈 앞에 있는 묘인족도 꽤 실력이 되는 듯 양손에 손톱을 뽑아 들고는 열 줄기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츠츠츠츠.
게린트가 말했다.
“고작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너에게 오늘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그리고는 손톱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하늘은 개뿔…….”
나는 게린트의 공격을 슬쩍 피해 내며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어쨌든 고작 그 정도 수준에 당할 내가 아니다.
물론 보통 묘인족에 비하면 체계적으로 훈련을 마친 듯 상대하기가 꽤 까다롭기는 했다. 힘은 같지만 마구잡이식으로 싸움질을 하는 동네 깡패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군인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래도 내겐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했다.
나는 굳이 여기서 검을 꺼내 들 것도 없이 놈과 몇 번 공방을 나누다가 놈의 손톱이 양 사방으로 짓이겨 들어오는 타이밍을 노려 게린트의 공격을 피해 도리어 품 안으로 파고들며 명치에 짧게 주먹을 내질러 버렸다.
퍼억.
물론 아무리 놈이 달인이라고 해도 내가 내지르는 급소 공격을 어떻게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쿠에에엑.”
결국 게린트도 혀를 길게 빼물고는 명치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주저앉은 놈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고는 질질 끌면서 밖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넌 훈련이 조금 필요할 것 같구나. 될지 안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 썩어 빠진 근성을 내가 철저히 고쳐 주마. 그나마 제대로 된 묘인족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게린트를 데리고 도박장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차르르르르.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기묘한 파공음이 들리면서 뭔가가 내 오른 손목을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게린트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그 손 말이다.
“칫!”
결국 나는 그 공격을 피해 게린트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얼른 뒤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도 너무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팔목을 예리하게 베이고 말았다.
“이런! 이 자리에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놈이 있었던가?”
아무리 내가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건 상대도 절대 보통은 아니라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나는 문뜩 팔에 난 상처를 슬쩍 혀로 핥아 보다가 마치 혀가 마비되는 것 같은 역겨운 맛에 이내 퉤 하고 뱉어 버렸다.
“쳇! 독이로군.”
그러자 게린트와 함께 세르니아의 옆에 있던 나머지 로브 사내가 다시 내 앞으로 나섰다.
“내 공격을 피해 내다니…… 꽤 괜찮은 실력이로군. 소드 킹인가?”
“…….”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 로브 사내는 내가 침묵으로 긍정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진중한 목소리로 말문을 이었다.
“놀랍군. 이런 곳에서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소드 킹을 만나게 될 줄은…… 하지만 함부로 그 녀석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 말에 나는 마나로 상처의 독을 밀어내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비웃었다.
“호오? 그러셔? 그래서 지금 날 막으시겠다?”
그러나 놈은 대답 대신 마치 채찍처럼 생긴 무기로 날 공격해 들어왔다. 사실 놈의 무기는 쇠줄에 짧게 잘려진 검날 모양의 파편을 하나로 연결해 만든 기묘한 모양의 무기였던 것이다.
“칫!”
저런 기형 무기를 저렇게나 잘 다루다니…….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무기에 조금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놈이 아무래도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백팩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검강을 내뿜기 시작하자 놈도 다시 쇠줄을 감아 자신의 무기를 마치 검 비슷한 모양으로 바꾸고는 거기에 자신도 나처럼 검강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
결국 놈도 소드 킹 정도의 실력자였단 말인가?
하지만 놈과 내가 내뿜는 검강에는 전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내 검강이 전체적으로 은근히 황금색을 내뿜는 백색의 기운이었다면 놈의 검강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까만 검은색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심연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내가 그놈이 내뿜는 검강에 눈살을 찌푸려 보이자 그놈도 피식 웃으면서 후드를 뒤집어 내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훗! 재미있군. 하지만 고작 소드 킹 정도의 실력으로 내 앞에서 뻐기지 마라. 그 정도 실력으로는 절대 내 상대가 안 된다. 사실 이곳 인간들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도 날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
그리고 녀석의 드러난 얼굴은 절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