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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2화)
1장. 탈출!(2)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불볕더위가 찾아왔다.
정오가 아직 지나지 않았음에도 신작로는 열기로 달아올라 꿈틀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일찍부터 찾아든 더위로 인해 오후가 다가오자 만물이 지쳐 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농가가 있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수도권 인근의 한 야산 근처도 더위로 인해 대지가 몸살을 앓았다.
더운 열기로 인해 당연히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변의 풍경은 한산했다.
부우우웅!
주변의 즐비한 논밭을 따라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동차가 신작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차체는 물론이고, 창문까지 검은색으로 짙게 선팅이 되어 있는 자동차가 조금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끼이익!
승용차 열기로 휩싸인 신작로를 뚫으며 농가가 보이는 도로 옆에 멈췄다.
탁!
진한 검은색의 문이 열리며 역시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사나이가 차에서 내렸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사나이는 검정색 양복에 검정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척이나 검은색을 좋은 하는 모양이었다.
탁!
“으음, 좀 덥군.”
사나이는 차문을 닫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선글라스 안으로 비쳐 들었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오후가 되지 않았음에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조금 구겨졌군.”
중요한 곳을 방문하는 듯 사나이는 아래위 정장을 다시 점검하고 넥타이까지 고쳐 맸다.
사나이는 도로 옆에 나 있는 작은 소로로 눈길을 돌렸다.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소로의 끝에는 세 채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곳인가?”
농가를 바라보는 사나이의 눈가가 마음의 동요를 말해주는 듯 작게 떨리고 있었다.
“흔들리지 말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후우∼”
소리가 들리도록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사나이는 작은 소로를 따라 올라갔다.
세 채의 농가 중 가장 큰 집의 문 앞에 섰다.
언제 만들어진지 모를 정도로 빛 바랜 나무 대문이 사나이를 맞았다.
탕! 탕!
“선생님!”
사나이는 문을 두드린 후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집안으로 알렸다.
“누구신가?”
약간 시간이 지난 후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렸다.
“접니다. 선생님.”
사나이의 대답에 잠겨 있는 대문이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아니, 자네가?”
“언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나이를 확인한 노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어쩐 일인가?”
“지난 몇 달 간 일본에 있다가 어제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허어, 그래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구먼.”
그간의 격조가 어떤 이유였는지 확인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떠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아닐세. 바쁘게 일하는 사람인데. 이 늙은이까지 신경 쓰이게 하면 쓰나.”
“아닙니다. 제 불찰이 큽니다.”
“허허,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밖에 세워놨구먼.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노인은 사나이의 손을 잡아끌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손님이 오셨으니 냉차 좀 내와요. 자! 자네는 나와 함께 방으로 가세.”
부엌을 향해 손님이 왔음을 알린 노인은 사나이를 사랑채로 이끌었다.
“예, 선생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건넌방의 문이 살며시 열렸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누구지? 할아버지께 저런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장혁은 의문 어린 눈빛으로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소란이 일며 나타난 손님은 장혁에게 작은 파란이 일게 만들었다.
잠깐 스쳐 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못 본 것이겠지.’
고개를 흔들며 장혁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차를 사랑채로 가져가기 위해서다.
“할머니!”
부엌문을 열고 장혁이 할머니를 불렀다.
“금방 만드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혁아!”
“예, 할머니.”
혁은 부엌문에 기대어 냉차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방금 들어온 그 손님은 분명 뭔가가 있어.’
냉차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장혁의 생각은 사랑채로 들어간 낯선 손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피어오르는 불안감 때문이다.
뭔지 모르지만 오늘 찾아온 손님은 아주 위험해 보였다.
사나이는 사랑채로 들어선 후 안을 둘러보았다.
본래는 네다섯은 너끈히 지낼 수 있는 사랑채지만 고서적이 벽을 따라 가득 쌓여 있어 겨우 사람 하나 누울 만한 공간만 남은 터라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여전하시구나.’
방금까지 보고 있었는지 작은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빛 바랜 고서로 보기 드문 진귀한 서적임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책상을 치운 후 자리에 앉았다.
“자, 앉게.”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아닙니다.”
노인의 만류에도 사나이는 절을 올렸다. 노인 또한 과한 예라 생각했는지 반절을 했다.
“편히 앉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전 이게 편합니다.”
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며 노인이 편하게 있을 것을 권유했지만 사나이는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듯 자세를 풀지 않았다.
