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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렌 1권(23화)
제13장 드러나는 어둠(2)


비록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죽은 사람처럼 흙빛의 피부에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눈동자, 그리고 양 이마에서 뻗어 올라 머리 뒤로 휘어져 자라고 있는 두 뿔은 이 녀석이 절대 인간이 아님을 단적으로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마치 잘생긴 괴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이거 이 세계에는 왠지 만화 같은 놈들이 넘쳐 나는군.
“어쨌든 나는 만마전(萬魔殿, Pandemonium)의 군주이신 마왕 아몬 휘하의 마계 일등 기사 체르너스라고 한다. 너는?”
결국 놈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란 소리였다.
‘세틴! 이놈들 설마 마계와도 연을 맺고 있는 건가?’
나는 왠지 알 수 없는 생리적인 불쾌감을 느끼며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굳이 녀석과 통성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대강 내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을 내뱉어 주었다.
“그냥 떠돌이 낭인 무사다. 미첼이라고 하지.”
하지만 놈은 내 거짓말을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결국 체르너스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가? 어쨌든 대단하군. 그 나이에, 게다가 떠돌이 무사 신분으로 벌써 소드 킹이라니……. 어떤가! 굳이 떠돌이 생활을 할 필요 없이 우리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나?”
체르너스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는 도리어 세르니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세르니아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했다.
‘……결국 저건 체르너스 본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세르니아라는 저 계집애의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마족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질 못하다. 물론 마족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이미 묘인족 꼬맹이 시절 때부터 시안나로부터 충분히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흥! 나더러 썩어 빠진 네놈들 마족하고 손을 잡으라는 거냐?”
흔히 말하는 마계의 존재, 즉 마족은 피와 파괴만을 부르는 이계의 악마라고 한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가진 지상 최대의 과제는 바로 차원을 넘어 이 땅으로 내려와 이곳 레바돈을 마계와 같은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들었다.
물론 나도 ‘마족은 원래 그렇다.’라는 시안나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결국 놈들도 이 세계를 멸망시켜서 뭔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어이가 없는 놈들이라니까. 감히 남의 땅을 짓밟을 생각을 해?’
어쨌든 그들 역시 정령계의 정령들처럼 소환자가 없으면 결코 이 땅을 밟을 수 없다. 하지만 정령의 경우에는 급이 높아지면 소환자 없이 이 땅에 강림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고작해야 정령왕 정도지만 어쨌든 마족이나 악마의 경우에는 반대로 힘이 약할수록 손쉽게 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저 정도의 마족을 소환시키려면 그만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쨌든 마계의 존재를 이 땅에 소환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존재에게 협력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가장 큰 금기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마계, 혹은 마왕의 발호는 자칫 이 세계 자체의 멸망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역시나 협상은 결렬인 모양이군. 어쨌든 내 이름을 전해 들었으니 이제 그만 죽어라.”
하지만 내 생각은 거기서 더 이상 길게 이어질 수가 없었다. 놈이 내 거절을 듣고는 바로 날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파파파파팍.
“크으으윽.”
나는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놈의 내려치기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고는 검도 기술을 응용해서 내려친 놈의 검을 슬쩍 옆으로 걷어 올리면서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놈의 머리를 가격해 들어갔다.
“타아앗!”
하지만 마계에서도 기사 짓을 하는 놈답게 체르너스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내 공격을 막아 버렸다.
채애앵.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잠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일격에 우리 둘은 다시 떨어져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틈에 내가 얼른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세틴 제국은 마족 놈들하고도 손을 잡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체르너스는 물론이고 세르니아 역시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확실한 물증이 있는데(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큼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내 말에 부정을 하는 것도 상당히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무언으로 내게 긍정을 표시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눈치를 보아하니 그 둘이 손을 맞잡은 것은 상당히 오래전 일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개인이나 가문 단위의 일은 절대 아니라는 거군. 혹시 아까 카르시에가 말한 제국에서 아직 꺼내 놓지 않은 비장의 카드란 게 바로 이것을 말하는 거였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슬슬 세틴 제국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강국이라고 부르짖는 놈들이 하는 짓이 고작 이런 짓이라니……. 고작 마족의 힘이나 빌려 대륙에 위세를 떨쳐 볼 생각이었나?