“하하하! 사람도. 그래, 자네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일본에 다녀왔었군. 그래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사나이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터라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 노인이 연유를 물었다.
“전자산업을 한 번 시작해 볼까 해서 일본에 가서 현지 시장조사를 좀 하고 왔습니다.”
“하하! 그쪽으로 진출할 예정이라면 확실히 전망이 밝기는 하지. 자네 사업 수완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쪽 분야까지 진출할 줄은 정말 몰랐네.”
노인이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 쪽은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보고 있는데 잘하면 성과를 조금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기업들이 속속 진출할 것이 예상되니 고전은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하고 있는 사업은 조금씩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사람, 엄살은. 자네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을 믿으시게. 쓸데없는 걱정으로 사업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말이야.”
“예, 선생님.”
노인의 격려에 사나이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할아버지, 냉차 가져왔습니다.”
문밖에서 조금은 앳된 장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차가 만들어지자 가지고 온 것이다.
“어서,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온 장혁은 유리컵에 담긴 오미자냉차 두 잔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못 보던 아이로군. 누구지?’
사나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노인의 신상이나 가족 사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자신의 정보에는 없었던 이가 장혁이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후, 자네는 한 번도 못 봤을 걸세. 얼마 전에 막내 손자로 들인 아이니 말이야.”
“그렇군요.”
사나이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어쩔 수 없으셨겠지…….’
노인에게 자식은 많았지만 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자식들 중 둘이나 단명을 했고, 남아 있는 자식들도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대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가서 할머니를 도와주거라. 점심 식사는 손님 것도 차리라 말씀드리도록 하고.”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당부를 들은 장혁은 곧바로 방을 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그래, 자네가 볼일도 없이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일로 왔는가?”
장혁이 나가자 노인은 사나이가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으음.’
사나이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 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표정에 다른 음색이다.
흔들리지 않는 굳은 눈동자에 어린 눈빛이 자신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으음, 이미 알고 계셨던가?’
온화함이 아니라 결연하기 만한 눈빛을 보면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사나이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하던 사나이는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가감 없이 꺼내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고 했는가?”
노인이 경직된 어조로 되물었다.
“예, 선생님. 아드님께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관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이 세상에 나오지 않도록 협조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으음…….”
정중하지만 단호한 부탁에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그것을 얻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거늘. 이미 알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저 사람이 직접 온 것을 보니 태륜이라는 곳에 대해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거대한 권력의 비리를 파헤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낸 터라 누구도 모르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태륜이라는 집단이 가진 힘이 가공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제대로 틀어졌다는 생각에 노인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오늘 가족들이 전부 모인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허허, 천려일실이라 했던가. 한순간의 실수가 가문을 멸문으로 이끄는구나.’
태륜은 결코 자비로운 집단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면 다음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사나이가 찾아온 것을 보면 태륜이 손을 쓰기로 작심을 한 것이니 앞으로 전개될 수순은 뻔한 것이었다.
태륜에서는 자신의 가문을 지우기로 한 이상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혼자 온 것을 보면 기회는 지금 뿐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문이 이어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력이 전부 동원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기에 노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노인은 먼저 시간을 벌기로 했다.
“미안한 이야기네만, 생각해 볼 시간을 좀 주도록 하게.”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오늘 중으로 결정을 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반응을 예상을 하고 있었던지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는 말에 노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늘 중으로 말인가?”
“저도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합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사나이를 보며 노인은 정말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으음, 알았네. 마침 아이들이 다 모이기로 했으니 결정이 나는 대로 가부를 말해주겠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 일로 찾아뵙게 돼서.”
사안의 흉험함과는 달리 사나이는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숙였다.
“아니네. 자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네. 천천히 점심을 들고 난 뒤에 결정을 듣고 가도록 하게.”
“예, 선생님.”
‘다행히 불행한 사태는 피할 수 있겠구나.’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노인의 말을 들어보니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날 것 같아 굳어 있던 사나이의 얼굴이 약간은 풀어졌다.
“난 아이들을 부를 테니 자네는 여기서 차를 들고 있게나.”
“그러십시오.”
사나이의 대답을 들은 노인이 밖으로 나섰다.
노인이 나가자 사나이는 말없이 차가운 결로가 위태롭게 서린 컵을 집어 들었다.
‘차군.’
꿀꺽!
차가운 냉차가 사나이의 목젖을 적셨다.