어쨌든 세틴 제국이 마족과 깊게 관련된 건 분명한 사실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세틴 제국을 막는 게 곧 마계의 발호를 막는 것이 될 터.
“퉤! 결국 세틴 제국을 먼저 멸망시켜 버리면 깨끗이 해결될 문제란 거군.”
나는 입 안에 잔뜩 고인 역겨운 기분을 뱉어 낸다는 심정으로 바닥에 침을 뱉어 냈다. 물론 나 역시 이제 이 세계의 일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일을 그냥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홍안의 묘인족이란 것 자체가 묘인족에게 피바람이 불 때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신이 내려 주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카이젤은 설마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든 건가? 인간의 전쟁과 마계의 발호에 대비해 우리 묘인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복잡하던 머리도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도 더 이상이 체르너스인지 뭔지 하는 마족에게 당하고만 있을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마음만 먹으면 체르너스를 단번에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사실 놈이 아무리 잘나고 잘난 마족의 기사라고 해 봤자 사실은 칸보다 조금 더 잘난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무기라든가 독이라든가 하는 것 때문에 상대하기가 칸보다 조금 더 까다롭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을 상대할 때 꼭 기술만 가지고 싸우라는 법은 없다. 요는 결과, 그리고 효율이다.
퍼어어억.
챙강.
어쨌든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터. 결국 내가 순간적으로 오러 소드를 완성해 있는 힘껏 휘갈겨 버리자 체르너스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크으으윽.”
물론 그 와중에 놈의 검과 거기에 맺혀 있던 검강이 힘 한 번 못 써 보고 단번에 부서져 버린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경우를 두고 힘으로 까부순다고 하는 거겠지.
어쨌든 체르너스는 설마 자신이 내 한 방에 나동그라질 줄은 몰랐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콰카카카카카카.
하지만 나는 놈이 그러든 말든 검에 마나를 집중시켜 오러 소드에 더욱더 큰 힘을 불어넣었다. 물론 체르너스도 내 오러 소드를 보고는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그 오러는…… 서…… 설마 네 녀석이 소드 엠페러란 말인가? 하…… 하지만 그럴 리 없다.”
“흥! 그럴 리 없다고? 그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허깨비인 모양이지.”
내 말에 체르너스는 더욱더 혼란에 빠진 표정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소드 엠페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우…… 우리가 황금시대의 종말을 고할 때…… 인간이 소드 엠페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영원히 함께 묻어 버렸다. 이제 이 땅에는 더 이상 인간이 소드 엠페러가 될 수 있는 기술은 없단 말이다.”
“…….”
그럼 흔히 말하는 황금시대의 종말도 결국은 마계와 마족들의 소행이란 말인가?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어쨌든 놈이 아무리 발악을 해 봤자 내가 소드 엠페러, 아니! 소드 카이저라는 사실에는 절대 변함이 없었다.
“치이이잇.”
하지만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놈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흥! 그렇다고 해도 내가 쉽게 당할 것 같으냐! 지금 이 자리에는 세르니아님이 계신단 말이다.”
그 말대로 체르너스의 등 뒤에는 세르니아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묘한 시선으로 나와 체르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 꼴에 여자 앞에서 멋이라도 부려 보고 싶다는 거냐?”
물론 대꾸는 없었다. 한마디로 농담할 기분 아니라는 거지! 쳇! 쳇! 딱딱한 놈 같으니…….
어쨌든 마족인 체르너스가 왜 저 인간 여자를 이렇게 극진히 대하는지는 나도 미처 알 수는 없었다. 체르너스 역시 내게 그 이유를 알려 줄 의무는 없었고 말이다.
대신 놈은 여기서 물러 날 수는 없다는 듯 이번에는 검술 대신 다른 기술로 나를 상대했다.
하긴! 내 손에 자신의 애검이 부서져 버렸으니 더 이상 검술을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헬 하운드(Hell Hound) 소환.”
어쨌든 체르너스의 외침과 함께 곧 황소만 한 떡대를 가진 시커멓게 생긴 개 두 마리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릉.
물론 일단 개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이걸 개라고 불러도 되는지……. 그 개는 온몸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었고 두 눈에는 선명하게 붉은 안광을 내뿜고 있는가 하면 입에서는 불꽃과 함께 시커먼 연기까지 토해 내고 있었다.
“거참! 이거 한마디로 완전히 괴물 딱지로군.”
하지만 난 굳이 그 모습에 겁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개는 개다. 꼴에 멋 부려 봤자 어차피 마계에서 소환되는 그 순간부터 복날 개 패듯이 내게 두들겨 맞을 팔자인 것이다.
깨앵…….
깨갱…….
결국 헬 하운드는 채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내 손에 곤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체르너스도 헬 하운드를 소환하면서 그 멍청한 개가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일말도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체르너스는 내가 헬 하운드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에 얼른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게린트와 네 명의 소드 나이트를 한 자리에 모으고는 이내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계의 수호…… 이 땅에…… 강림…… 나! 체르너스의 이름으로…….”
깨갱! 깨갱!
하지만 나는 녀석이 소환한 헬 하운드를 상대하느라 녀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물론 내가 헬 하운드를 모두 제압했을 때는 녀석의 의도대로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는 상태였다.
녀석은 그런 날 보며 싱긋 웃으며 소리쳤다.
“케르베로스(Kerberos) 소환.”
크와아아아아앙.
동시에 검은 공간이 열리며 카랴안 플레이스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골드 클래스 도박장의 홀조차 비좁아 보일 정도로 엄청난 덩치의 삼두견(三頭犬)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릉.
세 개의 머리에서는 유황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짙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꼬리에 달려 있는 뱀 역시 참을 수 없다는 듯 날름 혀를 내밀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덩치 역시 방금 내가 쓰러트린 헬 하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말 그대로 지옥에서 갓 올라온 파수꾼,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모습에 겁을 집어 먹을 이유는 없었다. 도리어 나는 케르베로스를 보며 잔뜩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기랄! 또 개냐?”
어쨌든 케르베로스는 간혹 흑마법사들에 의해 소환되어 토벌대에 의해 퇴치되기도 하는 놈이다. 꽤 까다로운 놈이긴 하지만 결국 내 상대는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이놈을 상대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체르너스 놈의 시간 벌기다.
“레이디,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란테르 후작을 만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체르너스는 케르베로스 소환이 꽤 무리였는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제법 우아한 동작으로 세르니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르니아 역시 이제껏 흥분하는 기색도 없이 상황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다가 체르너스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체르너스 경, 비록 이렇게 물러나는 모습이 그다지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존심을 내세우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가 않군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어쨌든 잊혀진 소드 엠페러의 등장이라……. 하지만 저자가 우리 세틴 제국에 적대심을 품은 이상, 뒤처리만큼은 확실히 해야겠지요. 체르너스 경! 그것을 사용해 주세요.”
“그것…… 말씀이십니까?”
세르니아의 말에 체르너스가 다소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세르니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설마 그것 말고 저 괴물을 상대할 만한 존재가 따로 더 있다는 건가요?”
“음!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그건 아직 실전에 한 번도 도입되지 않은 워낙 일급 기밀에 속하는 물건이라…….”
“원래 물건은 쓰라고 있는 겁니다. 적절한 순간에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결국 고철이나 바를 바가 없겠죠.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적절한 순간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쓰세요.”
그 말에 체르너스도 할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